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奎晩 先生(1915∼?)은 1963년 대한한의학회 이사장, 대한한의사협회 이사, 1966년 서울시한의사회 회장, 1959∼1962년간 한의사국가고시 위원, 1968년 보건사회부 의료심의위원 등을 역임한 한의계의 지도자였다. 최규만 이사장은 1963년 5월 『대한한의학회보』 창간호를 간행하여 대한한의학
회의 학회지 간행의 시작을 열었다.
그는 1963년 대한한의학회 이사장 재임중 다음과 같은 글을 1963년 9월 20일 간행된 『대한한의학회보』 제1회 제5호에 게재한다.
이 글의 제목은 ‘제1회 學術講座 開講에 際하여’이다.
“우리들 醫者는 國民保健의 책임을 雙肩에 메고 있고 人命을 다루는 직업을 몸에 지니고 있는 만큼 어떻게 하면 보다 나은 방법으로 우리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 醫界에 貢獻할 수 있나 하는 문제로 항상 걱정하고 있으며 또 그렇게 하기 위하여 연구하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낮에는 항상 환자에게 시달려 餘暇가 없고 短夜에는 하루의 피로를 풀 시간외에는 짬이 없어 開業醫로서 冊子를 가까이 한다는 것은 실상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날이 발전되어 가는 세태에 뒤떨어질 수도 없는 事情이어서 同病相燐의 苦哀를 짐작하는 바 있어 今般 本學會에서는 學術講 學術講座 開講에 있어 제일 먼저 鍼灸學을 선정한 이유는 鍼灸學의 實態를 볼 때 현재 世界醫界에서 가장 관심이 집중되어 硏究中에 있는 것이 한방의학중에서도 鍼灸學인 것이며 歐美各國에 있어서 이 方面에 대한 硏究를 서두르고 있는 품이 자칫하면 우리가 역수입의 몰골을 당하게 될지도 모르는 형편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座의 開講을 보게 되었고 開業醫로서 비교적 짜낼 수 있는 시간을 참작하여 早朝의 시간을 택한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東洋 제국중에서도 한방의학의 연원이 가장 깊은 나라로서 우리나라 鍼灸術은 일찍이 일반적으로 보급되어 山間僻地에 가서 보더라도 救急患者의 응급책으로 四關 정도는 刺鍼할 수 있는 人士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無識한 村老人이나 盲人에게까지 보급되어 있는 鍼灸術이 오히려 학술적으로는 踏步狀態에서 헤어나지 못한 감이 있어 現在醫者間에는 在來式 鍼法을 고집하는 인사와 新式鍼法을 주장하는 인사가 竝立되어 있는 바 鍼灸學의 정상적인 발전을 위하여 이 기회에 學的으로 體系를 整備하고 術法을 통일하지 않으면 올바른 발전을 도모할 수 없는 단계에 놓여 있다고 봅니다
本學會는 이상의 이유로서 鍼灸學의 學術講座를 열어서 可謂 溫故而知新하자는 趣旨에서 敎材는 『鍼灸大成』에 依存하고 시술방법은 新舊式을 兼得함으로서 本邦 鍼灸界에 新紀元을 作成하고 앞으로 斯學의 급진적인 발전을 꾀하자는 것입니다.”
최규만 대한한의학회 초대 이사장은 한의학회가 구성된 이후 역점을 두어야 할 사업으로서 학술강좌를 꼽은 것이다. 그리고 그 방안으로서 침구학 관련 학술강좌를 열어서 한의사 회원간의 학술적 소통을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열망은 다음해인 1964년 7월 20일 서울 시민회관 소강당에서 ‘한의학적으로 본 고혈압’이란 주제로 첫 학술강연회가 열린 것으로 결실맺게 된다. 애초에 鍼灸學을 주제로 하고자 했던 것이 관계자들과 협의하는 과정에서 高血壓으로 주제가 조정된 것으로 보인다.
1964년 제1회 학술강연회의 주제는 다음과 같다. 김장헌의 ‘병리학적으로 본 고혈압’, 유석형의 ‘고혈압치료의 최근 경향’, 권영준의 ‘침구임상에서 본 고혈압’, 홍순용의 ‘사상의학에서 본 고혈압’, 박성수의 ‘나의 임상에서 본 고혈압’, 조명성의 ‘고전에서는 어떻게 고혈압을 다루어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