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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5일 (월)

[시선나누기-32] 신유배 기행

[시선나누기-32] 신유배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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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저온 보리한의원장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공연 현장에서 느낀 바를 에세이 형태로 쓴 ‘시선나누기’ 연재를 싣습니다. 문저온 보리한의원장은 자신의 시집 ‘치병소요록’ (治病逍遙錄)을 연극으로 표현한 ‘생존신고요’, ‘모든 사람은 아프다’ 등의 공연에서 한의사가 자침하는 역할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한낮에 비가 내렸다. 봄비라고 부르기에는 이른 때지만 세상을 흠씬 적시고 남을 만큼 양이 많았다. 하긴 섬진강에는 벌써 매화가 피고 있다.

 

신유배 공연팀이 비 오는 고속도로를 달려 점심 무렵 도착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늦어질 것 같다고 연락이 왔다. 점심시간에 짬을 내서 리허설을 하리라던 계획이 무산되었다. 저녁 공연 전에 두 시간 일찍 가서 손발을 맞추어야 한다. 긴장감이 돌지만, 괜찮다. 우리는 선수니까. 혼잣말로 속을 달랜다. 나는 잠시 등장해서 시를 읽고, 다시 잠시 등장해서 침을 놓으면 된다. 유진규 선생과는 이미 여러 차례 공연을 했으니, 한동안 못 뵈었다 하더라도 우리를 여전히 통하게 하는 무엇이 있음을 믿는다. 

 

신유배 기행. 공연 제목이다. 신(新) 유배 기행이라고? 선생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설명했다. 

 

“예술인들은 해 바뀌면 1월, 2월이 비수기잖아. 관에서 주도하는 공연지원심사가 이때 열리니까... 3월이 돼야 움직일 수 있는데, 이게 뭐야. 가만히 있느니 차라리 나서서 뭐라도 해봐야지. 이건 유배나 다름이 없어. 그래서 유배 기행이야. 하하하.”

 

작당(?)을 한 세 사람의 예술가는 신은미, 유진규, 배일동. 이름 첫 글자를 따서 신유배 기행이라고 붙였다 한다. 


이런 조합을 어디서 볼 것인가


선생의 낙천적인 성품과 호방한 웃음과 하회탈 같은 얼굴을 보고 있으면 젊은 내가 부끄러워진다. 그는 무엇이든 시도하고 부딪치고 쉬지 않는다. 판을 벌이고 목소리를 낸다. 그게 마치 생명을 유지하는 방식이라는 듯이. 들숨과 날숨의 쉼 없는 연속이라는 듯이.

 

일찍 공연장에 도착하자 출연자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낸다. 신, 유, 배 세 사람은 ‘우리가 기행을 떠나니 같이 한판 놉시다’, 전국의 소극장들에 알린다. 거기에 화답하는 소극장과 공연 계획을 세우고, 그 지역의 예술인들을 찾아 문을 두드린다. 그렇게 기행을 떠나온 이들과 맞이하는 이들이 하룻저녁을 함께 어우러진다. 

 

배일동 명창은 풍채가 좋고 쾌활한 사람이다. 입담이 좋아 만나자마자 기분이 좋아진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 뒤풀이에서 인사를 나눈 터라 더욱 반갑다. 곱슬머리를 휘날리는 젊은 고수가 날아갈 듯한 물빛 도포를 입고 곁에 서있다. 

 

신은미 화가는 곱게 땋은 머리에 노랑 저고리 흰 치마를 입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한복이라니. 치마폭마다 수묵이 쳐져 화가인 줄 짐작하겠다. 어리고 꽃다운 사람이 활짝 웃는데 마치 걸어 다니는 봄 같다.

 

여기에 유진규 선생까지. 세 사람은 이미 통영의 작은 섬에서 한 차례 공연을 벌였다. 어민들과 관광객뿐이던 섬마을에서 듣도 보도 못한 공연을 펼쳐주어서 주민들이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아무렴. 이런 조합을 어디서 볼 것인가. 마임과 판소리와 한국화 드로잉 퍼포먼스라니. 

 

“우리는 몸만 있으면 돼. 어디든 갈 수 있어! 하하하.” 


무녀가 철렁철렁 칼을 휘젓는다


선생은 웃었다. 가서 펼치기만 하면 되는 것이 몸에 들어 있다. 그것이 예술일까. 예술이 서 있다. 예술이 서서 웃는다. 예술은 수십 년 나이를 먹고 마침내 걸어 다니는 예술이 되었다. 하지만 몸뿐일까. 서로 열린 마음과 즉흥이 필수일 텐데, 그건 공연 막바지에 모든 출연진이 등장해 하나의 판을 만들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가 공연복을 갖추고 들어선다. 조선시대 무사들이 입던 파란 옷을 한복 치마 위에 입고 술이 달린 파란 모자를 쓰고 붉은 띠를 가슴에 둘렀다. 비녀를 꽂고 두 손에 칼을 들었다. 진주검무다. 홀춤을 춘다고 한다. 진주검무는 여덟 명이 마주 보고 추는 것인데 그것을 다듬어 독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전통을 현대로 가져오는 데에는 숨은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파란 관복을 입은 빨간 입술의 무녀가 철렁철렁 칼을 휘젓는다. 

 

지리산 자락에서 왔다고 자신을 소개한 이는 북을 들고 앉아 소리를 한다. 북채를 놓더니 기타를 잡는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시지 마시고’. 말하듯 노래하듯 긴긴 시를 읊는다. 이 시는 지리산에 파묻혀 시를 쓰고 환경운동에 참여하던 이원규 시인의 것이다. ‘진실로 진실로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신유배 기행.jpg

 

화폭에는 먹빛 꽃이 솟아나고


심봉사 눈뜨는 대목이 애간장 끊을 듯한 소리로 객석을 휘어잡는다. 고수의 북소리가 소리꾼을 휘몰아간다. 몸이 들썩이고 눈물이 솟고 환희와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한 손에 물감, 한 손에 붓을 들고 커다란 화폭 앞에 선 이가 팔을 휘둘러 그림을 그린다. 

 

어릿광대의 빨간 코를 붙인 마임이스트가 나비 한 마리를 가슴에 대고 다독이다 겨우 살려 보내더니, 한지로 얼굴을 뒤덮어 감싼 마임이스트가 하늘로 곧게 세워 올린 한지를 거꾸러뜨려 촛불에 대고 소지하듯 불사른다. 

 

소리꾼이 구음을 넣는다. 고수가 변죽을 울리고 기타를 잡았던 이가 다시 대금을 분다. 철렁대는 칼 소리, 휘도는 치마폭. 굿판 같은 한판 공연의 절정이 지나간다. 화폭에는 먹빛 꽃이 솟아나고 바닥에는 부서지고 흩어진 꽃잎, 꽃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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