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7월30일자 ‘漢醫師協報’(훗날 韓醫新聞) 제84호에 金榮培 先生(1936∼?)은 「漢方政經政策論」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다. 이 글은 1971년 시점에 한의학이 나아갈 길에 대해 고민한 것을 적은 글이다.
김영배 선생은 증조부가 유명한 한의사였다. 그의 고종사촌이 일제강점기에 유명한 약품회사를 경영했고, 한국전쟁 이후로 메이지제약 한국 총대리점을 했던 관계로 이 회사에 근무하게 되어 약학에 대한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이 시기 양약종상, 한약종상 시험 모두를 합격한 후 약방을 차렸던 적도 있지만, 집안의 가업을 계승하겠다는 일념으로 만학의 나이로 경희대 한의대에 입학하여 6년의 과정을 마치고 1969년에 졸업하였다. 유명한 독서광으로 신설동에 위치한 그의 다나아한의원의 진료실에는 서고가 설치되어 수많은 책들이 꽃혀 있었던 것으로 유명했다. 1963년 2월에 건국대학교 法經大學 商學科를 졸업한 경력도 있어 그가 매우 학구적인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대한한의사협회 법제위원회 부위원장, 한의사협보사 편집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漢方政經政策論」이라는 제목의 논문에 자신의 이름 앞에 ‘경희대학교 정경대학원 경제학과 경제학정책학 교실’이라고 쓰고 있다. 1973년 간행된 『한국의료총감』에 김영배 선생이 1972년 2월 경희대 정경대학 대학원에서 경제학석사를 수료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이 논문을 작성했던 시기가 경희대 정경대학원에 석사과정 재학시절이므로, 이 시기 한의학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기 위해 정리한 논문의 일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래에 「漢方政經政策論」의 내용을 그의 목소리로 정리한다(위에 이 글의 제목의 ‘漢方’을 ‘韓方’이라고 고쳐서 표기한 것은 현재의 표기에 따라서 바꾼 것임을 밝힌다).
한의학은 5천년 역사 속에 육성된 찬란한 문화의 유산이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만능시대에 처하여 우리가 선진국가의 발전을 경탄하며 이것을 추종하는 것만으로 그 혜택을 입는 시대는 빨리 지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 한의학도 극심한 생존경쟁 속에서 언제까지나 생존을 타인이나 타국에 의탁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전국 한의원은 국민생활에 일대 각성을 주는 것으로 사회에 기여해야겠고, 산업혁명에 가담할 때 사회의 일보전진인 동시에 우리 白衣醫孫들의 우수성을 만반에 빛나게 해야될 시기가 왔다고 생각된다.
“少年易老學難成, 一寸光陰不可輕”은 젊은이들이여 세월은 빨라 몸은 늙기 쉽지만 늙기 전에 학문을 닦아 성공하기 어려우니 이런 이치를 깨달아 늙기 전에 많이 배우기 위하여 짧은 시간이라도 소홀히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뜻이다.
경제정책을 이룰 수 있는 대안은 다음과 같다. ①한방을 안다. ②한방의료원을 시대상으로 운영할줄 안다. ③한의학도를 교육할 줄 안다. ④백의민족 醫界에 信을 보존할줄 안다. ⑤現산업혁명에 가담할줄 안다. 이것이 경제정책을 이룰 수 있는 첫째 대안이다. 학문을 주장하거나 秘方을 주장하거나 개인의 인격을 주장해서는 안된다.
5천년 역사 오랜 세월 주장해온 한의학문인데 이제 더 자랑해봐야 자화자찬격일 것이다. 자연법사상을 멀리해야겠다. 과학이란 길은 인생에 최대의 업적을 수행하자는 것이 인간의 공통된 욕망이며 이것으로 인해서 과학은 끊임없이 발달되는 것이다. 한의학이 결코 세상과 동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양방과 한방의 경기변동론에서나 자유경쟁론에서나 근대자유주의권에서 누락자가 되지 말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