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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4일 (일)

“내년에도 벚꽃을 보러 올 게요”

“내년에도 벚꽃을 보러 올 게요”

한의학 웰빙 & 웰다잉 25
그녀의 삶에 가장 기적 같은 순간이, 더 희망찬 순간이 다가오길 기대

김은혜 원장님(최종).jpg

 

김은혜 치휴한방병원 진료원장

<선생님, 이제 그만 저 좀 포기해 주세요> 저자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한의사로서의 직분 수행과 더불어 한의약의 선한 영향력을 넓히고자 꾸준히 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 김은혜 원장의 글을 소개한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암 환자를 봐 왔지만 아직까지도 버거운 상황이 있다. 바로 환자가 처음 암을 진단받을 때이다.

병동 문이 열리면서 젊은 여자가 울면서 들어왔다. 흰 얼굴에 검은색 숏컷 머리를 하고 큰 키에 늘씬한 체형이어서,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쳤다면 뒤를 돌아보며 한 번 더 쳐다봤을 미인이었다. 


흔히 볼 수 있는 아이보리색이 아닌 눈같이 새하얀 코트를 입고 들어오는 모습에 눈길이 더 갔고,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눈물로 빨갛게 달아오른 눈은 흰 코트 덕에 더 애처롭게 보였으며, 그 눈물을 훔치며 떠는 손은 벌써 애가 쓰이게끔 만들었다.


옆에 앉혀 휴지만 조용히 건네고 울음소리가 사그라질 때까지 기다리면서 차트를 보니 ‘연령 29세’라고 적혀 있었다. 어김없이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겨우 삼키고 좀 더 기다렸더니 들썩거리던 가슴이 점점 진정되는 것이 보였고 이내 환자는 여전히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방금 유방암 진단받고 왔어요. 자궁이랑 뼈에 전이도 있대요.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다음 달부터 항암 치료하기로 했는데…… 그냥 죽어버리고 싶어요.”


“이럴 바에야 그냥 죽고 싶다”


‘이럴 바에야 그냥 죽고 싶다’는 말은 암 환자와 같이 있다 보면 자주 듣는 표현이다.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의 표현일지, 현재 상황에 대한 탈진을 표현하는 말일지, 살려 달라는 말을 역설적으로 외치는 것일지, 혹은 정말 진심을 담아 하는 말일지. 어떤 의미든 환자가 이 말로 나에게 전하려 하는 의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환자를 달래며 병실로 들여보내고 스테이션에 앉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하던 중에 문득 고개를 돌렸더니 창 너머 색색으로 물든 단풍나무들이 보였다. 그제야 병원 앞 도로가 단풍나무 때문에 멀리서도 찾아오는 명소이며, 의사들도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서 종종 걸으러 간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곧장 일어나서 환자에게 가 입원 중에 병원 앞을 산책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음을 알려주고 원하시면 같이 가겠다고 이야기했다. 얼떨떨한 반응을 보이던 첫날과 달리 다음 날 곧바로 환자와 나는 길을 걸으러 같이 나왔다.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나가자고 했건만 환자는 그 길을 걷는 내내 “올해가 이 단풍들을 볼 수 있는 마지막 해겠죠?”라며 떨어지는 단풍잎들을 손에 올려놓고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울음을 터뜨렸다. 병원에 복귀하기 직전까지도 “내년에는 못 볼 거니깐…….”이라고 말하면서 단풍잎 하나를 챙겨 병실로 들어왔다. 


그다음 날 환자 옆자리를 쓰고 있던 할머니가 나한테 조용히 와서는 그날 밤 내내 챙겨 온 잎을 손에 꼭 쥐고서는 소리 죽여 운 것 같다고 말해 주었다. 내내 운 게 여실히 드러나는 퉁퉁 부은 눈으로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환자는 산책을 나가서 단풍잎을 들고 들어왔다. 그렇게 수북이 쌓인 잎을 어디서 났는지 모를 상자에 담아 들고 항암 치료를 받으러 가기 위해 퇴원했다.


“마지막으로 벚꽃 보러 왔어요”


그 후 환자의 얼굴을 다시 본 건 단풍 명소 반대편으로 뻗어 있는 벚나무 길이, 해가 바뀌면서 흐드러지게 핀 벚꽃으로 가득 차고 찬란한 연분홍빛의 길로 바뀌어 있던 4월이었다. 동명의 이름으로 30세라고 뜨는 환자 명단을 확인하자마자 병동 문이 열리더니 이전에 퇴원할 때 챙겨 나갔던 그 상자를 손에 든, 보다 더 야윈 듯한 여자가 들어왔다.


