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식사회학자로서 한국의 지식사회에 관한 전문가다. 다른 지식집단과 비교해 내가 연구하고 경험한 한의사 집단은 한국 최고의 우수 두뇌 집단에 속한다. 이들은 책을 좋아하고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진 지적으로 탁월한 집단이다.
올해 5월 나는 경희대 한의대와 한국한의학연구원이 공동 주최한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다. 경희대 한의대에서 열린 이 학회에서 데니스 노블, 주디스 파쿼, 프랑수아 줄리앙 등 세계적인 석학들이 ‘동아시아 의학의 잠재력’에 대해 발표했다. 내가 이 학회에서 놀란 것은 이 석학들의 발표가 아니라 한의대생들의 집단적 열기와 탁월함이었다. 국제학술대회가 하루 종일 진행됐음에도 이들은 흐트러지지 않은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석학들에 주눅 들지 않고 질문하는 자신감과 자신의 의견을 영어로 표현하는 언어구사력은 20여년 전 내가 처음으로 한의계를 연구할 때 만났던 세대들과는 다른 개방성과 글로벌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한의대 김태우 교수는 복 받았어. 저렇게 우수한 인재들과 같이 공부하니깐.’ 한의학 박사가 아니면서 인류학 박사로 한의계 최초의 교수가 된 김태우 교수(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는 나와 비슷한 ‘한의학의 인류학’ 분야를 공부하고 있다. 그 날보다 김 교수가 부러웠던 적은 없었다.
한의대생들 한의학의 정체성 놓고 혼란과 갈등 겪어
아무리 똑똑한 학생들이라고 해도 한의학을 처음 배우면 한의학의 정체성, 한의학과 과학의 관계, 한의학의 기원과 진화 등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과학과 양의학이 지배적인 세계에서 이들이 겪는 혼란과 갈등은 당연하다. 이들 중에는 이 문제들을 풀기 위해 과학철학, 인류학, 의사학 등의 분야를 공부하고 나름대로 답을 찾고자 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답을 찾기는 대단히 어렵다. 한의대 학생으로부터 시작해 한의사가 되고 난 다음에도 이와 같은 의문은 좀체 풀리지 않고 평생을 안고 살아간다. 내가 출간한 책의 야심 중의 하나는 이러한 혼란과 갈등을 풀기 위한 것이다.
한의계에서 한의학의 정체성과 한의학과 과학/양의학의 관계에 대해 가장 지배적인 관점은 ‘패러다임론’이다. A한의원의 웹사이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 있다: “동서양은 세계와 자연을 인식하는 패러다임이 다릅니다. 같은 현상을 보더라도 세계관이 다르면 받아들이는 인식이 다릅니다. 틀린(wrong) 것과 다른(different) 것은 다릅니다. 어떤 서양 의학자들은 한의학을 틀렸다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입니다.” 패러다임론에 기반한 한의학의 이해는 거의 모든 한의사들이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틀렸다.
토마스 쿤(Thomas Kuhn)의 『과학 혁명의 구조』는 20세기 지성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었던 책 중의 하나이며 학술서로는 드물게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기도 하다. 과학철학에서 과학과 非과학을 구분하는 논리를 발견하기 위한 노력은 꾸준히 있어 왔다. 귀납주의, 입증주의, 반증주의 등 프란시스 베이컨에서 칼 포퍼에 이르기까지 과학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요한 요건이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는 진지하게 시도됐지만 모두 실패했다. 쿤은 과학철학의 이러한 형식 논리를 거부하고 역사를 통해 실제로 과학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를 통해 과학이 관찰이나 실험이 아니라 ‘패러다임’ 또는 ‘세계관’에 근거한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했다.
쿤은 과학혁명을 하나의 세계관에서 다른 세계관으로의 변화라고 설명하면서 이 세계관들 사이에 ‘불가공약성’(incommensurability)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불가공약성은 서로를 비교할 수 있는 공통분모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쿤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은 뉴턴의 물리학과 공통분모가 없고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은 뉴턴의 물리학과 공통분모가 없다. 어떤 세계관이 다른 세계관과 비교할 수 없는 공통분모가 없다면, 곧 우열관계가 없다면 모든 패러다임들은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
쿤의 패러다임 논쟁은 향후 수십년간 가장 뜨거운 감자 중 하나였으며 그 논쟁은 상당히 길다. 쿤의 패러다임론은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전통의학을 수행하거나 공부하거나 분석하는 그룹들에게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다. 패러다임론은 전통의학의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동시에 과학/전통지식간의 우열관계를 부정함으로써 커다란 정치적 효과를 낳았다. A한의원의 웹사이트에서 설명하듯이 한의학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쿤의 패러다임론에 대한 비판과 대안은 과학철학, 과학사회학, 과학인류학 분야의 탁월한 학자들에 의해 제시되었다. 쿤의 이론 중심적 또는 세계관 중심적인 과학관은 과학을 ‘일관된 전체’(coherent whole)로 본다. 패러다임론에 비판적인 학자들은 과학은 이론중심적인 일관된 전체가 아니라 이론, 실험, 기구와 같은 과학 하위문화들이 제각기 독립적인 생명을 가지며 상호 교류하는 ‘다양한 세트들의 연합’으로 본다.
