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상윤 원광대 한의과대학 교수
(한의학교육학회 회장)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원광대 한의과대학 한상윤 교수(한의학교육학회 회장)로부터 한의학 교육의 질적 향상과 함께 우수한 인재 양성을 위해 ‘한의학 교육의 현재와 미래Ⅱ’ 코너를 통해 한의학 교육의 발전 방향을 소개하고자 한다.
학기가 마무리되어가는 요즘 한의대의 풍경은 밤에도 환히 불이 켜져 있다. 기말고사 기간 정신없는 학생들이 왠지 안쓰럽게 생각되기도 하고, 과거에 나 자신도 다 겪은 과정이긴 하지만 새삼 한의대생들이 대단해 보이기도 한다.
한의대생의 하루는 언제 시작될까. 이른 아침 강의실로 향하는 발걸음일 수도 있고, 시험 기간 새벽까지 이어진 공부 끝에 겨우 눈을 붙였다가 다시 눈을 뜨는 순간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한의대생의 하루 대부분이 ‘공부’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이다. 기초의학과 한의학 이론, 임상 과목과 실습까지 배워야 할 내용은 방대하다.
한 과목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시험 준비가 시작되는 잦은 시험 스케줄이 익숙해질수록 학생들은 늘 시간에 쫓긴다. 계획표를 세우지만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고, ‘이해하며 공부하고 싶다’는 바람은 점점 ‘이번 시험만 넘기자’는 마음으로 바뀌곤 한다. 공부의 시간은 쌓이지만, 그 시간이 곧바로 성장의 시간으로 이어지는지는 쉽게 말하기 어렵다.

‘배우는 사람’ vs ‘버티는 사람’
교육은 흔히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에 집중한다. 그러나 학생의 입장에서 교육은 결국 시간의 경험(time experience)이다. 하루 24시간 중 얼마나 몰입할 수 있었는지, 얼마나 고민할 여유가 있었는지, 얼마나 휴식할 수 있었는지가 학습의 질을 좌우한다.
여기서 한의대의 교육은 그동안 학생의 지식 수준과 성적은 관리해왔지만, 학생의 시간이 어떤 방식으로 흘러가고 있는지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던 것은 아닐까하는 반성을 하게 된다. 한의대 재학기간동안 학생이 진정한 ‘배움의 시간’으로 경험을 쌓고 의료인이 되어가는 지 교육자의 고민이 필요하다.
한의대생의 시간은 자주 분절된다. 강의가 끝나면 곧바로 예습과 복습, 과제와 시험 준비가 이어지고, 실습이 끝나면 보고서와 평가가 기다린다. 학생들은 늘 “이번 주만 넘기면 된다”고 말하지만, 그 ‘이번 주’는 학기 내내 반복된다. 하루하루는 바쁘게 흘러가지만, 정작 스스로 배움을 정리하고 성찰할 시간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공부는 계속되는데, 학습 내용이 남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는 학생들이 적지 않은 이유다.
특히 요즘 같은 시험 기간이 다가오면 이해와 성찰의 시간은 줄어들고, 암기와 반복이 우선된다. 질문을 던질 여유는 사라지고, “왜 이 내용을 배우는지”보다는 “시험에 나올까”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시험이 끝나면 안도감과 함께 허탈함이 찾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시험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점점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 ‘버티는 사람’이 되어간다.
어떤 학생은 “공부를 했다는 느낌보다, To Do List를 지웠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고 말한다. 수업과 수업 사이, 시험과 시험 사이를 건너뛰듯 이동하다 보면, 지식은 축적되기보다 흩어지기 쉽다.
학생의 시간을 존중하는 교육
임상실습 시기의 시간 경험은 또 다르다. 학생들은 환자를 만나며 ‘의사가 된다는 감각’을 처음으로 느끼지만, 동시에 실습 평가와 기록, 지도교수의 기준에 신경 쓰느라 환자에게 온전히 집중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환자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싶어도 “지금 이 장면이 평가에 어떻게 반영될까”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이때의 시간은 배움과 긴장이 뒤섞인, 매우 복합적인 경험으로 남는다.
이러한 시간의 축적은 학습 태도에도 영향을 미친다. 학습은 탐구가 아니라 생존 전략이 되고, 실패는 성찰의 기회가 아니라 피해야 할 위험이 된다. 질문하지 않는 학생, 안전한 답만 찾는 학생, 스스로 판단하기보다 기준을 기다리는 학생이 만들어지는 구조는 개인의 성향 문제가 아니라 교육이 학생의 시간을 어떻게 설계했는가의 결과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한의대 교육이 쉬워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의료인은 전문직이며, 충분한 학습과 훈련은 필수적이다. 다만 한의대 교육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싶다. 과연 학생의 시간을 ‘의미 있는 방향’으로 쓰이게 하고 있는지 말이다. 좋은 의료인으로 성장하기에 중요한 것은 학습 시간의 양이 아니라, 그 시간이 어떤 경험으로 남는가이기 때문이다.
의학교육 연구에서는 이미 학생의 ‘시간 경험’이 중요한 교육 지표로 논의되고 있다. 학생이 학습 과정에서 몰입하고, 실수하고,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확보되는지가 교육의 질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한의대 교육에서도 이러한 관점이 필요하다. 학생에게 생각할 시간, 질문할 시간, 회복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한의학교육 역시 교육과정을 개편, 관리만 할 것이 아니라, 학생의 학습 경험과 시간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설계하는 것이 필요하다. 교과목 간 과도한 중복을 조정하고, 평가 시점을 합리적으로 배치하며, 실습과 이론이 단절되지 않도록 구조를 정비하는 일은 모두 학생의 시간을 되돌려주는 작업이다. 이는 교육의 밀도를 낮추는 일이 아니라, 교육의 방향을 바로잡는 일이다.
학생의 시간을 존중하는 교육은 학생을 신뢰하는 교육이기도 하다. 모든 시간을 통제하려는 교육은 단기적 성과는 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자기주도성을 약화시킨다. 반대로 일정한 여백과 선택권을 허용하는 교육은 다소 불안감을 줄 수는 있지만, 책임 있는 학습자로 성장하게 만든다.
미래 한의사의 시간
한의대생의 시간은 곧 미래 한의사의 시간이다. 지금 어떤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느냐에 따라, 앞으로 환자를 대하는 태도와 배움에 대한 자세도 달라질 수 있다. 바쁜 진료 현장에서도 환자의 이야기를 들을 여유를 가질 수 있는 한의사, 끊임없이 배우고 성찰하는 의료인은 학창 시절 ‘의미 있는 시간’을 경험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한의학교육의 미래를 이야기할 때, 거창한 제도나 새로운 과목을 떠올리기 전에 이런 질문을 먼저 던져보면 좋겠다.
“지금, 한의대생의 시간은 어떻게 쓰이고 있는가.”
이 질문에 진지하게 답하려는 순간부터, 한의학교육의 변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