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미숙
국회사무처 부속한의원 원장
(前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
“의원님, 검사 시절 주로 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만나셨을 때, 그런 사람들만 계속 접하다 보면 너무 힘드셨을 것 같아요.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죄를 미워하라는 말이 얼마나 어려운 경지일지… 구형 내리기도 전에 인간적으로 ‘이러고도 니가 사람이냐?!’ 그런 사감도 많이 들고 그러지는 않으셨어요?”
“너무 많았지요. 그래서 나 자신을 지켜야 했었죠. 그들의 에너지에 내 에너지를 빼앗기기 전에… 맞다. 책 한 권 소개하고 싶어요. 우리 비서 통해 보내드릴게요. 아마 절판되어서 책이 시중에 없을 거예요.”
“아닙니다. 의원님. 제가 찾아볼게요. 국회도서관도 있구요.”
“그래요, 그럼... 제목이 포지티브 에너지인가 그래요. 주요 내용은 우리 왜 사람들 만나면 기운 빼는 사람들 있죠? 그 사람들을 에너지 흡혈귀라고 표현했는데 이게 딱 맞아떨어지는 표현이에요. 그저 멀리해야 해요. 사람들 만나면 특히 원장님도 환자들 많이 만나면 기운 많이 뺏기잖아요. 많이 뺏기고 혹은 적게 뺏기고... 차이는 있겠죠. 미운 사람들 만나면 그 사람 미워하지 말고 ‘아, 당신은 에너지 흡혈귀로군요’하고 그냥 좀 멀리하세요. 원장님이 가진 귀한 에너지를 지켜가세요. 그래야 오래오래 일할 수 있어요. 검사생활 하면서 정서적으로 덜 힘들었던 게 이런 식으로 사람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를 줄이면서 에너지를 조절했더니 훨씬 덜 소모되었어요. 검사 마치고 잠시 대학에 있었어요. 월급은 적었어도 너무 행복했어요. ‘난 교수직이 더 맞는구나…’를 너무 늦게 깨달았네요. 의원직 마치고 여력이 되면 난 정말 한의사 한 번 해보고 싶은데… 이미 나이가 하하하….”
“의원님, 충분히 가능하실 것 같은데요. 부산대 한의전에 서울공대 출신에 삼성에서 정년퇴직 하신 분이 입학하셨어요. 아마 그 분 지금 한의사 하실 것 같은데요. 백세시대인데 일흔 전에 면허받으셨으니 적어도 10년은 환자 보실 수 있잖아요.”
“아, 그래요? 너무 반가운 소식이네요.”
가끔 자주 이런저런 통증으로 진료실을 들르시는 의원님 한 분이 계신다. 한의학을 무한 신뢰하시고 뜸 치료도 좋아하셔서 족저근막염, 요통, 어깨통증 등으로 내원하실 때마다 정성을 다해서 치료해 드렸고 그때마다 비서를 통해 따뜻한 감사인사를 전해오셨던 분.
평소 영화에서 봐오던 전형적인 검사 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다정다감한 성품과 진지함이 묻어있는 대화가 가능했던 의원님과는 그래서 오실 때마다 이런저런 책 이야기, 사람들 이야기 그리고 한의학 관련된 내용들도 자연스럽게 주제가 되곤 했다.
자신을 지키며 스트레스 받지 않고 사는 방법은?

의원님 말씀대로 책은 이미 절판, 품절된 상태였고 국회도서관에는 다행히 대출이 가능한 책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좋은 운명을 끌어들이는 포지티브 에너지』(주디스 올로프, 도서출판 한언, 2004년)라는 책 이외에도 저자의 다른 책들 『감정의 자유』(2012년), 『나는 초민감자입니다』(2019년), 『하루 한 페이지 마음챙김』(2021년)까지 같이 검색이 되어서 한꺼번에 대출을 신청했다. 저자는 LA에서 심리상담소를 운영하며 예민한 사람들이 자신을 지키며 스트레스 받지 않고 살 수 있도록 돕고 있는 정신과 전문의이다.
