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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4일 (일)

신미숙 여의도 책방-55

신미숙 여의도 책방-55

퍼펙트 데이즈의 비결

신미숙02.jpg


신미숙

국회사무처 부속한의원 원장

(前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


 

[편집자주] 

『신미숙의 여의도 책방』은 각 회마다 1개의 키워드에 5권의 도서를 추천하는 형식으로 이어갑니다 *


지역에서 올라와 대치동 근처 호텔에 머물며 고3과 재수생 두 딸들 케어를 마무리하고 다시 내려간다는 친구의 연락을 받고보니 여름방학이 막바지인 모양이다. 휴가철도 끝나가는지 줄서서 들어간다던 유명 전시회도 막상 가보니 사람들 발길이 이미 뜸하다. 짧은 소나기가 멈춘 후 땡볕이 주춤해진 틈을 타 강변서재(국회 내 북카페) 쪽으로 점심 산책을 나서는 길, 유독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그러고보니, 이번주 월요일부터 코로나 뉴스가 쏟아진다(『개학 동시에 줄줄이 코로나 확진…고3들 “칸막이 쳐달라” 비상』 중앙일보, 『코로나 하루 확진자 15만명 때 수준…고위험군 주의』 연합뉴스TV). 


작년 5월11일, 대통령 주재 중대본 회의에서는 사실상 코로나19 종식을 선언했고 이는 무려 3년4개월만의 일상 회복이었다. 비대면 중단과 마스크 해제, 그 자유로부터 딱 1년3개월만에 다시 코로나 재확산의 분위기를 접하니 답답한 마음에 식을 줄 모르는 폭염까지 더해져 뜨거워진 한숨이 절로 나온다. 행여 다시 마스크 의무착용과 사회적 거리두기를 권고받는다해도 우리 모두는 또 ‘하라면 해야지 뭐.. 별 수 있나?’라며 눈치를 챙길 것이다. “일단 이번 주부터는 우리부터 마스크 씁시다.” 진료실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부터 시작해본다. 

  

또 다시 고개 드는 ‘코로나19’


코로나 발병률에 따른 단계별 사회적 거리두기는 강화에서 완화로의 수순을 밟다가 오늘같은 거의 완벽한 일상으로의 복귀에 이르렀다. 극장에서도 음료와 팝콘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환호했었고, KTX 안에서도 간단한 식사가 가능하다는 안내문 덕분에 여행길의 낭만도 느낄 수 있었다. 별 이벤트 없는 평범한 날들의 반복은 자주 지겹고 또한 지루하지만 그 평화가 깨어졌을 때 그리고 부분적으로 제한받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엄청난 불편함을 호소하고 동시에 별탈없는 일상의 잔잔한 지속을 간절히 희망하게 되는 법이다. 

지난 7월 초 개봉한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그 포스터만으로도 영화에 대한 기대감이 솟구쳤다. 일본의 안성기+송강호라 불리우는 야쿠쇼 코지가 주연이기 때문이다. 한 칼럼니스트는 “늙은 남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제목으로 이 영화의 감상기를 투고했고, 조선일보의 한 문화부 기자는 “야쿠쇼 코지의 얼굴로 쓴 인생이라는 하이쿠”라는 멋진 한 줄로 이 영화를 추천했다. 


아침마다 창가 앞 올망졸망한 화초에 열심히 물을 준 후 작업복을 갖춰 입고 집을 나선다. 문앞에서 하늘을 응시하는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드리워져있다. 자판기 캔커피를 든 채 트럭에 시동을 걸면서는 반드시 카세트 테이프 하나를 골라 모두의 귀에 익숙한 올드팝을 듣는다. 도쿄 공중화장실 청소부인 그는 작은 손거울을 이용해 보이지 않는 구석진 곳까지 반짝반짝 광을 낼 정도로 화장실 청소에 진심이다. 가까운 신사의 돌의자에 앉아 샌드위치와 우유 하나로 점심을 때우는 사이에도 나뭇잎 사이로 흘러나오는 햇살을 오래된 카메라로 촬영도 한다. 업무가 끝나면 걸어서든 자전거로든 지하상가 입구의 간이 선술집에 들러 늘 마시던 보리소주 한 잔을 들이키고 가끔은 단골 이자카야에 가서 마담이 불러주는 노래도 듣는다. 


