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준상 상지대학교 한의과대학 교수
우리나라 한의과대학 교과서를 보면 대부분이 70~80년대 중의학 내용을 그대로, 혹은 변역해 들어온 것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여기서는 변증론치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때 한방내과학 책을 보면 어떤 책은 동의보감 분류, 어떤 책은 의학입문 분류, 어떤 책은 중의변증 분류로 나열돼 있었고, 심한 경우 이 3가지가 모두 게재된 경우도 있었다.
당시 공부를 하면서 단순하게 ‘국내 교수진이 정해주시면 안 되는가’, ‘가령 복통이라면 허복통, 실복통 등 3~4개를 예시하고, 각각의 차이점(감별진단)을 알려주면 되지 않을까’하고 생각했다.
이후 교수가 되고, 학생들에게 정형화된 변증을 가르쳐야 할 때 내가 겪었던 과정을 그대로 학생들이 겪고 있다는 생각에 아찔했다.
그래도 사상의학은 일단 체질과 병증을 나눠서 체질별 4대 병증 카테고리에 적용하면 처방이 나오는 방식이라 비교적 수월한 편이다.
중국은 청대(淸代)까지도 ‘변증론치’는 없었는데 ‘의학심오(醫學心悟)’에서도 팔강변증(八綱辨證)이 나올 뿐이다.
그러다가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고, 근대에 들어 ‘변증론치(辨證論治)’가 만들어졌다. 이는 어떻게 보면 작위적·인위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를 무용한 것으로 치부하고 폐기할 수도 없다. 변증에는 허, 실, 한, 열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해외 사례에서에서 본 변증 수업
학생들이 실습을 하고 환자를 보면서 초기 변증을 세운다고 가정할 때 그것을 어떻게 확진해 줄 것인가?
최근 제74회 일본동양의학 학술총회에 참가해 임상실습 관련 강좌를 수강했다. 주로 한의학교육에 초점을 맞춰 강의를 들었는데 보통 일본은 82개 의과대학에서 코어 프로그램으로 한방의학을 조금 가르치고 있기에 수준이 낮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중 교육이 활성화된 곳을 예시로 들어 소개했는데 그 내용은 매우 놀라웠다.
설명에 따르면 학생 4~5명으로 팀을 나눠 팀별로 케이스를 주고, 이에 대한 공부와 진단에 이어 처방을 찾아 발표하게 하거나 병원에 온 환자에게 진찰을 시키고, 다시 지도 의사가 진찰해 잘 수행됐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과정이 있었다.
예전 미국 LA 동국대학교에서는 학생 의사가 침을 놓을 경우 침 시술료가 비교적 저렴하고, 교수가 침을 놓을 경우엔 비싼 편이라고 했으며, 학생의사는 반드시 환자를 보고 그 기록을 남기고, 슈퍼바이저(주로 교수)에게 서명을 받아야했다.
“한의대 변증 실습의 표준화 필요”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임상실습을 할 것인가?
현재 변증으로 표준화된 것은 팔강에 대한 임상진료지침(책임개발자: 지규용 교수)이 있어서 한의약진흥원 국가임상정보포털에서 다운로드해서 볼 수 있다.
또 한방병리학 교과서가 변증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으며, 2018년 이후 국제질병분류(ICD-11)를 따라 수록한 교재로는 ‘한의진단학·진단편’이 있다.
최근 중의 명의로 알려진 이들의 책에서 고혈압 환자를 진찰하고, 허증 2개, 실증 2개 정도로 변증을 진행해 그중 적당한 처방을 사용하는 내용을 봤다.
등철도(鄧鐵濤) 선생의 저작에 나오는 치험례로 예를 들면 고혈압에 간양상항, 간신음허, 음양양허, 기허담탁으로 변증했다. 정확히는 허증 2개, 실증 2개가 아닌 허증 2개, 허실협잡이 2개다.
