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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1월 09일 (월)

한국한의약진흥원 통폐합, 한의약 '육성'인가 '고사'인가?

한국한의약진흥원 통폐합, 한의약 '육성'인가 '고사'인가?

― 진흥원을 이끌었던 전임 원장으로서, 한의약의 독자성을 흔드는 통폐합 논의에 깊은 우려를 표하며
정창현 교수
(전 한국한의약진흥원장, 경희대 한의과대학)

정창현 교수님.png

  <정창현 전 한국한의약진흥원장/경희대 한의과대학 교수>

 

최근 정부 일각에서 논의 중인 한국한의약진흥원과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의 통폐합 추진 소식을 접하며, 기관을 맡아 한의약의 과학화와 산업화를 위해 밤낮으로 고민했던 전임 원장으로서 참담함과 심각한 위기의식을 금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 정작 한의약 진흥을 담당하는 정부 부서인 보건복지부 한의약정책관실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고 하니 참으로 한심하고 답답한 일이다.

 

정부는 '공공기관 효율화'와 '바이오헬스 산업의 시너지'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는 한의약이 가진 의료적·학문적 특수성과 그간 진흥원이 수행해 온 독자적 정책 지원 및 기획 역량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행정편의주의적 발상이자, 사실상 국가 한의약 육성 체계의 해체 선언이다.

 

진흥원의 수장으로서 현장을 지켰던 경험에 비추어, 이번 통폐합이 왜 대한민국 보건의료와 한의계에 재앙이 될 수밖에 없는지 밝히고자 한다.

 

첫째, ‘한의약육성법’의 입법 취지를 짓밟고 법 자체를 사법(死法)화하는 시도다.

 

국회가 ‘한의약육성법’을 제정하고 제13조에 명시적으로 한국한의약진흥원의 설립 근거를 둔 것은 국가 차원에서 한의약의 독자성과 특수성을 법적으로 보호하고 육성하겠다는 명확한 의지였다.

 

전담 집행 기구인 진흥원을 해체해 타 기관의 하위 조직으로 흡수시키는 것은 국회의 입법 취지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행위다. 전담 기관이 사라진 한의약육성법은 껍데기만 남은 식물 법률로 전락할 것이며, 이는 향후 한의약육성법 자체의 폐지 및 축소 수순으로 이어지는 법적·제도적 고사의 단초가 될 것이다.

 

둘째, 한의약 정책개발의 ‘국가적 컨트롤 타워’가 소멸한다.

 

한국한의약진흥원은 단순히 지원금을 집행하는 산하기관이 아니다. 보건복지부의 한의약육성종합계획 수립에 필요한 기초 연구를 수행하고, 한의약의 표준화·과학화·산업화를 현장에서 기획·지원하는 유일무이한 국가 전담 싱크탱크다.

 

진흥원이 거대 양방 중심의 보건산업진흥원 하위 조직으로 흡수되는 순간, 한의약 전체를 통섭하는 거시적 정책 지원기능은 즉시 마비될 것이다. 한의약 정책 연구는 독립된 전문성을 잃고 바이오산업의 부속 사업 단위로 전락하게 된다.

 

셋째, 국가 보건의료 사업의 초기 설계 단계에서 한의약이 완벽히 배제될 것이다.

 

보건복지부가 추진하는 보장성 강화 정책, 돌봄·주치의·만성질환관리를 포괄하는 일차의료, 감염병 대응 및 감염관리체계 구축 등 주요 보건의료 제도의 실무 기획과 모델 연구는 대부분 국책 연구·진흥 기관의 정책 용역 보고서를 바탕으로 틀을 잡는다.

 

재임 시절 뼈저리게 느낀 것은, 독립된 한의약 전담 기관이 존재함에도 양방 중심의 의료 지형 속에서 한의약의 지분을 지켜내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물며 의과 편향이 심한 통합 기관 내에서 한방 돌봄이나 통합의학적 접근 같은 한의약의 역할을 사업 초기 설계 연구 단계부터 반영해 줄 ‘내부의 강력한 주창자’가 사라진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한의약은 제도 설계 단계부터 패싱당할 것이며, 국가 보건의료 정책 전반에서 한의약이 소외되는 구조가 완전히 고착화될 것이다.

 

한국한의약진흥원 전경.jpg

 

넷째, 한의약의 공공성과 기초 생태계가 파괴된다.

 

현재 정부에서 추진 중인 공공기관 통폐합 방향이 당장 눈앞에 보이는 산업적 성과와 수익성이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보건복지부 기타공공기관 경영실적평가에서 5년 연속 A등급(2021년~2025년)을 받은 한국한의약진흥원의 사업들은 단기 수익보다는 국민 건강권과 한의약의 미래를 위해 국가가 반드시 지켜야 할 기초 인프라 사업이다.

 

성과주의 잣대가 대입되는 순간, 한약재 품질 관리, 한약제제 생산, 한약 비임상 시험, 한의표준임상진료지침(CPG) 개발, 임상 빅데이터 구축, 한의약 세계화 등 공공적 지원 사업들은 축소되거나 폐지될 수밖에 없다.

 

대안은 축소·통합이 아닌 ‘국가 한의약 컨트롤 타워로의 확대 개편’이 정답이다

 

정부가 진정으로 보건의료 효율화와 공공기관 혁신을 원한다면, 답은 진흥원의 해체가 아니라 ‘기능의 통합 일원화와 확대 개편’에 있다.

 

현재 보건복지부 및 식품의약품안전처 산하 여러 기관(보건산업진흥원, 한국보건의료연구원, 한국건강증진개발원, 한국보건의료정보원 등)에 파편화되어 있는 한의약 관련 R&D, 한약재 안전관리, 산업 육성, 임상 연구, 한의약 빅데이터 구축, 해외 진출 지원 등의 업무를 한국한의약진흥원으로 완전히 이관·일원화해야 한다.

 

분산된 한의약 정책 지원 및 집행 기능을 진흥원으로 한데 모아 ‘국가 한의약 종합 컨트롤 타워’로 확대 개편할 때 비로소 중복 예산을 줄이고, 정책 집행의 전문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진정한 의미의 ‘공공기관 혁신’이 이루어질 수 있다.

 

한의학은 수천 년간 국민 건강을 지켜온 민족의 의학이자, 현대 보건의료의 한 축을 담당하는 국가적 자산이다. 기관의 덩치를 줄이고 효율성을 높이겠다는 명분으로 한의약 전담 기관의 독자성을 빼앗는 것은 정부가 한의약 육성의 국가적 책무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정부는 한의약의 독자성과 전문성을 훼손하는 부당한 통폐합 시도를 즉각 중단해야 한다. 그리고 파편화된 한의약 정책 기능을 한국한의약진흥원으로 일원화하여 명실상부한 국가 한의약 전문 진흥 기구로 재탄생시킬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범한의계 구성원들 역시 이번 사안이 한의약육성법 사수와 국가 한의약 체계의 생존이 걸린 분수령임을 인지하고 단결하여 힘을 모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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