주말에는 동네 목욕탕과 코인 세탁소, 촬영한 필름을 인화하기 위해 사진관에도 들른다. 그저그런 비슷한 사진이지만 남길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하고 새 필름을 넣은 카메라는 다음 촬영을 위해 늘 그의 주머니 어디에든 담겨져 있다. 하루의 끝, 잠들기 직전이면서도 소박한 조명 아래에서 문고판 책 몇 페이지 읽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이 밝으면, 오늘같은 이 일상을 또 다시 반복한다. 


평범한 일상의 유지…우리 모두가 바라는 소박한 목표


빔 밴더스 감독의 『퍼펙트 데이즈』는 2017년 12월에 개봉한 짐 자무쉬 감독의 『패터슨(Paterson)』과 무척 닮아있다. 뉴저지 주의 소도시 패터슨에 사는 버스 운전사 패터슨의 잔잔한 일상이 영화의 전부이다. 주인공 패터슨은 버스 기사로 일하면서 틈틈이 자신의 비밀노트에 시를 쓴다. 아내는 남편을 존중하고 그의 시를 사랑한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뭐하나 특별할 것 없는 그들의 일상은 평화롭게 흘러간다. 버스가 고장 난다거나 펍에서의 난동 해프닝, 강아지 마빈이 패터슨의 시 노트를 찢어 놓는 일 등 약간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도 찾아오지만 우연히 만난 일본 시인이 “때론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라는 말과 함께 빈 노트를 선물하는 행운도 맞이한다. 월요일 아침, 패터슨은 평상시와 같은 평온한 하루를 다시 맞이한다. 특별하지 않지만 평범한 일상이 유지되는 삶. 어쩌면 우리 모두가 바라는 소박한 목표일 지도 모른다. 


화장실 청소부인 히라야마는 생업 이외에 화초가꾸기, 음악듣기, 독서하기, 사진찍기 등에서 즐거움을 찾는 일도 열심히 수행한다. 버스기사 패터슨은 버스운전 이외에 반드시 틈을 내어 시를 쓴다. 예술적인 행위를 보태지 않는 생존만을 위한 삶을 살 때, 그 삶의 주인공은 심신표리 모든 부위가 메말라간다. 도를 닦는 심정으로 일상을 유지시키려는 노력은 생활을 넘어서 의식이 된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가장 마지막 장면에는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어 하나가 제시된다. 그 단어는 일본어 코모레비(こもれび: 木漏れ日·木洩れ日)로 우리말로 번역하면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다. 일을 나서는 히라야마의 얼굴은 아침마다 말갛게 빛이 난다. 그 엷은 미소에는 평범한 하루하루가 유지될 수 있음에 대한 감사함이 묻어 있다. 빽빽한 일상을 살아내면서 우리는 짧은 틈을 만들어서라도 기어이 각자의 예술을 추구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코모레비는 희망의 은유적 표현일 수도 있다. 출근길이 즐거우려면 건강한 루틴을 발굴하고 습관화하는 지독한 훈련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루틴의 힘』(조슬린 K. 글라이 엮음. 도서출판 부키, 2020년 1월)


9788960517721.jpg다양한 분야에서 구루로 추앙받는 유명 인사들의 솔루션만 요약해놓은 소책자 형식으로 『루틴의 힘 2』(2021년 1월)까지 연이어 발간되었고 목차만 훑어봐도 키워드 몇 개는 자연스럽게 메모하게 된다. 통찰력이란 익숙한 일은 계속 뿌리치고, 현실에 안주하는 대신 한걸음 앞서 나가는 과정을 통해 준비되는 것이다(스콧 맥도웰), 돈 벌기와 일은 일종의 예술이기 때문에 결국 좋은 비즈니스는 최고의 예술이다(앤디 워홀), 정말 하고 싶은 프로젝트를 완수하고 싶다면 우선 그 일의 난이도부터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스테판 사그마이스터), 성공하고 싶다면 소통해야 한다. 그리고 좀 무감각해지고 뻔뻔해질 필요도 있다(마크 맥기니스), 좋아하는 일이라면 자주 실천하라. 자주 하면 시작이 수월해진다(그레첸 루빈). 


