“비법, 비방과 같은 정보독점, 대중에게 더 이상 어필할 수는 없어”
“공직 진출 한의사는 친근하고 상대를 설득하는 능력 갖추길 바라”
이정섭 과장(국립재활원 한방내과)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원광대 전주한방병원에서 한방내과 전문의를 취득하고 한국한의학연구원 뇌질환연구센터 선임연구원을 거쳐 현재 국립재활원 한방내과에서 재직하고 있는 이정섭 과장으로부터 현재 맡고 있는 주요 역할 등을 들어봤다.
일반 개원의의 길을 걷는 대신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선택한 것이 국립재활원에서 한의 공공의료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는 일이었다. 국립재활원은 ‘장애인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듭니다’라는 미션을 표방하고 있다.
이에 이정섭 과장은 매 순간 잘 치료하고, 잘 설명하는 의료인이 되고자 다짐하고 있으며, 한의학의 진정한 가치를 잘못 이해하거나 오해하고 있는 환자들의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한의학을 쉽게 설명하는데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이다.
Q. 공직을 선택한 이유는?
전문의 취득 후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비록 늦은 나이였지만 ‘지금 아니면 해 볼 수 없는 일’을 해보고 싶었으며, 한의계를 조금 벗어난 일이라도 흥미로울 것 같았다. 하지만 정보가 부족했고, 한의사의 효용이 잘 인정받지 못했다. 더 용기를 내고, 도전하지 못했음도 인정한다. 그렇기에 행정부와 입법부, 사법부의 공무원이 되고, 최고경영자가 되고, 보건소의 수장이 된 교과서 밖 선배와 동료 한의사들이 부럽고 존경스럽다. 그분들에 비해 저는 소심한 선택을 하였고,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는 연구와 진료 분야의 공직을 선택하였다.
Q. 한의학연구원의 경험이 시야를 넓혀주었다.
연구과제 참여를 계기로 한의학연구원에 재직하게 됐다. 임상전문가인 전문의가 초보 연구원이 된 것이다. 연구원에서 한참 적응 중인 어느 날, 연구와 관련된 간단한 기고 글을 쓰고 나의 보스(연구책임자)에게 검토를 부탁했다. 생명과학계에서 저명한 보스는 제 글을 읽어보고는 반 이상을 편집했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다.
글이 허술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그때 오랫동안 소수민족 언어를 쓰다가 세상에 나와 의사소통의 어려움에 당황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이후 다른 전공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한의학 언어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Q. 공공의료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국립재활원의 재활병원은 1994년에 신설됐으며, 이후에 많은 분들의 요구와 노력으로 2010년 한방재활의학과가, 2013년 한방내과가 신설되었다. 오랫동안 한의사들이 이룩한 장애인 진료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국립재활원에는 개원 16년 만에 한의 진료부서가 설치된 것이다.
국립재활원이 한의과를 설치한 궁극적 목표는 의과-한의과 간 협진의 활성화다. 저는 한의학연구원에서 다학제 연구자들과의 협업을 경험하고 나서, 국립재활원과 같은 다양한 직역이 어우러져 일하는 곳에서도 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일을 시작하게 됐다.
Q. 국립재활원에서 주요 역할은?
국립재활원이 표방하는 미션은 ‘장애인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듭니다’이다. 국립재활원에서 뇌졸중, 뇌손상, 척수손상 및 재활이 필요한 환자들은 입원치료를 받고, 이들이 퇴원하면 외래진료와 사회복귀를 위한 여러 서비스를 받는다.
제가 일하는 곳은 많은 분들이 잘 되길를 염원했던 소중한 공간이다. 저는 자칫 3~6개월 동안 한의학을 경험할 수 없었을지도 모를 분들을 위해 매 순간 잘 치료하고, 잘 설명하려 노력한다. 의사들은 소홀히 하는 질병 이후의 섭생법도 잘 교육해야 한다. 한의학을 오해하는 환자들에겐 받아들이기 쉽게 설명도 잘 해야 한다. 몸이 불편해서 어려운 시기에 성실하고 따뜻한 조언을 해 준 사람이 기억난다면, 그 사람은 제가 되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성심을 다하고 있다.
Q. 공직 진출을 위해 조언한다면?
공직은 성격이 다른 여러 분야로 구성되어 있어 진로 개발에 확실한 공식이 없다. 연구직의 경우 기회가 될 때마다 직간접적으로 연구과제에 참여하면서 본인의 능력과 의지를 잘 피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전문 분야에 대한 학위과정이나 배경지식을 쌓기 위한 단기교육으로 자신의 콘텐츠를 쌓는 것은 기본이다.
진료와 관련된 공직 진출은 선발 주체에 따라 다양하다. 제가 경험한 공개경쟁 채용의 경우 자기소개, 직무계획, 면접으로 이뤄져 있었다. 저는 수련경력, 연구경력을 포함한 전공지식에 대한 넓은 이해와 공무원 조직에서 잘 적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줘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면접관으로 참여했거나 지인에게 얻은 간접경험으로 비춰보면, 해당 기관에서 요구하는 분야의 전문의가 자신의 강점을 알릴 수 있어서 한층 더 유리했다. 진료 분야의 공직에 관심이 있다면, 꼭 수련과정을 거쳐 전문의를 취득하시기를 권한다.
Q. 공직자가 갖춰야할 덕목은?
저는 공직에 진출한 한의사는 친근하고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국립재활원은 보건복지부 소속 기관이다. 여러 분야의 공무원들과 공적, 사적으로 교류할 일이 많다. 같은 공무원으로서 자연스럽게 서로의 분야에 대해 교류를 하다보면 은근히 우리의 입장을 전하고 설득하는 일도 많이 생긴다. 그렇게 미래의 정책 책임자, 실무자들인 관료들에게 우리 한의학의 존재와 필요성을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공직에 진출한 한의사는 한의학과 의학, 모두를 두루 잘 아는 사람이면 좋겠다. 우리 시각과 언어에만 집착하지 않고, 상호 장단점을 잘 포용했으면 한다. 특히 공공의료에서 서양의학의 사고체계와 용어는 현실적으로 공용어와 같다. 우리만의 언어를 공용어의 틀에 맞추어 잘 전달해야 한다. 간단한 기초지식에서 오류가 발생하면 안 된다. 임상현장에서 항상 확인하고 현행화해야 한다. 나 자신이 공공을 대표하는 한의사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Q. 급변하는 세상에서 한의학의 미래는?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변화에 뒤처지면 약화되고 사라진다. 나만의 비법, 비방과 같은 정보독점을 통해 대중에게 더 이상 어필할 수는 없다. 정보는 개방되고 표준화되어야 세상에서 가치를 더 발휘할 수 있다. 물론 개인화된 맞춤의학으로서의 한의학 특성이 훼손된다는 우려가 있을 수는 있지만, 이는 표준화라는 큰 담론 안에서 녹여내야 한다. 최근 의미 있는 노력 가운데 한의약진흥원이 진행하고 있는 한의표준진료지침 사업이 눈에 띈다. 많은 분들의 공감과 참여로 훌륭한 결실을 맺기를 기대한다.
Q. 나의 다짐은?
아침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진료실로 향한다. 북한산이 포근하게 감싸는 국립재활원은 환자가 주인인 곳이다. 이곳에서 만나는 모든 분들의 삶을 듣고 있는 제 마음에 존경과 연민이 교차한다. 이들 앞에 의술은 한없이 부족하기만 하다. 그렇기에 마음을 다하고자 하며, 그 마음이 환자에게 올곧게 전해지길 늘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