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일 교수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崔鎭昌 선생은 충남 아산군 음봉면 쌍암리 출생으로 6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을 와서 야간 중고등학교를 고학으로 마치고 공무원으로 14년간 봉직하였고, 신문사와 잡지사에서 기자로도 활약을 했다.
그가 한의학의 길에 들어서게 된 계기는 한국전쟁이 나면서 피난 중에 선배로부터 한의학 공부를 할 것을 권유받으면서부터다. 崔鎭昌 선생은 만학의 나이로 경희대 한의대에 13기로 입학해 1964년에 졸업하고 한의사가 되었다. 그후 1968년에 경희대 한의대에서 한의학석사를 취득했다.
그는 국제적 활동으로 한국의 한의학을 세계에 알리는 노력을 열정적으로 하였다. 1969년 5월 15일부터 18일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세계 제2차 침구학술대회’에 대한한의사협회 대표로 참가해 차기 대회의 유치를 위해 공헌하였다.
1974년 『한방춘추』 8월호에 생생한의원 최진창 선생이 「상반야제증의 치험례」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다. 이 논문의 부제로는 “妊娠冷飮, 冷浴으로 冷熱相克原因인 듯”이라는 글이 덧붙여져 있다.
그는 소아의 상태를 웃는 상태에 따라 건강의 차이가 있다는 점과 顔貌를 살펴서 병의 경중을 본다는 것도 밝히고 있다. 또한 치료의 어려움이 있는 것에 대해 역대 소아과 의서에서 밝히고 있는 脈息如毫, 易虛, 易實, 易冷, 易熱, 口不能言, 手不能指한 것이라는 정리해서 제시하였다. 또한 소아환자는 한의원에 1차로 내원하는 경우보다 다른 의료기관을 입원치료을 받고 치료 효과의 부족으로 오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내원한 후 가운을 입은 사람이나 낯선 사람만 보아도 광적으로 놀라서 우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것이다.
그가 경험한 치험 하나를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성명 이씨의 장남(아직 출생신고 안 함). 주소는 용산구 주성동. 연령은 생후 40일. 병명은 상반야제증. 발병은 1973년 10월17일(생후 10일). 발병 후 40여일 계속 치료했다고 함. 초진은 1973년 11월13일. 증상은 면색이 적하고 순홍, 신열(구복이 개열), 소변이 赤澁하며, 入夜則 仰身有汗而啼. 치료는 加味導赤散 1첩과 침법으로 百會, 身柱, 命門穴을 1〜3분 자침하고 少商, 少澤穴에서 소량 瀉血 1회. 치료 경과는 치료 당일에 쾌유.
이 치료 경험에 대해 그는 心熱과 胎熱이 원인이기에 加味導赤散을 투여했고 刺鍼은 百會, 身柱, 命門, 少商, 少澤穴을 택했으며, 少商과 少澤穴에 소량을 瀉血을 했다고 밝혔다. 또한 心臟과 소장은 서로 표리가 되니 심열즉소장적열한 것으로 面赤, 煩躁, 口渴하는 것은 生地黃으로 滋腎養心하고 淸下焦血分之熱하며 木通은 通和小腸劑로서 君藥으로 하여 가미했고, 百會, 身柱, 命門은 小兒諸症에 기효한 통용방이라는 것이다.
이 소아 환자의 모친은 잉태했던 임신 초부터 갈증과 전신번열이 나서 妊娠冷飮, 冷浴으로 冷熱相克에서 胎熱로 이어진 것으로 판단된다고 하였다. 이 때 투여한 加味導赤散은 생지황·목통·적복령·황금·택사 各 一錢, 치자·감초 各 六分, 釣鉤藤 一錢, 薑二片이었다.
다음날에 이 소아 환자의 부모와 고모가 쾌유의 소식을 가지고 인사차 내원하여 한의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고 감사의 말씀을 전했다고 한다.
崔鎭昌 선생의 사모님께서 2010년에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에 그동안 보관하고 계셨던 선생의 유품들(의서들, 학술자료, 의권 자료 등)을 남김없이 기증해 주셔서 이 자료를 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