“과학도 한의학도 일관된 전체가 아니다‟
과학이 일관된 전체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한의학도 실상은 일관된 전체가 아니다. 이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과학도 한의학도 일관된 전체(coherent whole)가 아니다’.
예를 들어 한의학이 음양오행의 원리라는 유기체론과 전일론에 입각해 발전했다는 주장은 한의학이 균질적이고 일관된 원리에 바탕하여 작동하고 있다는 패러다임론과 같다. 의사학자들은 한의학이 도교의 원리뿐만 아니라 유교, 불교, 주술 등의 이질적이고 다양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서 발전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중국 한나라 시대 이전의 한의학의 발전을 담고 있는 마왕퇴 사료들은 침이론과 한약이론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해 왔음을 보여준다. 또한 침과 한약의 발전이 전혀 다른 경로를 통해 발전해 왔기 때문에 한의학이 단일한 이론에 의해 단선적으로 발전해왔다는 가정은 틀렸음을 의사학자들은 밝혀냈다.
한의학의 발전과 진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 패러다임론을 거부하는 것은 중요하다. 곧 인식론적 중심 또는 세계관 중심의 한의학에 대한 이해는 한의학의 발전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된다. 왜냐하면 만약 한의학과 과학이 각기 다른 패러다임이라면 이들의 만남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한의사가 X-ray를 사용한다든지 양의사가 침을 사용한다는 것은 패러다임론에서는 허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패러다임의 전환은 구성원들의 개종(conversion)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이들은 개종이 아니라 한의학과 과학/양의학 사이의 양다리를 걸치며 혼종 의료문화를 탄생시킨다.
인식론적 관점이 아니라면 한의학의 발전과 진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한의학의 제도화, 전문화, 과학화, 산업화, 세계화는 한의학이 기존의 경계를 넘어 새롭게 재편되는 것을 뜻하며 이는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론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패러다임론의 대안으로 나는 ‘창조적 유물론’(creative materialism)을 제시한다.
한의학과 과학·양의학은 공존할 수 있는가?
창조적 유물론은 한의학의 발전과 진화를 설명하기 위한 이론일 뿐만 아니라 사회-물질 현상을 설명하는 일반 이론이다. 마누엘 데란다, 브루노 라투르, 앤드류 피커링, 로지 브라이도티 등이 주도한 신유물론(new materialism)은 물질세계의 우선성을 설파하며 맑시즘의 역사유물론과는 달리 자연-물질-인간-사회 세계 사이의 창조적 생산을 설명한다.
신유물론의 선두 주자 데란다는 집합체 또는 어셈블리지(assemblage)라는 개념으로 이 관점의 단초를 제공한다. 무엇이 어셈블리지인가? 들뢰즈에 강한 영향을 받은 데란다는 그를 인용하면서 이 개념의 설명을 시도한다: “무엇이 집합체(assemblage)인가? 이것은 많은 이질적인 면들로 이루어진 다양체(multiplicity)이고 그들 사이의 다른 속성들 예를 들어 나이, 성, 지배를 가로질러 연결,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집합체의 유일한 통일성은 공-기능(co-functioning)이다. 이는 공생(symbiosis) 또는 ‘동정’(sympathy)이다. 이것은 결코 중요한 친자관계(filiations)가 아니라 연합 또는 합금이다. 이것은 계승이나 계보가 아니라 감염이자 전염이자 바람이다.”
생성의 철학자 들뢰즈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어떻게 새롭게 구성되는지에 대한 유물론적 시각을 제시한다. 집합체(assemblage)는 다른 말로 다양체(multiplicity)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이는 친자관계가 함축하는 뿌리나 연속이 아니라 다양하고 이질적인 요소들이 리좀을 통해 공생을 이룸을 의미한다. 한의학의 제도화, 전문과, 과학화, 산업화를 들뢰즈식으로 이해하면 어떻게 한의학과 과학/양의학이 서로의 기원에 뿌리두지 않고 연합하여 새로운 다양체를 이루며 공생 또는 공-기능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집합체의 생산에 있어 부분과 전체에 대한 이해는 중요하며 이는 또한 패러다임론의 반박에 있어서도 중요하다. 새로운 집합체 혹은 다양체의 형성에 있어 부분들은 기원에 뿌리를 두지 않고 연결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패러다임론의 거부와 새로운 대안적 관점으로서의 ‘창조적 유물론’은 한의계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다음 칼럼에서 다시 자세히 다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