인간관계는 에너지를 주고받는 순간들로 이루어진다. 어떤 사람은 우리를 두근거리게 만들거나 편안하게 만드는 반면에 우리에게서 생기를 빼앗아가는 사람도 있다. 에너지 흡혈귀(energy vampire)가 우리의 충만한 활력을 빼앗아 세상을 활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주류 의학에 몸담고 있는 의사들도 거의 대부분 에너지 흡혈귀를 이해하지 못한다. 게다가 일반인들 역시 에너지 흡혈귀의 존재조차 모른 채 부지불식간에 뜻하지 않은 피해자가 되어 미리 막을 수도 있는 피로를 견뎌가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에너지 흡혈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면 자기관리에 충실해야 한다.
서양인들은 잠재적 에너지를 불가사의한 것으로 여기거나 뉴에이지 운동의 일환으로 생각하겠지만 이는 수천년에 걸친 수많은 치유 전통의 중심이었다. 잠재적 에너지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반응은 ‘방 안에 있는 코끼리’ 이야기에 비유할 수 있다. 바로 앞에 있지만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한의학에서는 잠재적 에너지를 기(氣)라고 부른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서양 과학도 이런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에너지 치유법은 신체와 정신의 균형이 질병을 예방하는 데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아직 잠재적 에너지의 구조가 완전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광자 방출과 전자기 해독을 보고하는 사례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 최근에는 NIH가 에너지 치료를 위한 연구비를 지원한다는 기쁜 소식도 들려온다. 여기에는 요가가 어떻게 불면증을 완화시키는지부터 기공이 어떻게 암 치료의 보조수단이 될 수 있는지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연구가 포함되어 있다. 이미 접촉 치료(therapeutic touch)가 상처 치유와 면역반응을 가속화하고 고통을 완화시켜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잠재적 에너지에 관련된 서적들을 검토하면서 나도 처음에는 생소한 용어들에 당황했다. 서양과학의 전문용어나 심리학 용어에 의해 뜻이 애매모호하게 변질되어 있거나 낯선 한의학 용어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현대의학이 하고 있는 심리치료 범위가 너무 좁다는 사실에 항상 폐소공포증 같은 느낌을 가져왔다. 우리가 가진 의료시스템은 잠재적 에너지가 어떻게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환자들이 고통을 당한다. 그들은 별 도움도 받지 못하면서 몇 년 동안 이 의사, 저 의사를 찾아다닌다. 나는 공감과 같은 직관을 의학과 융화시키는 길을 택함으로써 스스로를 치유했다. 만일 ‘너무 예민하다’는 소리를 들어왔다면 공감의 역학을 제대로 이해함으로써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나아가서 부담감을 자산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현대적인 치료법과 대체요법을 모두 장려하고 실행하는 만큼 잠재적 에너지를 의식적으로 재구축하는, 즉 생명력이 지닌 근본적인 힘을 이용하는 방법을 통해 이 두 가지 치료법을 통합하고자 한다.
이제 의과대학의 커리큘럼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갖고 있는 에너지를 완전하게 감지하고 이용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도록 재편성 되어야 한다. 특정한 에너지를 증대시키려면 어떤 음식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지 않고, 그저 이러저러한 음식을 먹으면 건강에 좋다고 가르치는 것으론 불충분하다. 어떻게 해야 긴장을 풀 수 있는지 보여주지 않고, 그저 잠을 더 자라고 말하는 것이 도움이 되는가? 에너지에 관한 현대의학의 충고가 별 효과를 보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의사의 지시를 따랐는데도 여전히 에너지가 소진되었다고 느낀다면,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당신에게는 좀 더 완벽한 처방이 필요할 뿐이다.
의원님이 소개해주신 책과 그 책의 키워드에 해당하는 ‘에너지 흡혈귀’라는 단어 때문에 가족들을 포함해서 당일 내가 만난 환자들 그리고 오랜 친구들, 최근 친해진 사람들까지도 이 단어를 기준으로 분류를 해보니 재미가 쏠쏠했다.
