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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7월 10일 (금)

論으로 풀어보는 한국 한의학 (13)

論으로 풀어보는 한국 한의학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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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일 교수(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李明漢(1595〜1645)은 李廷龜(1564〜1635)의 아들로서 1610년 16세의 나이로 진사 3등, 1616년 22세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여 인조년간에 大提學, 吏曹判書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의 문집 『白洲集』제16권에는 ‘東醫寶鑑湯液篇小跋’이라는 제목의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도홍경이 앉아서 본초경을 수정함에 신선의 도에 조금만 머무르기를 기약하였는데, 도가들은 이것을 진실로 한으로 여겼다. 그러나 『爾雅』를 익숙하게 읽지 않아서 왕왕 병을 불러들이는 경우가 있었으니 일용에 간절한 것을 가히 알 수가 있다. 단지 많이 안다는 것만이 아닐 따름이다. 또한 복식이 도가에서부터 온 것이 아니었던가? 어찌 가히 한가지로 개괄하여 논할 것인가? 사용함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달려 있을 따름이라.



이 책은 헌원과 기백이 약물을 회초리로 쳐서 감별하고 맛보아 알아낸 남은 뜻을 근본으로 하고, 시골 마을에서 경험한 것을 첨가하였다. 정화년간에 간행된 구본과 비교할 때 더욱 상세해졌고 요점이 있는데, 밭일하면서 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욱 간절하였다. 우리 집안에 몇 개가 있었지만 병난을 몇 차례 겪으면서 한권도 남아있지 못하였다. 무성의 이사회와 우리 집 아이가 친하게 지냈는데, 우리 아이가 나와 엮여서 청나라에 끌려갔었기에 항상 질병과 의약에 대해 근심하였다. 이 세 편을 인쇄하여 보내니 또한 옛사람들의 겹겹 연모하는 뜻이다. 2000리가 막혀서 수삼월동안 왕래도 없으니 돌아보건데 이를 수 있으리오. 이것을 잠시동안 남겨두노니 驛使가 돌아올 것을 기다리노라. 1639년 쌍부의 촌가에서 쓴다.”



李明漢은 『東醫寶鑑』의 서문을 쓴 문장의 대가 李廷龜의 아들이다. 문장으로 이름난 연안이씨의 집안에서 성장한 그는 인조년간의 역사적 변혁에 깊이 관여하였다. 병자호란이 났을 때는 斥和派라는 이유로 청나라까지 끌려갔다 왔고, 이후에 1645년에는 명나라와 밀통하는 咨文을 썼다는 이유로 청나라에 잡혀갔다.



위의 ‘東醫寶鑑湯液篇小跋’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그의 『東醫寶鑑·湯液篇』에 대한 입장을 알 수 있다. 첫째, 李明漢은 『東醫寶鑑·湯液篇』을 어떤 하나의 계통에 집어넣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면서 日用 즉 실용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둘째, 『政和經史證類備用本草』 등 중국의 本草書에 비해 내용이 완비되었음을 주장한다.



셋째, 5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東醫寶鑑』 전체에서 湯液篇만 따로 떼어 인쇄하는 것도 의학적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다고 여기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본초학 지식을 제공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 3권으로 구성된 湯液篇만을 간행한다는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전체 의학계에 약물에 대한 보완적 지식을 갖게 해준다는 것도 되는 것이다.



넷째, 병자호란으로 인해 생겨난 각종 파괴 속에서 湯液篇의 간행을 제일 중요한 과업의 하나로 꼽고 있다. 이것은 의학적 조예가 깊은 집안에서 성장한 李明漢 개인의 성향으로만 파악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東醫寶鑑』이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와중에 국가사업의 일환으로 간행된 점을 돌아볼 때 당시 『東醫寶鑑』에 대한 지식인들의 인식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李明漢의 입장에서 국가적 변란으로 각종 문물이 파괴되었을 때 제일 먼저 복구해야 할 것이 바로 백성들의 日用에 간절히 필요한 『東醫寶鑑』의 湯液篇이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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