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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4일 (일)

의상과 원효, 그리고 양예수와 허준

의상과 원효, 그리고 양예수와 허준

한국전통의학史연구소장 金 洪 均





허준을 생각할 때는 양예수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한국 불교사를 얘기하면서 신라의 고승 원효(元曉)를 빼놓을 수 없고, 원효를 말하자면 의상(義湘)을 논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들이 우리 불교사의 두 큰 산이기 때문인 것처럼, 조선 중기의 우리 의학사에 있어서도 양예수와 허준은 그러하기 때문이다. 아니, 이들의 행적은 오히려 너무나 흡사하여 흥미롭기까지 하다.

양예수는 의상과 비견할 만하고 허준은 원효에 견줄 만큼의 이러한 유사성은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를 이뤄냈다는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시선을 끌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이뤄지는 일들이 비슷한 것을 보면 한편으론 역사의 반복을 느끼게도 한다.

통일신라 시기의 모든 문화적 활동의 근간은 불교라 할 수 있는데, 이 시기의 불교적 특징은 한 사상이나 종파에 집착하지 않고 이를 융화·통합하려는 통불교(通佛敎)적인 성격을 띠었다는 것이다.

그 대표자로 법성종 계통의 사상을 주로 한 원효는 그 밖의 여타 종파나 사상도 융화·통일되어야 함을 그의 저서인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을 통해 강조하였는데, 심지어 노장사상에도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의술이나 도참에도 관심을 보였다.

한편, 화엄종(華嚴宗)을 개창한 의상도 화엄종만 강조하지 않고 여러 사상을 포용하려 하였는데, 그의 불교사상은 화엄학에 바탕을 두면서도 관음신앙(觀音信仰)이나 정토신앙(淨土信仰)을 포용하는 통불교적인 성격을 띠었다. 그것은 사실상 화엄학이 갖는 본래의 성격상 모든 것을 넓게 포용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허준과 양예수에 있어서도 모든 의학의 융화와 통합이라는 측면을 읽어낼 수 있는데, 양예수는 『의림촬요』에서 보여주듯이 우리나라의 전통의학의 계승을 중심으로 중국의학의 결합을 이루어냈고, 허준은 『동의보감』에서 전승의학의 융합이라는 테두리에서 보다 넓혀 세계의학의 통합을 시도하여 도교의학이나 불교의학까지 아우르고 있다.

물론 이러한 통합적 움직임은 이전의 『향약집성방』이나 『의방유취』를 통해서 보여주었듯이 널리 구하여 적합하게 분류해 왔던 전통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우리나라의 의학적 구조에 적합한 『의학정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즉, 金元시대의 의학적 학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던 주단계의 의학을 이어받은 우단에 의하여 금원사대가의 의학이 『의학정전』에 녹아져 있었던 것이며, 이러한 계통적 발전을 이룩한 『의학정전』이 『의림촬요』의 모태가 되었던 것이기 때문에, 이를 적극 활용하여 이루어진 『동의보감』은 그 사상적 교감을 통하여 대중의학의 기틀을 체계적으로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의상과 원효가 불교가 가장 번창하고 대중적으로 발전하는 시기에 활동했던 주역이었던 것처럼, 양예수와 허준은 조선 중기의 우리 의학의 발전이 가장 꽃피워졌던 시기에 활동했던 가장 뛰어난 주역이라는 점도 유사한 면이다.

『동의보감』이 당시에 우리 의학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단연코 꼽을 수 있는 것은 의학발전의 각 단계에서 도출되었던 국내외의 모든 의가들의 사상과 그 경험적 치료방법들이 통합되어 새로운 체계로 일목요연하게 이루어진 점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의림촬요』 또한 근세 서양의학이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나라의 임상가에서 필독서로 꼽힐 만큼 그 수요가 빈번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의학서적으로는 효종 3년(1652)부터 『의림촬요』는 꾸준하게 수입해간 대표적인 의서임을 『왜인구청등록(倭人求請謄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왜인구청등록』은 조선 중기 이후 한일 양국 간의 교역을 보여주는 자료로, 일본의 요청에 따라 조선이 보내는 시혜적인 입장으로 국제적인 협력과 이를 통해 발생하는 여러 가지 현안들을 해결해 가는 다양한 내용이 실린 외교문서인데, 여기에는 『동의보감』 보다 오히려 『의림촬요』를 더 많이 요구하고 있음이 눈에 띈다.

이처럼 여러 차례에 걸쳐 『의림촬요』를 일본이 수입해간 것은 곁에 두고 쓰기에 간결하고 질병에 대한 대처가 편제상 명확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출신성분을 살펴보면 이들은 같은 계통에서 다 같이 높은 활약을 했지만, 원래 타고난 신분적 차이는 엄청나다.

원효의 아버지인 설담날(薛談捺)은 시골 변두리인 경산에서 신라 17관등 가운데 11위인 나마(奈麻)를 지냈기 때문에 빈한함을 면할 수 없었고, 의상의 아버지인 김한신(金韓信)은 진골출신으로서 당시 수도인 경주에서 유복한 생활을 영위하였다. 그러하기에 원효는 어렵게 공부할 수밖에 없었고, 의상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학문에 정진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양예수의 조부는 동반(東班)의 정3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통정대부(通政大夫) 판결사(判決事)를 지낸 세호(世豪)이며, 부친은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이자 한성좌윤(漢城左尹)을 지낸 건(建)의 둘째 아들이었기 때문에, 양예수는 가문의 후광을 받아 유복한 가운데 공부하여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고 내의원(內醫院)에 들게 되었지만, 허준은 주지하다시피 서출(庶出)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가지고 어렵게 내의원에 천거되어 들어오게 된다.

이러한 신분적 차이로 원효와 의상이 수행과 포교방법이 달랐던 것처럼, 양예수와 허준의 의학연마와 시술적 차이가 있음을 그들 저서에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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