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일 교수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1946년 4월17일자 조선일보에는 ‘漢醫學再檢討’라는 제목의 다음과 같은 사설을 실어서 해방 후 1년이 지난 미군정 시기에 경종을 울렸다.
“1) 朝鮮漢醫士會는 궐기하였다. 재남조선 2천여 명 漢方醫의 총의로써 (1) 漢醫士로 명칭 개정 (2) 限地 限年制 철폐 (3) 공인단체 승인 (4) 국립전문대학 설립 (5) 公營病院에 漢方科 倂置 (6) 약초재배 장려 (7) 漢醫士 국가시험제 등 7項目을 當局에 건의하고 그 실현을 기하게 되었다 한다.
건의내용을 一瞥컨대 그 어느 것이나 적절치 않은 것이 없고 오히려 晩時之嘆이 없지 않다. 듣건대 同會에서는 건의에 止치 않고 보건에 遺漏가 없게 하기 위하여 수종의 사업을 계획 중이라 하니 적극적 활동을 비는 동시 軍政當局도 軍政實施 이후 특히 保健厚生方面에 힘쓴 바 많은 터이니 4천여 년의 장구한 전통과 역사를 가지고 공헌이 많았던 漢醫學에도 지도와 시설을 不惜키를 바라는 터이다.
2) 생각건대 西洋醫學이 수입되기 반세기 전까지는 漢方醫뿐이었고 宣敎師側에서 朝鮮사람에게 주로 외과적 시술로 대중의 호평을 전하기도 하였으니 오랜 전통과 고집에서 洋醫에 대한 신뢰는 그리 크다 하기 어려운 것이 있었다. 특히 내과 부문에 있어서는 漢藥治療가 효율이 많기 때문에 漢方은 압박과 천대를 받으면서도 지금도 엄연한 존재와 번창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倭賊治下 朝鮮에 洋醫가 많이 퍼지었지만 그 목적이 朝鮮사람의 보건을 위한다기보다 저희들의 치료를 위한 데서 나온 것인 만큼 저희들이 싫어하는 漢醫를 우대할 리 만무하고 漢醫學을 비과학적이라 하여 맹목적으로 탄압을 내려왔던 것이다.
3) 그러나 전쟁 말기에 至하여 西洋藥劑의 수입이 두절되자 새삼스럽게 漢方醫學에 대한 인식이 커져서 약초 재배, 大學에 漢方課 설치 등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방방곡곡에 퍼진 漢醫로 朝鮮사람의 의료기관으로서 그 기능을 일층 발휘했었고 都市 역시 약초 부족의 歎은 있었을 망정 洋醫에 대한 의존도를 능가하는 실정이었다. 해방과 아울러 漢方醫도 오랜 屈辱과 忍從에서 벗어나 정당한 요구와 주장을 하게 된 것을 기뻐하는 바이어니와 이 기회에 있어 일언코자 하는 것은 漢方醫 자신의 자각을 촉하는 동시에 그 연구에 일층 박차를 가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醫는 仁이라는 말을 떠나서라도 좀 더 대중을 위한 醫療報國에 헌신함이 있어야 한다. ‘진단은 洋醫 치료는 漢藥’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이것은 진단술의 미숙과 불철저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도 新生面을 개척하여 단순한 開業醫의 입장을 떠나서 不絶한 연마와 성의있는 시술로 일층 대중을 파악함이 있어야 하겠다는 점을 강조해 둔다.”
일찍이 1946년 6월22일자 『동아일보』에도 ‘한방의학육성, 한의약건설동맹에서 군정에 건의’에서 2000여명의 한의사들의 총의를 모아서 김영훈 외 5인이 대표가 되어 건의서를 만들어 제출한 바가 있다고 전하고 있다. 이것은 한의사들이 한의약건설동맹이라는 단체를 구성하여 그 단체 명의로 미군정청에 건의서를 제출한 것이다.
위에서 주장한 7가지 조건의 건의는 당시 한의사들이 시급하게 여겼던 사항들이었다. ‘醫生名稱 改正’은 일제에 의해 격하된 한의사의 명칭인 ‘醫生’을 ‘의사’ 혹은 ‘한의사’로 회복할 것을 주장함이다. ‘漢方醫의 限地限年制 廢止’도 일제시대 시행된 한지한의사제도를 전통의학에 대한 규제로 보기 때문이다. ‘한의사단체를 公認으로 할 것’도 일제시대 전시대를 거쳐 한의계의 숙원이었다. ‘한의학교육기관 설치’도 일제시대에 한번도 실현되지 못했던 숙원이었다. ‘공영의료기관의 시설’은 한의학을 공공의료의 위치로 확고하게 올리기 위한 방안이며, ‘약초재배 장려’는 국산한약재의 수급을 체계적으로 이루어내자는 것이었다. ‘한의사 시험제도’는 한의사 수급을 위한 시험제도의 도입에 대한 의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