“항암 치료는 계속 받고 있고요, 자궁은 결국 다 들어냈어요. 이번에는 마지막으로 벚꽃 보러 왔어요.”

벚꽃 길은 원래 입원 중에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지만 내가 같이 간다는 조건으로 병원의 허락을 받아 다시 한 번 같이 걸을 수 있는 날이 왔다. 이번에도 떨어져 있는 벚꽃 잎을 주우려는 환자에게 벚꽃 잎은 빨리 시들지 않겠냐고 물었더니 “어차피 오래 보지도 못할 텐데요 뭐”라는 말이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돌아왔다. 하지만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건 지난번처럼 걸음마다 울음을 쏟아내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한 달 뒤 상자 속에는 단풍잎 위에 벚꽃 잎이 소복이 쌓였고 환자는 “그간 감사했습니다”라고 말하고서 퇴원했다. 나 또한 그녀의 새하얀 얼굴을 볼 수 있는 건 그때가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해 10월, 환자는 다른 상자를 들고서 병동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항암 치료는 계속 받고 있고요, 뼈는 방사선치료를 했더니 지금까지는 괜찮대요.”


따로 말은 없었지만 환자와 나는 그날부터 단풍 길을 걸었고 환자는 여전히 단풍잎을 주워 담고는 몇 주 뒤 퇴원했다. 다시 해가 바뀌고 환자가 31살이 되던 해 4월, 환자는 “항암 치료는 계속 받고 있어요”라며 다시 돌아왔고 우리는 벚꽃 길을 또 함께 걸었으며 상자는 벚꽃으로 다시 가득 채워졌다. 


퇴원 절차를 설명하던 날, 환자에게 10월에 보자고 말을 덧붙이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해 10월, 감사하게도 또다시 돌아온 그녀는 여전히 “항암 치료는 계속 받고 있어요”라고 담백하게 말했지만 무언가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약간 살이 붙은 것 같기도 했고, 새하얗던 피부가 조금 탄 것 같기도 했지만 가장 큰 건 손에 들려 있어야 할 상자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집에서 잎들을 계속 보고 있는데 정작 선생님이랑 같이 걸었던 그 길들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이 안 나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그만 주우려고요.”


이 말을 마치자마자 내 팔을 잡고 산책길로 끄는 모습이 처음 내가 이 사람에게 단풍 길 이야기를 꺼낼 때 기대했던 미래의 모습과 겹쳐지는 것 같아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며칠간의 산책 후 다시 항암 치료를 하기 위해 퇴원한 환자는 이번에는 자신은 빈손으로 나가며 나에게는 선물을 주고 갔다. 그건, “내년에 봐요, 선생님!”이라고 외치며 이때까지 중 가장 씩씩하게 나가는 뒷모습이었다.

 

김은혜원장님2.jpg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단풍잎


만약 이 이야기가 소설이었다면 그녀는 완치가 되어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환자는 여전히 항암 치료를 받고 있다. 그래도 다행인 건 항암 치료에 반응이 느릴 뿐 내성은 생기지 않아 암이 서서히 작아지고 있으며, 다른 부위에 새로운 전이가 아직까지는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감사한 건 나날이 울음을 멈추지 못하던 모습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삶에 대한 의지도, 버텨낼 수 있는 체력도 강해졌다는 점이다. 물론 혼자 있는 고요한 밤에는 여전히 소리 죽여 흐느끼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지 버티는 데 함께 걸었던 산책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기를 바란다.


여담으로 어차피 오래 보지도 못할 거라던 벚꽃 잎은 압화된 상태로 단풍잎과 함께 잘 보관되고 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여태껏 내가 해온 이야기 중에 가장 담담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싶다. 


 

아기를 정말 좋아했다던 20대의 여성이 암을 진단받고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던 첫날의 얼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단풍잎을 손에 쥐고서 흐느끼던 둘째 날의 울음소리 그리고 내년에도 벚꽃을 보러 올 거라며 씩씩하게 나가는 지금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그녀의 삶에 있어서는 가장 기적 같은 순간이, 그리고 지금까지보다 더 희망찬 순간이 다가오고 있을 것이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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