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방촬요』의 국역출판에 기울인 고인의 의지와 필생의 뜻이 다시 부각되기를 기원하면서 조손 3대에 걸쳐 한의서 출판에 기울였던 한의서 출판의 공적도 제대로 조명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태풍소식과 함께 뜻하지 않은 비보를 뒤늦게 전해 들었다. 행림서원 이갑섭 선생의 부음(訃音)이다. 근현대 한의학 발전 100년의 역사에 있어서 빠트릴 수 없는 공적으로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겠지만, 필자는 그 가운데 행림서원이 남긴 커다란 족적을 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행림서원은 고 이갑섭 사장(사진)의 조부이신 한의학자 행파(杏坡) 이태호(李泰浩) 선생이 1923년 서울 안국동에 처음 문을 연 이후, 한의서 전문출판으로 어언 1세기 가까운 세월을 이어온 보기 드문 사례다.
행림서원, 잘 알려지지 않은 한의 고의서들 발굴, 발행
조선시대 의과제도 폐지 이후 이 땅에는 전통의학을 교육할 수 있는 마땅한 교육기관이 부재하였고 제도적인 측면에서 지원을 받을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한의들은 일본제국주의 통치 아래 양의들을 주축으로 한 근대의료제도의 사각지대인 무의촌 지역에 의생(醫生)이란 이름으로 지위가 격하돼 활동지역이 한정되어 배치됐다. 그들은 의권(醫權) 회복과 스스로의 교육을 위해 의사단체를 설립하고 자체 양성교육을 시행하면서 전통 한의학의 맥을 잇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이 시기 행림서원에서 발행한 한의학고전들은 모두 우리 민족의 역사에 길이 빛날 불후의 명작들이었으며, 자칫 제국주의 통치를 거치면서 인멸되거나 사장될 우려에 놓인 민족전통 의학서가 대부분이었다.
1930~40년대 행림서원 도서출판 목록을 보면 당시 ‘조선비장 고판의서총간(朝鮮秘藏古版醫書叢刊)’ 시리즈를 기획하고 세종대에 나온 거대방서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를 비롯하여 허임의 『침구경험방』, 조정준의 『급유방』, 그리고 『사암침구요결』 등 상당수 잘 알려지지 않은 고의서들을 발굴하여 발행하는 사업을 벌였음을 알 수 있다.
현 시점에서 돌이켜 보아도 매우 광범위하고 위험부담이 있어 선뜻 나서기 어려운 대형사업인데다 당시 학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문헌들을 발굴하여 보급한 뜻깊은 일이었다.
행림서원의 한의서 발굴 간행사업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설립하고 신문관을 설립하여 민족 고전을 소개하고 보급하였던 최남선과 수원도립병원장을 지낸 일인 의사학자 미키 사카에(三木榮) 등 여러 사람의 협조와 한의계 인사들의 동참 하에 이뤄진 것이다.
그러나 한의서 출판은 해방 직전 이태호 선생이 졸중풍으로 쓰러지고 광복 이후 출판계 열악한 상황으로 고비를 맞은 것으로 보인다. 고인이 생전에 남긴 구술에 의하면 행파 선생은 온양온천에서 요양하면서 혼자 익힌 사암침법을 이용하여 자가 치료를 하며 한의학에 대한 신념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며 재활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곧이어 닥친 한국전쟁 가운데 부산으로의 피난길 위에서도 행림서원의 사업은 지속되었으며, 주로 중국 상해와의 당판(唐板) 의학서적 무역을 통해 당시 실의에 빠진 한의계에 신지식을 불어넣어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시기에도 수많은 한의서를 발간하였던 행림서원은 안국동, 돈암동, 경운동 등지를 전전하며 서점을 지속하였고 2대 이성모 사장 대에는 종로구 운니동으로 확장 이전하면서 종로5가에 분점을 개점하는 등 사세를 확장하였다.