『마음홈트』(마리안 로하스 에스타페, 레드스톤, 2021년 7월)


스페인의 우울증 전문 정신과 의사의 책으로 30여 가지의 임상사례를 통해 나만의 행복 루틴을 만드는 의학적 방법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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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The Journal of Pain> 5월호 기사에 상담시 의사 태도의 중요성에 관한 내용이 실렸다. 의사의 태도가 고통을 덜어준다. 환자가 의사를 신뢰하면 통증 감각이 줄어든다. 신뢰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 친절은 건강한 뇌의 기초이다. 이는 신경심리학 박사인 리챠드 데이비슨의 좌우명이다. 

- 병에 걸리기 훨씬 전에 몸은 불편함과 약함 또는 통증의 형태로 우리에게 경고 신호를 보낸다. 불안은 ‘마음과 영혼의 열’이다. 우리의 환경이 적대적이거나 우리 몸이 감당할 수 없는 과도한 활동, 감정 또는 상황에 노출되어 있다는 경고이다. 

- 건전하고 적절한 태도는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자연 치료제이다. 태도는 삶을 대하는 방법에 관한 결정이다. 태도는 기분을 움직이는 강력한 활성제이다. 


『시간을 찾아드립니다』(애슐리 윌런스, 세계사,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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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심리학을 전공한 행동과학자 애슐리 윌런스의 책으로 루틴을 벗어나 각자의 속도를 찾아내어 타임푸어를 벗어나라고 조언한다. 

- 인생의 목표 달성과 꼭 해보고 싶은 일들은 ‘내년’으로 미룬다. 매년 미루기를 반복하다 시간을 다 써버리고, 결국 사용하지 못한 비행기표로 관을 장식하기에 이른다. 

- 시간 빈곤은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만성질환이다. 시간을 중시한다는 것은 친사회적인 행동이다. 친사회적이라는 용어는 남들을 이롭게 하는 행동을 설명할 때 사용된다. 더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비결은 간단하다. 돈보다 시간을 우선시하고, 결정은 한 번에 하나씩 하라. 

- 죽을 뻔한 적이 있는 사람들은 시간이 천천히 간다고 느낀다. 그들은 매일의 경험에 더 많이 감사했고, 직업적 성공보다 인간관계와 관련된 목표를 먼저 생각했다.

- 미래의 시간은 약속과 위험으로 채워져 있다. 모든 희생을 감내하며 직업적 성공을 추구하는 것은 할 일은 너무 많은데 그 일들을 처리할 시간은 부족하다고 느끼는 원인이지 그 현상에 대한 해법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살다 보면 부작용이 따른다. 


『뛰는 사람』(베른트 하인리히, 도서출판 윌북, 2022년 7월)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 생물학자 베른트 하인리히의 80년에 걸친 러닝 일지로 연구자로서의 삶과 그 삶을 지탱하기 위해 러닝을 병행한 초인적인 실천력에 찬탄을 멈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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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갑이라는 나이가 생각보다 너무 빨리 찾아와 충격을 받았다. 

- 우리는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 과거의 타오르는 열정을 식히는 것 자체가 노화의 일반적인 과정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 여든이 되어도 달릴 수는 있었지만 더 이상의 경주는 무리였다. 적어도 40세와는 말이다. 

- 그동안 나는 마법같은 순간들을 달려왔다. 이제는 가까이 갈 수 없기에 더없이 훌륭해 보이는 시간들이다. 과거는 지나갔다. 그러나 언제나 매일의 새로운 기회가 과거 위에 세워진다. 

