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通俗漢醫學原論』의 저자인 趙憲泳은 근현대의 대표적인 한의학자로서 1900년 3월 27일에 경상북도 英陽군 日月면 注谷리 주실마을에서 부친 趙寅錫(1879-1950)의 3남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1988년 5월 23일에 북한에서 세상을 떠났다. 본관은 漢陽, 어려서 본명은 禮慶이며, 자는 應文, 호는 海山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漢陽趙氏의 시조는 고려시대 朝順大夫 僉議中書事를 지낸 趙之壽이었는데 조선 중종14년(1519년) 기묘사화 때 趙光祖가 죽음을 당한 이후 그 후손들이 멸족을 피하기 위하여 경북 英陽으로 내려와 정착하였고, 다시 그 후손인 趙佺이 인조7년(1629년) 주실마을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趙憲泳의 조부인 趙承基(1836-1912)는 을미사변 이후 의병대장으로 활동하여 해방 후 건국훈장을 수여받았으며, 부친인 趙寅錫은 신학문을 교육하기 위한 英進義塾을 설립하기도 하였고 1927년에는 신간회 英陽支會의 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趙憲泳은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고등사범부 영문과에 유학하여 1927년에 졸업하였다.
신간회 동경지회 초대회장 역임
애국 활동 족적
재학 중 민족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1925년 3월 1일 3·1운동 기념회에서 사회를 보고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기도 하였고, 아나키스트 朴烈과 가까운 관계로 그의 수감 중에 도움을 주었으며 재판 때에는 재판장에서 朴烈이 입을 사모관대를 마련해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1926년에는 재일본조선유학생학우회의 회장이 되었고, 1927년에는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 운동에 참가하여 같은 해 5월 7일에 신간회 동경지회 초대회장이 되었다. 이후 귀국하여 1928년에는 신간회 본부 총무이사, 1929년에는 신간회 중앙의 검사위원회 상무, 신간회 경성지회대회의 서기장, 중앙상무집행위원 등 중심적인 역할을 맡아서 하다가 1931년 5월 신간회 해산 이후로는 한의계에 모습을 드러내고 공식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趙憲泳이 한의계에서 공식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34년 10월 15일에 東西醫學硏究會가 振興大會를 열고 任員을 개편하게 되는데 이때 회장에 金明汝, 부회장에 安孝式, 李明善, 간사 金東薰, 金鍊煥, 金永勳, 趙憲泳, 李元模, 평의원 李世林, 都殷珪, 朴麟緖, 李乙雨 외 24인 등이 선임되었다.
東西醫學硏究會는 1910년 한국병합늑약 이후 朝鮮醫師硏鑽會, 朝鮮漢方醫師會, 朝鮮醫生會, 全鮮醫會 등을 계승하여 1921년에 공식 설립된 한의계를 대표하는 조직이었다. 이 총회에서 『東洋醫藥』 잡지의 발간을 결의하였는데 趙憲泳은 바로 직후에 발간되는 『東洋醫藥』의 編輯 겸 發行人을 맡게 된다.
1931년 신간회 해산 이후 1934년까지의 사이에 어떻게 한의학을 접하고 한의계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趙憲泳은 1950년 重刊된 『通俗漢醫學原論』(1934년 초판)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내가 漢醫學에 관한 著書를 한다는 것은 나 自身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三十이 되어서 漢醫學 書를 처음 펴보게 된 것은 그때 우리의 處地가 남달랐고, 大衆醫療가 實로 悲慘한 狀態에 있었으며, 이 大衆醫療에 가장 貢獻이 많고 偉大한 功效가 있는 漢醫學이 날로 衰頹해가는 것이 愛惜하고 憂慮되어 그 復興에 微力을 보태려고 한 것이며, 그 結果가 이 冊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조선시대 전통 있는 가문에서 의학을 습득하여 가족들에게 자가 치료를 했던 경우가 많았으므로 趙憲泳의 경우도 어려서부터 韓醫學을 접했을 가능성이 있다. 북한에서 간행된 『동의학사전』에는 趙憲泳이 25살부터 자습의 방법으로 한의학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고 되어 있으며, 또한 집안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趙憲泳이 유학시절 친해진 김재량이라는 독립운동가 여성이 폐결핵을 앓자 고향집으로 데려와 1년 정도 치료하였는데 이 시기에 여러 한의서를 탐독하면서 한의학을 공부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재량이란 여성은 결국 왜경의 잇단 고문으로 사망하였다고 전한다. 아무튼 趙憲泳이 자신의 본래 전공 분야와 전혀 다른 한의학을 매우 짧은 시기에 전문적인 수준까지 빠르게 흡수해 나간 것은 분명하다.
