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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5일 (월)

인류세의 한의학<28>

인류세의 한의학<28>

키리바스 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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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우교수

경희대 기후-몸연구소, 한의대 의사학교실

 

남태평양의 키리바스(Kiribati)에서 이 글을 쓴다. 태평양 도서국 사람들의 건강에 기후변화가 미치는 영향을 인류학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여기에 와있다. 키리바스의 수도가 있는 타라와(Tarawa)를 거쳐 지금은 마라케이(Marakei)라는 더 작은 섬에서 본격적인 연구를 하고 있다. 


인간과 땅

 

키리바스의 섬들은 대부분이 산호섬이다. 우리가 아는 땅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땅 위에 사람들이 산다. 산호섬은 길쭉한 모양이나 환상을 이루는데, 마라케이는 특히 고리 모양의 환상(環狀)의 섬이다. 가운데 라군(lagoon)이 있어서 바다가 안쪽에도 있고 바깥쪽에도 있는 형상이다. 섬 모양은 환상이지만 사람들은 결국 가늘고 길쭉하게 이어진 땅에서 산다. 그 땅의 폭은 1킬로미터가 채 되지 않는다. 몇 백 미터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백 미터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가늘게 이어진 섬 위로 비포장도로가 하나 있고, 길 주변에 사람들이 산다. 

 

키리바스에서 인간과 땅의 관계를 배운다. 여기서 사람들은 가늘고 길게 이어진 바다 위의 땅 위에서 삶을 이어나간다. 가느다란 한 줄 위에 삶들이 펼쳐지고 터전을 구성한다. 한 줄 위에 집도 있고, 학교도 있고, 교회도 있고, 가게도 있고, 묘지도 있고,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도 있다. 여기의 광장은 마니아바(maneaba)다. 키리바스의 독특한 커뮤니티 모임 장소인 마니아바는 날씨가 더워서 지붕이 덮인 형태의 광장이다.

 

안팎의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산호섬에서 자라는 나무와 식물에서 사람들은 음식을 얻는다. 참치, 날치, 자리돔(reeffish)은 주식에 가깝다. 야자수는 음료, 약, 음식, 그리고 수입의 원천이 되는 고마운 나무다. 집들을 만들 때 사용하는 건축자재는 이 땅에서 자라는 팬다너스(pandanus), 야자수의 나무와 잎들을 주로 사용한다. 대다수가 도시와 아파트에 사는 한국에서는 그 인위적 구조물에 곧잘 가려 있지만, 인간은 기후와 지리와 생태를 떠날 수 없다. 도시도 평평하고 넓은 땅이 있어서 만들 수 있었고, 살만한 기후여서 거기에 도시를 지을 수 있었다. 살펴보면, 인간이 땅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인간이 깃든다. 더운 열대지방도 그늘이 있고, 밤이 있고, 바람이 분다. 기후에 맞추어 일을 하고, 놀고, 휴식을 취한다. 인간이 땅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인간이 땅을 부쳐 먹고 산다. 도시는 인간중심주의를 강화하지만, 도시도 땅의 일부다. 자연을 인간의 영역 밖으로 내밀고, 인간과 자연, 도시와 자연의 분절주의를 실천해왔지만, 인간은 언제나 자연 속에 있는 자연의 일부다. 공기 같았던 기후가 본격적으로 대두되는 기후위기 시대에, 우리는 이 잊었던 상식을 다시 절감한다.    

 

마라케이는 아름다운 섬이다. 가운데 호수 같은 라군은 옥빛이다. 야자수들이 휘어져 서있고, 어디선가 본 듯한 남태평양 섬의 그림과 사진이 현실이 되어 있는 곳이다. 사람들은 착하고, 친절하고, 나 같은 이방인에게도 웃으며 인사를 한다. “마우리(mauri)”하고 먼저 인사하면 “마우리, 마우리”하고 받아준다. 인터뷰를 갔었던 한 마을에서는 동네 사람들이 마을 잔치 같은 식사 대접을 해주기도 한다.  

 

마라케이에는 없는 것이 많다. 산이 없다. 강이 없다. 최고 기온이 항상 30도를 넘나들지만 에어컨도 없다. 에어컨이 없지만, 마니아바 안에 들어가면 살만하다. 30도를 넘는 기온이지만, 팬다너스(pandanus) 나무 잎으로 층층이 지붕을 올린 마니아바 안에 들어오면 열기를 식힐 수 있다. 지붕이 있는 평상과 유사한 가옥인 부이아(bwia)에 앉으면 바다 바람이 들어오고, 작렬하는 낮의 햇볕을 피할 수 있다. 하지만 열대지방인 키리바스에서도 기온은 계속 올라간다. 이제는 낮에 밖에 나갈 수 없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구름이 끼어도 열기가 심하다고 한다. 예전과 다르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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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지방의 비등화

유엔 사무총장 안토니오 구테흐스가 심각한 기후변화를 지시하며 글로벌 보일링(global boiling)을 언급했을 때, 국내 언론에서는 지구열대화로 번역하였다. 하지만 열대지방도 나름의 계절이 있고, 최고 기온이 30도가 넘어가도, 살만하다. 여기도 저녁이 되면 선선한 바람이 불고, 밤의 바다 바람은 한기를 느끼게 하기도 한다. 분포도 다르고 정도도 자르지만, 여기도 풍한서습조화(風寒暑濕燥火)가 있다. 