그러나 2대 사장이 일찍 세상을 뜨자 모친인 송영산씨를 거쳐 고 이갑섭 사장에게 운영권이 이어졌다. 젊은 나이에 사장에 취임한 고인은 패기로 사업을 확장하고 문학소설을 대량 발행하고 학생잡지를 잇달아 창간하는 등 한의학과는 다른 방향에서 사세를 확장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불어 닥친 국가적인 경제위기로 도산위기에 빠졌으며, 어느 날 우연히 마주친 홍원식 교수로부터 “자네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가, 어서 조부이신 행파 선생이 닦아놓은 자리로 돌아가게, 그곳이 자네가 지킬 자리라네!”라는 일침(一鍼)을 얻어듣고 다시 한의서 출판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필자는 학창시절부터 간혹 종로통에 있었던 행림서점에 들린 적이 있지만 고인과 직접 수인사를 나눈 것은 세월이 한참 흐른 뒤의 일이다. 우연히 보게 된 일제시대 행림서원 도서목록을 보고 역사에서 사라진 『삼방촬요』를 수소문하기 위해서였다.
삼방촬요(三方撮要), 한의서 출판 일생에 기념비로 남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판형을 모두 날려버린 끝이라 다시 찾기를 기대하긴 어려웠으니 혹시나 하는 심정에 가까웠다. 하지만 다행이도 몇 주 뒤에 집안에 보관된 고서더미를 찾아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천만다행 인쇄를 앞두고 총독부 검열본으로 제출했던 원고용 사본 1부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천우신조였다.
글을 쓰고 이 일을 도모했지만 필자는 마침 한참 동의보감 400주년 기념사업을 전개하고 있을 때였고 이 일을 진행시킬 겨를이 없었다. 돌아가신 조부의 뜻과 3대를 이어온 행림서원 한의서출판의 자존심을 생각해서라도 반드시 책을 내고 싶다는 소원이었다.
하지만 당시 행림서원의 사세로 새로운 거질의 책을 출시하기에는 출판계 현황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차일피일 세월이 흘러갔고 대망의 2013년을 정점으로 동의보감 사업이 대미를 장식하고 나자 고인으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고 유언처럼 이제 나이도 들고 또 앞일을 기약하기 어려우니 서둘러 일을 추진해야겠다는 뜻을 밝혔다. 나에게는 구두 언약이었지만 해묵은 빚이자 무거운 역사의 책무로 다가왔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2년여에 걸친 원문 입력과 탈초, 국문 번역 과정을 거쳐 국역 삼방촬요는 빛을 보게 되었다. 또 이듬해엔 발굴과정과 함께 삼방촬요의 저술과 전본, 전존과정 등을 조사하여 조명한 논고를 발표하였고 회덕향교에서 대덕문화원이 주최한 인문학 강좌에 이 책을 소개하였다.
제주민속박물관서 ‘동의보감특별전’ 열리고 있어
효종임금의 국권수복과 북벌 의지, 그리고 우암 송시열의 대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희대의 한의서, 이는 단순히 한권의 의학전문서가 아니라 조선 중기 한민족의 의연한 결기와 민족전승의 의약경험이 아우러진 불후의 명작이라 말하고 싶다. 이것이 고인을 떠나보내는 필자의 소략한 소회이자 애절한 만가(輓歌)다.
아직도 세상은 『삼방촬요』에 깃들인 한의학의 전통과 민족정기에 눈길을 주지 않고 있다. 『삼방촬요』의 국역출판에 기울인 고인의 의지와 필생의 뜻이 다시 부각되기를 기원하면서 조손 3대에 걸쳐 한의서 출판에 기울였던 한의서 출판의 공적도 제대로 조명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8월 3일부터 제주민속박물관에서 본원과 제주한의약연구원이 공동으로 ‘동의보감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제주도는 폐위된 광해임금과 예송논쟁 끝에 실각한 송시열이 유배되었던 곳이다. 동의보감과 삼방촬요는 모두 한의학명저일 뿐만 아니라 국난극복의 상징이자 의약구국(醫藥救國)의 실증적인 사례라는 점에서 민족정신이 집약된 기념비적 전적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