1932년 朝鮮理療會 초대 회장,
민중의술 계몽 운동
당시 한의학의 대가였던 晴崗 金永勳의 『晴崗醫鑑』 회고록을 보면, 1932년에 청년 趙憲泳이 자신을 찾아왔는데, 이미 한의학에 조예가 깊었고 설명하는 논리가 현대적이어서 단번에 귀가 트일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회고록에 의하면 동경 유학 시절부터 한의학과 침술에 밝아서 이를 통하여 학비를 충당하였다고 하며, 신간회 해산 후 일제의 탄압과 감시에서 벗어나기 위한 호신책으로 한의계에 몸담게 되었다고도 하였다.
그런데 趙憲泳은 1932년 5월 20일에 창립된 朝鮮理療會의 초대 회장을 맡게 되는데, 여기서 ‘理療’라는 것은 鍼灸 및 약물을 포함한 자극을 통한 치료를 통칭하는 것이지만, 그가 중시한 民衆醫術을 대신하는 개념이기도 하였다.
즉, 理療에서 사용되는 자극의 대부분은 침구 및 물리치료이나 약물도 체질에 따라서 치료에 유용한 자극이 될 수도, 유해한 자극이 될 수도 있다고 하여 약물치료도 자극의 일부로 보았는데, 이와 같이 ‘자극’을 중심으로 한의학과 물리요법을 망라하여 폭넓게 해석한 것은 민중들이 손쉽게 의술을 활용하기 위한 일종의 계몽운동의 목적 때문이었다.
이때 朝鮮理療會에 참여한 사람들은 한의계에 속하지 않은 李光洙, 曹晩植, 俞鎭泰 등 신간회와 조선어학회 활동을 한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 즉, 趙憲泳은 이미 신간회가 해산된 직후부터 한의계 밖에서 의료계몽 활동을 주도하였던 것이다.
대한제국 이후 일제강점기 및 해방 직후까지 한의계에서 활동한 주요 인물들은 대체로 金永勳과 같이 官醫 출신이거나 아니면 개항 이후 초기 한의학의 계몽과 교육에 힘썼던 洪鍾哲과 같이 오래 동안 민간에서 임상의사로서 활동해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와 달리 한의학의 배경이 없었던 趙憲泳은 東西醫學硏究會 개편과 『東洋醫藥』의 창간을 계기로 이후 여러 저서를 출간하고, 전국을 순회하며 강습회에서 강연을 하며, 신문 및 잡지에 많은 칼럼을 기고하는 등 한의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쳐나갔다.
趙憲泳이 당시 한의계의 중심에서 활동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바로 1934년에 벌어진 한의학 부흥 논쟁에서 찾을 수 있다. 일제는 일제강점기 초기의 탄압 정치가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한계에 다다른 것을 깨닫고 유화 정책으로 전환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 한의학에 대한 정책에도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즉, 한의학의 임상적 가치를 단지 침구치료만으로 제한하여 허용하는 정책을 바꾸어, 성분 중심의 약리학적인 해석을 바탕으로 한 한약의 치료 효과를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그 사용을 장려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정책 변화의 이유를 학계에서는 당시 만주사변과 태평양전쟁을 야기하게 될 확전의 준비와 악화되는 경제 여건, 의료체계의 미비 등으로 인하여 의료에 대한 수요가 증가한 것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의 변화가 실제 한의학 발전의 중요한 토대가 되는 고등교육기관의 설립이나 한의사 면허의 인정 등으로 이어지지 않았으므로 실제적인 변화는 미미하였다. 단, 이러한 정책의 변화로 인하여 한의학이 다시 부흥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었다.
1934년 2월 16일자부터 朝鮮日報에 張基茂가 漢方醫學의 復興策을 연재하였는데, 張基茂는 관립 漢城醫學講習所의 3회 졸업생으로 1908년 최초의 의사단체인 韓國醫事硏究會의 창립회원이며 1915년 漢城醫師會 창립의 발기인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이 기고문에 대하여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개업의로 있던 鄭槿陽이 1934년 3월 9일자부터 조선일보에 반론을 발표하였고, 이어서 李乙浩, 趙憲泳 등이 논쟁에 가세하였다. 1934년 한 해에 걸쳐 朝鮮日報 지면상의 논쟁을 촉발시킨 사람은 張基茂였으나 이후 논쟁을 주도한 인물은 바로 趙憲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