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혜 치휴한방병원 진료원장
<선생님, 이제 그만 저 좀 포기해 주세요> 저자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한의사로서의 직분 수행과 더불어 한의약의 선한 영향력을 넓히고자 꾸준히 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 김은혜 원장의 글을 소개한다.
이제는 기억도 희미해져 당시의 온도와 습도 정도나 가끔 떠올리는 레지던트 시절 초창기의 일이다. 담당 환자 수는 너무 많고, 그중에 중환자도 너무 많고, 그 와중에 동료와 선배들의 휴가와 연휴가 다 겹쳐서 더 큰 문제였던 일주일이 있었다.
눈 돌리면 환자의 열이 펄펄 끓고 있고, 다른 편에서는 의식이 불안정했던 환자가 소변줄과 복수 빼는 관을 손으로 쥐어 뽑고 있고, 또 눈을 돌리면 보호자분들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환자를 붙잡고 울고 계셨으며, 그 광경들이 보기 힘들어 잠깐 화장실에 가서 숨 좀 돌리려 하면 바로 스테이션에서 전화가 와서 ‘성인 말기 백혈병 초진 환자가 입원하셨다.’라고 노티를 주던 시기였다.
사실은 그 상황을 감당해 낼 내 지식과 역량이 부족했던 게 가장 큰 문제였지만, 그 마당에 공부가 부족하다며 책을 펼치고 골방에 들어갈 수는 없으니 어쨌든 바쁘게 환자 관리를 해내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돌이켜보면 한의사로서 흔히 맞닥뜨릴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니 귀하게 생각하는 경험이지만, 여전히 지금도 그 짧은 일주일이 내게는 억겁과도 같았다는 심경은 변함이 없다.
“괜찮다고 말하는 거에 더 책임감을 느껴야”
대학병원에서 한의사 레지던트로서 중증 암 환자를 보기 위해 궁극적으로 가장 잘 해내야 하는 일은, 의대 교수님들께 적재적소와 정확한 타이밍에 협진 의뢰를 넣는 일이다.
무엇이 ‘이상’ 검사 결과인지 파악하고, 그 검사 결과와 관련된 환자의 호소 증상은 무엇인지 알아내고, 그 증상과 관련된 과거력과 현병력은 무엇이 있는지 더 꼼꼼히 알아낸 뒤, 그것을 위해 이미 들어가고 있는 치료는 무엇이며, 그것이 들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더욱 ‘이상’하게 되어버렸는지를 추측해서, 그 이상을 담당하시는 교수님께 협진 의뢰를, 짧고 간결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는 내용으로 넣는 것. 이 과정을 잘 해내는 사람을 일 잘하는 한방 레지던트라고 불렀고, 이 과정만 잘 해내면 협진 의뢰 하나 쓸 때마다 지식과 실력이 수직 상승하는 게 스스로도 체감이 되었다. 정작 책은 한 장도 펼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다시 억겁의 일주일로 돌아가서, 그때 있었던 일 중 결국 나의 역량을 넘어버린 상황이 있었다. 다행히 큰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미리 나서서 해결해 주셨던 감염내과 교수님이 주셨던 말씀이, 유달리 요즘 내가 마음에 자주 새기고 있는 말이다. ‘의사로서 환자한테 안 괜찮다고 말하는 것보다, 괜찮다고 말하는 거에 더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어느 정도의 책임감으로 설명할 것인가
의료인 경력이 몇 년이 되었든 수십 년이 되었든 환자를 보다가 흠칫한 경험이 한 번이라도 있다면, 왜 내가 희미한 기억의 와중에 이 말 만큼은 지금까지 새기고 있는지, 백번 공감할 거로 생각한다.
안 괜찮다는 판단과 함께 그 근거를 설명하고 치료를 끌고 나가던 중에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경우와, 괜찮다고 설명하며 유야무야 끌고 나가던 중에 벌어질 수 있는 최악과의 차이는, 천국과 지옥의 갭보다 크다고 생각한다.
그런 맥락에서 지금의 한의계, 의료인에게나 환자에게나 얼마나 감사하고 반가운지 모른다. 침 맞고 더 아프다, 약침 맞아서 관절이 더 손상된 거 아니냐며, 지금 나의 상태와 당신의 치료가 이상한 게 아니냐고 말하는 환자에게, 괜찮다고 설명함에 있어서 초음파는 정말로 감사한 도구이다.
한약 먹고 간경화가 생겼다, 침 맞고 복강 내 출혈이 생긴 거 아냐며 걱정하는 환자를, 책임감을 가지고 마주할 때 혈액검사는 얼마나 다행인 도구일까.
어깨에 침을 놓았더니 조금 후에 환자가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할 때, 자동차 사고가 나서 침이나 맞으러 왔다며 온 환자가 자세히 보니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일 때, 환자와 우리의 안녕을 위해 엑스레이는 얼마나 고마운 도구일까.
하지만 같은 맥락에서 반대로 말하면, 의료인은, 특히나 우리는, 특히나 요즘의 분위기에서는, 괜찮다고 운을 떼기에 앞서 더욱 더 신중을 기해야 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초음파로 스캔을 하고, 혈액검사를 위해 손가락을 찌르고, 아주아주 소량이나 그럼에도 방사선에 노출되는 것을 감안하고 엑스레이를 찍은 우리는, 어느 정도의 지식과 책임감으로 그 결과를 분석하여, 환자에게 괜찮다고 설명할 것인가.
변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변해야 한다
성장 한약을 몇 개월간 먹은 뒤, 소아 비만이 되고 성장 호르몬에 변화가 생긴 것 같다고 말하는 보호자에게 우리는 앞으로 어떤 경우에, 어떤 인과성에 근거해 괜찮다고 말할 것인가.
피부 표면에 주사를 놓고, 얼굴에 수십 개의 실을 넣고, 고주파 기계를 시행한 후에 미리 설명되지 않은 증상이 나타났을 때,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괜찮다고 설명할 것인가.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다고 했고,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
권한이 커지면 책임은 배로 커진다고 했고, 변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변해야 한다고 했다.
지금의 한의학에 ‘현대’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는 중요한 시기에, 모두가 합심해서, 궁극적으로 양질의 의료를 환자에게 제공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함에 힘썼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