한때 원주지역 코호트에서 고혈압 환자를 대상으로, 한의변증 관련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변증 유형 차이 여부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 당시 설문지 구성에서 모든 변증을 다룰 수 없어 오장육부의 변증에 있어 결국 고혈압의 중의변증과 한방진단학을 참고해서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2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설진, 맥진, 복진 등 한의학의 객관적 진단법을 통한 진찰로 문진 항목과 더불어 허실, 한열 등을 변증하고, 더 나아가서 적합한 병증과 맞추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임상증례를 중심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는 환자의 증례를 확인해야 하고, 필요시 통계적 기법을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요인분석(Factor Analysis)’을 통해 변증 유형대로 뭉쳐지는지를 파악해 봐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도 경도, 위도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가상의 선을 만들어 놓고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다.
본인은 변증도 그와 같다고 본다. 환자의 몸에 경도와 위도를 올려놓듯이 장부변증을 한다면 경도가 오장육부가 될 것이고, 위도가 한열허실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실제 임상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게 하고 표준화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좌측부터 유준상 교수, 장인수 우석대학교 한의과대학 교수
“교과서 외에 임상 현장의 증례 통한 변증 이뤄져야”
침 처방을 위한 진단에도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 ‘일본침구의 진단학’이라는 책에서는 사진(四診)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흥미로운 것은 변증을 하나로 하지 않고, 가령 측두통, 구고(口苦), 인건(咽乾) 등의 증상이 있을 때 장부변증으로 간담병증, 육경병증으로는 소양경병증 등으로 자유스럽게 적어 놓았던 것을 봤다.
동생(중의사)의 말에 의하면 중국의 경우에는 지나치게 장부변증에 집착한 나머지 마치 구구단을 풀듯 변증해 처방까지 나온다고 했다.
우리의 경우 탕액을 사용하려면 변증을 해야 할 것이고, 침 처방을 사용하려면 이에 맞는 경락변증을 해야 할 것이다.
다만 이를 그냥 증상의 문진뿐 아니라 맥진, 설진, 복진의 정보를 넣어 진행하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만성인 환자의 경우에는 허실협잡도 있고, 한열협잡도 있기에 쉽지 않은 경우도 있다.
예컨대 한 경피증 환자의 증례에서 △무기력, 전신 관절통, 소화불량 △대변: 1회/일 △소변: 1회/3시간 △수면 5시간 중 야간뇨 4회 △설담홍, 태소 △맥: 우측맥 강하고, 부하다, 우측맥 중 촌이 약하다, 좌측맥 침완하다 △복진: 피부 건조하다 △복력 2/5 △추위에 민감해 항상 적외선을 켜 놓는다고 했을 때 일반적으로 ‘한상(寒象)’을 보인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때는 음허로 보는 게 좋은가? 양허로 보는 게 좋은가? 양허로 보는 게 적당하다고 본다.
이와 같이 증례를 보면서 연습하면 교과서만 보며 음허·양허의 진단기준에 ‘맞다’, ‘안 맞다’하는 것보다 선명하게 들어오게 될 것이다.
다만 이러한 만성병 환자는 허실, 한열이 섞이는 경우도 있기에 주의가 필요하다.
‘어혈’에 대해서도 어떤 한의사는 넘어져서 생긴 ‘고인 피’라고 하지만 이것이 중의학에서는 과도하게 어혈이라는 개념으로 확대된 것이라고도 한다.
물론 처음에는 사혈(死血) 개념으로 타박상으로 인한 것이 1차적으로 포함됐겠지만 그 후에는 의미가 더 확장돼 다양한 피부질환, 정신질환 등에 활용하기도 하는 것이 어혈변증이다.
청나라 의학자인 왕청임도 어혈을 통한 여러 질환을 치료하는데 한몫한 셈이다. 어떻게 보면 선구적인 발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예전 임상현장의 증례를 기존 중의변증 항목에 무리하게 끼워 넣었던 것에 비해 주문봉(주문봉 진단학강의) 교수부터 병의 위치와 병의 성질을 ‘증소(證素)’라고 부르며, 증소 간의 자유로운 결합을 인정하고, 이들을 진단 결론으로 삼은 방식이 있다는 점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앞으로 현대 한의학에 있어 우리들은 어떻게 한의학을 배우고, 전승할 것인가에 대해 열띤 토론과 생각을 공유하는 장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