늘 내게 도움만 주시는 부모님도 어느 날에는 약한 레벨의 에너지 흡혈귀로 변신한 날도 있었으니 바로 그 날이었다. 집에 도착해보니 입구에 웬 한약박스가 놓여있었던 바로 그 날. “엄마, 무슨 한약이에요? 내 처방 아닌 것 같은데…”
내 주위 어디에도 에너지 흡혈귀는 있다
강동 쪽에서 건축업으로 성공을 한 사촌오빠가 한 분 계신다. 사짜 붙은 그 어떤 전문직 사촌들보다도 큰 부를 이루었다. 오빠네 집들이를 다녀오신 엄마가 한 100평은 족히 되어 보이는 복층 고급빌라를 직접 지어서 살고 있다는 오빠의 최근 소식을 전해주셨다. 부러우면 지는 건데 이미 졌다.
역시 사람은 스무살 때 어느 대학, 어느 학과에 들어가느냐 보다 늦복이 터지더라도 사업으로 인한 돈복이 제일 큰 복이구나 싶었다.
최근에 그 사촌오빠의 어머니이자 나에게는 큰어머니께서 엄마에게 전화를 하셔서 당신께서 최근에 몸이 안 좋아서 사촌오빠가 주치의 삼은 잠실 쪽 한의원에서 약을 한 제 드셨는데 비싼 약이라 그런지 그 약 먹고 기운이 펄펄 나고 그렇게 몸이 가볍다 하시면서 며칠 전 작은 아빠(나의 친정아버지) 목소리를 들으니 그 옛날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온데 간 데 없어서 깜짝 놀라셨다며 그 한의원에 전화를 해서 어르신들 기력 돋구는 보약을 보내주고 싶다는 뜻을 전달하셨다는 것이다. 미숙이 한테는 말하지 말라는 당부까지 하셨다고 한다.
엄마는 나한테 전달하지 말라는 말까지 하셨다는 큰어머니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려주셨다. 아버지 상태를 어디까지 들었길래 그 간접적인 전달사항만을 가지고 그냥 이렇게 한약을 처방할 수 있는 것인지 이 모든 상황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지만 이미 배송 완료된 한약을 어찌할 수도 없어서 한약박스에 적힌 한의원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니 홈페이지도 비활성화되어 있었고 당연히 원장이 누군지도 알아볼 수 없었다. 암튼 엄마의 구구절절한 변명은 아래와 같았다.

70년 역사의 태국 국민감기약 “TAKABB”의 광고영상(유투브 채널 WLDO 캡처화면)
돈 잘 벌고 그래서 잘 나가는 우리 집안의 대표로 거듭난 사촌오빠가 한의학을 신뢰하고 전 직원들 한약을 주기적으로 해주며 그 회사 주치의 병원을 그 한의원으로 정해준 것이 그리 고마우셨단다.
그저 한의학, 한의원, 한의사에 대해서 좋은 소리 해주는 사람들은 고맙고 이쁘며 의사 아들 둔 다른 큰어머니가 한약을 독약 취급 하는 것에 못내 서운하셔서 몇 달간 전화 한 번 하고 싶지 않았었다는 속내까지 내비치시며 “나는 그저 좋더라. 한약을 저리 칭송하니 내가 너랑 먼저 상의를 하는 것이 순서였는데 미안하다. 어르신들 보약이라니까 일반적인 처방 보냈겠지 뭐... 이번 처방만 마지못해 받은 것이니 아버지 드시게 하고 그 다음은 너랑 상의하마.”
어머니의 유튜브 구독리스트에 포함돼 있는 ‘한의학’
경미한 당뇨와 전립선염으로 하루 한 두 차례 약 드시는 것 이외에 큰 질환 없이 잘 지내시는 아버지. 코로나를 한 번 겪으시며 고열로 몇 주 고생을 하셨었다. 그 때 빠진 체중이 3∼4kg. 그리고 회복이 잘 되지 않으셨다. 공진단이나 경옥고만 가끔 챙겨드렸던 것이 다인데 거기에 또 뭘 더 보탰어야 했나?
