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린 시절부터 학부 졸업 후 로스쿨 진학이라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의대 진학 후 나름대로 학점 관리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학과 자체의 학점 디플레이션으로 인해 그 꿈을 접게 되었습니다. 교수님들께서 학생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대를 충족하는 것이 한의대생의 덕목이라는 점에는 공감하긴 하나, 현실적으로 학점으로 인해 저와 같이 학부 졸업 이후 진로가 가로막히는 현상이 후배들에게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졸업 후 경쟁해야 하는 타과생들은 애초부터 우리 학교에 비해 훨씬 널널한 학점 부여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학교 졸업생들이 교수님들께서도 권장하시는 임상의 외의 진로로 나아가기 위해 실질적으로 필요한 개선이 이뤄지면 좋을 것 같습니다.”
9월 초 동의대학교 한의과대학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학점실태조사 설문에 대한 한 학생의 익명 응답이다, 같은 설문에서 응답자 중 약 86%가 학점부여 기준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응답했으며, 약 68%가 본인의 성취 정도에 비해 낮거나, 매우 낮은 학점을 부여받았다고 응답했다.
한의대에서 학점은 하나도 안 중요하다(?)
설렘과 불안을 동시에 안고 입학한 신입생들이 선배들과 처음으로 대면하는 자리에서, 한의대 선배들이 새내기들에게 예외 없이 해주는 조언이 있다. “한의대에서 학점은 하나도 안 중요하다. 어차피 쓸 데도 없으니 유급만 안 당할 정도만 하고 최대한 많이 놀아라.”
젊음을 즐기면서 세상을 경험하는 것 또한 대학생의 의무라고 믿는 멋진 어른들은 이 조언이 문제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대학생은 좀 놀아도 된다는 구호는 이미 대학가에서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고어(古語)가 된 지도 벌써 몇 년이 되었다.
CPA, CFA와 같은 자격시험 준비부터 로스쿨을 비롯한 대학원 진학 준비, 전공 분야에서의 역량 강화를 위한 준비로 평범한 대학생들의 시계는 바쁘게 돌아간다. 물론 학점 관리는 이 모든 노력의 대전제다.
시대의 변화를 미처 포착하지 못한 둔감한 어느 선배가 학점 관리가 필요 없다는 조언을 후배에게 전한다면, 곧바로 다른 양식 있는 선배들에게 제지당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게 아니더라도 요즘의 새내기들이 그렇게 세상 물정 모르지 않는지라 몇몇 순진한 녀석들을 제외하고선 귓등으로 흘려듣고 자기 할 일 알아서 잘 하는 것이 2020년대의 일반적 대학 풍경이다. 한의대만 제외하고.
학점이 쓸모없다는, 밖에서는 오래전에 사장된 학설이 한의대에만 망령처럼 떠다닌다. 이 학설은 학생과 교수를 가리지 않고 널리 퍼져있어 교수님들은 바깥세상에서는 인간실격의 징표로 여겨지는 D학점을 학생들에게 스스럼없이 뿌린다.
학생들은 이에 질세라, 학점은 하등 쓸모없다는 학설을 후배들에게 더 적극적으로 설파한다. 이 소모적인 갈등 위에, ‘학점 무용론’은 실체 없이 그 세력을 확장해나간다. 이 기현상에는 따져 볼 만한 지점들이 몇 가지 있는데, 하나는 학점이 무용하다는 말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학점무용론 자체가 자기실현적 예언의 성질을 가진다는 점, 즉 학점무용론이 득세할수록 학점은 더 무용해진다는 측면이다.
낮은 학점은 타 분야 진출을 원천 차단
실제로 한의대에서 학점이 무용한 측면이 있는 것은 한의대 졸업생들이 한의사 외의 다른 진로를 좀처럼 선택하지 않아, 한의대를 제외한 다른 대학의 졸업생들과 경쟁할 상황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을 만드는데 학점무용론이 일조했다는 건데, 학점무용론에 기반을 두고 있는 교수진의 하향 평준화된 학점부여체계로 인해, 한의대생들의 다른 진로로의 진출은 원천적으로 차단되어있다.