 

지구 전체가 열대화 되더라도, 원래의 열대기후가 전 지구화된다면 지구는 살만한 곳일 것이다. 문제는 열대 지방뿐만 아니라, 계절과 날씨의 변화가 가변성의 한계를 벗어난다는 것이다. 최저 기온과 최고 기온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던 기온이 그 가변성의 범주를 이탈한다. 여름이 고점(高點)의 한계를 벗어나니, 그 여파가 다른 계절에도 연쇄적으로 전달된다. 한국에서는 봄여름가을겨울의 경계가 흐려지고, 꽃들이 때 없이 피고지고, 겨울에도 20도 이상으로 기온이 오른다. 

 

키리바스 사람들은 두 계절을 산다. 열대지방이지만 기후가 변화하는 나름의 진폭이 있다. 겨울로 번역될 수 있는 아우 미앙(Auu Meang)과 여름인 아우 마이아키(Auu Maiaki)가 두 계절이다. 아우 미앙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하지만 여기도 이 계절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아우 미앙이 사라져 간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아우 마이아키만 계속되는 해가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기운의 흐름이 순조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열대기후에도 순환하는 기운이 있다. 양(陽)이 있으면 음(陰)이 있다. 아우 마이아키가 있으면 아우 미앙이 있다. 그런데 키리바스에서 아우 미앙이 실종되고 있다. 가을겨울봄여름이 가을겨울봄여름여름여름으로 이어지는 형국이다. 기록을 갱신하는 고온은 키리바스에서도 마찬가지다. 낮에 직사(直射)하는 햇볕은 (적도에 면해 있는 키리바스에서는 햇볕이 진짜 직사광선이다) 적도의 열기에 익숙한 키리바스 사람들마저 힘들게 한다. 

 

글로벌 보일링은 온대지방이 열대지방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각 기후대가 본래의 순환의 고리를 잃어버리는 시대다. 열대화보다는 비등화(沸騰化)가 더 어울린다. 기존의 틀이 뒤집어지는 변화다. 액체에서 기체로의 변화와 같은 상의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키리바스를 비롯한 태평양의 섬나라는 기후위기의 최전선이다. 여기서 기후위기는 “위험한 고비나 시기”(“위기”의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지금 바로 기후변화의 영향은 사람들의 삶에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다. 북극이 다 녹고 남극 대륙이 드러나서, 산이 없는 여기 섬나라들이 바다에 가라앉기 훨씬 전부터, 사람들이 경험하는 기후변화의 영향은 심각한다. 강이 없는 키리바스에서 지하수가 중요한 식수의 원천이지만, 바닷물이 밀려들면서 지하수는 염분이 높아진다. 바닷가 집들은 해변 침식으로 이주를 해야 한다. 이미 기후이주, 기후난민의 현상이 여기서는 일어나고 있다. 인터뷰를 진행한 주민들 중 특히 오션 쪽(라군 반대 편)에 집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우물을 더 이상 식수로 사용할 수 없다고 한다. 염분이 높아져서 우물물을 빨래, 청소하는 용도로만 사용한다고 한다. 심할 경우 우물을 폐쇄하기도 한다. 식수는 소금기가 덜한 이웃 우물에서 길러서 먹거나, 빗물받이 탱크에서 구한다.

 

물의 문제뿐만 아니라, 기후변화는 삶과 생태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바닷가에 가까운 땅에서는 흙에 염분이 높아져 식물들이 잘 자라지 못한다. 죽는 나무들도 있다. 여기의 열대 식물들도 지금의 혹염을 견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키리바스의 주요 먹거리의 일부인 테 메이(Te Mai, breadfruit)도 혹염을 이기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다. 녹말을 함량하고 있어 말 그대로 나무에서 나는 빵이었던 이곳의 주식이 줄어들고 있다. 살아남은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의 양도 전과 같지 않다. 

 

마라케이는 아름다운 섬이지만, 기후변화를 온몸으로 감당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의 “위기”는 머나먼 이국, 남의 일이 아니다. 키리바스는 기후변화를 혹독하게 겪으며 다른 땅들의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기후에는 국경이 없고, 기후위기는 모든 인류의 위기다. 세계화를 통해 인간들은 지구 위에서의 활동을 하나로 만들고 있지만, 지구는 이미 하나다. 기후는 지구와 그 땅 위의 존재들을 하나로 묶는 전통이 오랜 연결망이다. 지구 비등화로 높아진 바닷물은 남태평양에서만 들이치지 않는다. 지구는 이미 지구화되어 있고, 기후위기는 그것을 확인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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