갑자기 죄책감과 자괴감이 들면서 큰어머니의 오바스러움에 감사보다는 서운함이 먼저 들었다. 그래도 명색이 딸이 한의사인데 당신 드시고 좋으셨다고 환자 얼굴도 안 보고 한약을 한 제 덜렁 보내오시는 그 성급함에 어떤 반응을 해야 할 지 아직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무학의 통찰, 진보할매, 순베리(순희+툰베리; 환경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실천하시는 엄마께 나의 고2 딸냄이 붙여놓은 별명이다) 등으로 불리우는 나의 친정엄니. 무슨 시골 냥반이 아는 것도 이토록 많으시고 욕심도 많으신지 모르겠다.
오늘도 팟빵에 올라온 온갖 팟캐스트를 죄다 들으시고 유튜브에 이것저것 입력도 잘 하신다. “알고리즘인가 뭣인가 때문에 자꾸 요놈 얼굴이 뜨는데 꼴뵈기 싫으니까 요놈은 안 보이게 해 브러라잉…”
울 엄니의 유튜브 구독리스트를 보니 정치, 건강법, 여행, 송가인 그리고 한의학이 끼여있다. 한의사 딸냄 때문에 울 엄니가 이렇게 맘을 쓰시는구나 싶어서 가슴이 갑자기 얼얼해진다. 그놈의 딸이 뭐라고, 그놈의 한의학이 뭐라고!!!

영화 『마더』에서 불법침구사로 분한 김혜자님의 대사
최근 본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원전 안전 관리 전문가로 나오는 정안역의 이정현이 폐경에 좋다면서 석류를 까서 석류청을 만드는 장면에서 남편인 해준역의 박해일을 바라보며 “중년 남성 우울증에 자라 진액탕이 좋다더라”는 대사를 읊는 장면이 있다.
근거중심적인 현대의학만 신봉할 것 같은 공부 잘 하는 이과 여자 이정현의 석류와 자라 언급은 나름 이 영화에 거의 나오지 않는 코믹신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00이 00에 좋은가요?”라는 질문을 환자분들로 받을 때 내 속으로 자동으로 떠올려지는 정해진 답이 있다. 물론 나에게만 들리는 환자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문장이다. “좋으면 얼마나 좋고, 나쁘면 얼마나 나쁠까요?” “그 좋은 거 다 챙겨드시고도 백수를 누리지 못하는 많은 재벌총수들을 떠올립시다. 건강한 장수는 00에 좋은 00을 먹어서 누릴 수 없답니다.”
한의학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환자들이 듣고 싶은 대답은 무엇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은 계속된다. “흑염소 먹어도 됩니까?”, “어제 치료받았는데도 오늘 왜 더 아픕니까?”, “어르신들 기력나는 좋은 약 있습니까? 환자는 직접 못 오시고 대강 상태만 전달해 드려도 약처방 가능한가요?”, “관절00이라고 어머니가 어디서 선물을 받으셨나봐요. 드셔도 되는지 원장님께서 성분 좀 봐주세요. 유명한 한의사가 성분을 직접 배합했다는데 이 분 아세요?”, “녹용을 선물 받아서 냉동실에 깜빡 잊고 둔 지 몇 개월 되었는데 이 녹용을 넣어서 약을 한 제 먹고 싶은데 가능한가요?” 등등.
이 많은 분들이 모두 에너지 흡혈귀들은 아닐 것이다. 나의 응대에 따라 나 역시 그들에게 언제든지 에너지 흡혈귀로 작동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들로부터 내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나로 인하여 그들의 하루가 더 나은 것이 될 수 있도록 마음 단디 묵고 최선을 다해 미소와 친절을 버무려 그들이 진료실을 떠날 때까지 성실한 텐션을 유지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에너지를 적극적으로 빼앗으려는 용기있는 자들을 맞닥뜨릴 때 한 번은 밖으로 화끈하게 내뱉고 싶다.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박해일이 내뱉었던 바로 그 대사.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한의사가 그렇게 만만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