낮은 학점은 다른 분야로의 진출을 원천 차단한다. 학점 인플레이션의 광풍에 편승해 주요 대학들이 온갖 편법을 동원해 높은 졸업학점을 맞춰주는 상황에서 2점대의 학점은 한의계 바깥으로의 진로 진출에 있어서 사실상의 사형선고다.(서두에서 언급한 설문에 의하면 지난 학기 기준으로, 동의대 한의과대학 재학생 중 본과 2학년의 최소 30%이상, 예과 2학년의 50%이상, 예과 1학년의 약 40%가량이 2점대 이하의 학점을 부여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수도권 주요 로스쿨 진학을 위해 갖춰야 할 최소 소양으로 여겨지는 4점대 학점 부여 비율도 터무니없이 낮다. 설문의 대상은 동의대 한의과대학 재학생들이었지만, 올 7월에 열린 한의미래토론회에서 확인한 다른 한의과대학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토론회에 참석한 여러 학생들이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각자의 학내에서 의견을 개진했지만, 모두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내는데 실패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토론회장에서 그들과 다시금 공유한 문제의식은, 현재의 하향 평준화된 학점 부여 체계로는 다양한 진로로의 진출이 원천적으로 차단된다는 사실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병인을 명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한의대의 하향 평준화된 학점 체계의 근본 원인을 찾아가다 보면 그곳에는 결국 한의계의 언어적 고립 문제가 있다. 업계 및 학계 자체가 언어적으로(이때 언어는 사유체계 전반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언어를 의미한다.) 외부와 단절되어 있으니, 그 단절된 언어를 공유하게 된 한의대생들 또한 알을 깨고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자꾸만 안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자꾸 안에만 머무니 집단은 바깥과 더더욱 멀어진다. 몇 가지 제도와 인구구조의 견인을 받아 어느 정도 지탱되고 있는 산업적 지표를 제쳐놓고 보면, 한의학 자체에 대한 보편 대중들의 인식은 악화일로의 길을 걷고 있고, 우리의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향키를 오래전에 상실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우리는 점점 더 축소되고 고립되고 있으며, 이는 만성병의 양상을 띤다.
부여학점의 상향평준화가 필요하다
스트레스로 인해 피부질환이 생긴 환자가 있다. 피부질환이 더 큰 스트레스를 유발해 피부질환에 더해 위장장애까지 생겨서 요즘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몸에서 멀쩡한 곳 찾기가 더 어렵다.
당신의 치료전략은? 필자의 치료전략은 이렇다. 먼저 부여학점의 상향평준화를 통해 4점대 학점 졸업자의 비율을 현행 추정 10~15%에서 30%대로 늘리고, 2점대 졸업자 비율을 최소화한다. 이를 통해 과기원 및 서울대 이공계 대학원 진학, 해외 명문대 유학, 수도권 주요 로스쿨 진학, 미국 동부권 대학 MBA 진학 등 다양한 분야로의 진출에 도전해볼 최소요건을 갖춘 인력풀을 넓힌다.
이는 중장기적으로, 우리의 고립된 언어를 바깥세상의 언어로 번역해줄 수 있는 bilingual들을 최대한 양성함으로써 업계의 고립을 타개하기 위함이다.
이학박사를 취득한 bilingual들이 우리에게 열리지 않았던 수많은 실험자원을 우리의 축적된 임상 케이스들과 연결해주고, 법조계로 진출한 bilingual들이 대한민국의 주류 정책 결정 커뮤니티에 우리의 입장을 밀어 넣어줄 수 있다면, 그리고 무엇보다, 업계 바깥의 언어를 충분히 학습한 bilingual들이 보편 대중들과 한의계 사이의 언어적 간극을 상호통역으로 메꿈으로써 우리의 언어적 고립과 그로부터 비롯된 제도적, 학문적, 산업적 고립을 해소해준다면?
21세기에 한의학은 존재 자체로 다원성의 표상이지만, 역설적으로 한의계 내부의 다원성 확보에는 처참하게 실패해왔다. 지금이라도 다원성 확보의 실패에 의한 고립이 업계가 직면한 수많은 문제의 병인임을 직시하고 신속하게 치료에 돌입해야 한다. 다시 서두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치료의 첫 단추는 명백하게 ‘학점체계의 정상화’여야 한다. 우리는 더 다양한 영역의 인재들을 길러낼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