- 이제 여든 번째 생일을 치른 나는 더는 과거처럼 달리기 선수도 과학자도 아니다. 허나 나는 내가 바라던 꿈의 대부분을 이루었다. 인생의 마지막 단락을 쓰며 이제 내가 달려야 할 새로운 경주는 더 깊이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임을 다시금 느낀다. 


『나무』( 고다 아야, 달팽이출판,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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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퍼펙트 데이즈』에서 주인공 히라야마가 잠들기 전 집어들었던 단행본 중 한 권이 바로 이 책이다. 고다 아야 말년에 10년간 나무를 찾아다니며 기록한 15편의 에세이 모음집이다. 


원시용과 근시용 두 종류의 안경을 바꿔 쓰는 번거로움, 발밑의 불안함, 이상해진 귀, 메모 능력 저하라는 생각이 들자 결론은 빠른 노화라는 한마디가 된다. 차곡차곡 쌓은 것은 세월과 나이 뿐인데 이것은 내 의지로 쌓아온 것이 아니라는 쓸쓸함이 있다. 

몇 년 동안 생각만 하고 이루지 못한 일이 갑자기 일사천리로 끝날 때가 있다.  


나무에게는 역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이 있는 것일까? 나무란 겉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존재이며, 동시에 나무는 한번 상처를 입으면 평생 그 상처의 고통을 몸 속에 품은 채 살아간다. 

- 나무는 중심부가 아니라 항상 바깥쪽에서 바깥쪽으로 새로운 나이테를 만들어가며 성장한다. 그래서 어떠한 상처도 그 상처 때문에 생긴 변형도 세월과 함께 안쪽 깊숙이 감싸 안는다. 감싸 안는다란 따뜻한 정을 내포하는 표현이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감상에서 시작된 이 글의 마지막 단락을 적어내려가는 지금 때마침 CBS 라디오에서 인터뷰 중이신 이재갑 교수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전공의도 없는 각 대학병원 응급실에서는 밤새 코로나 환자를 받고 있으며 개학을 앞두고 코로나에 대한 준비가 전무한 상황에 확진이 되어도 병가가 불가능한 직장인들은 검사 자체를 건너뛰고 있는 이 총체적 난국에 엠폭스까지 국내 유입이 예고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정 갈등 때문에 후배들을 붙잡을 힘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는 절망적인 내용이었다.  


신종 감염병 초기의 그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한의계는 또 얼마나 속 태웠던가? 질병청의 관리체계에서 배제됨을 서운해 하면서도 자체 의료봉사로 국민들에게 다가가려 했었던 그 처절함은? 무기력함을 강요받던 그 긴 시간, 그럼에도 끈질기게 그 날들을 버텨냈기에 지금은 그 때 만큼의 두려움은 아닌 상황에서 코로나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환자분들을 지속적으로 만나고 있는 것이다. 삶은 늘 느닷없는 일들의 연속이고 나 혼자만의 잘못에 의해서가 아니라 많은 외부 환경에 의해서 갑자기 중단되고 침해받고 상처입는다. 루틴이니 낭만이니 예술이니 의식이니 숭고함이니 나불댈 수 있으려면 우리 모두의 평온한 일상 유지라는 기본값이 필요하다. 입추와 말복도 다 지나갔지만 “서울, 118년 관측 사상 최장 열대야”라는 8월 중순의 뉴스 제목처럼 올 여름은 유난히 징그러울 정도로 길고 더웠다. 


 

2024년 6월24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서울대 환경대학원 정수종 교수의 『올 여름이 제일 시원할 것입니다』라는 칼럼을 한줄한줄 다시 읽으며 올해가 오늘이 우리가 살아서 겪는 가장 시원한 여름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신종 감염병의 출연이 끝없이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이제는 우리의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퍼펙트 데이즈가 파이널 데이즈가 되는 그 날까지 코모레비 찾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지금은 지금이고 다음은 다음이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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