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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의 한의학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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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의 한의학 <10>

자연은 하나가 아니다 I

김태호01.jpg

김태우교수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한의원의 인류학 : 몸-마음-자연을 연결하는 사유와 치유> 저자


자연은 하나가 아니다. 자연(自然)과 자연(Nature)이 다르다면 자연은 복수다(인류세의 한의학<8> “자연과 자연” 참조). 이전 연재 글에서 논의했었던 두 자연의 차이는, “자연”이라는 것이 역사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개항 이전에는 자연(自然)이 주된 자연 개념이었다면, 지금은 자연(Nature)이 기본적 개념이 되었다.¹⁾ 이제 일상적 언어와, 행동과, 거처에서 자연(Nature)은 자연스러운 자연이다. 자연과 인간을 나누는 말들, 자연을 개발하는 행위들, 자연과 경계를 둔 도시를 주된 거처로 하면서, 이제 자연(Nature)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 일상적인 자연(Nature) 이전에 자연(自然)이 있었다. 자연이 역사 속에서 변화하는 것이다. 자연이 하나가 아니고 변화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자연이 존재와 생명들의 토대라면, 이러한 변화는 땅이 뒤집히는 일이다. “자연”과 “몸”의 분리불가의 관계를 고려할 때(인류세의 한의학<9> “자연과 몸” 참조), “자연”이 변화한다는 것은 한의학과 같은 의학에게도 엄청난 사건이다. 그리고 <인류세의 한의학>의 주제인 기후위기와도 당연히 연결되어 있다.


자연의 역사성

“자연”이 역사적 현상이라면 지금의 자연스러운 자연도 변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좀처럼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지만, 그러한 변화도 일어난다. 지난번 연재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연”이라는 말은 말뿐만이 아니다. 생각과 일상의 행위 속에 그 말의 의미가 살아서, 생각과 생활의 구조를 구획한다. 그만큼 자연은 견고하다. 좀처럼 변하기 어렵다. 하지만 인류세의 기후위기는 지금의 자연 너머의 자연을 생각하게 한다. 아니, 이것은 강요에 가깝다.

 

기후위기의 근본 문제로서 분리, 분절의 틀을 가진 (인간과 자연의 분리, 인간과 물질의 분리, 주체와 객체의 분리와 같은) 지금의 자연이 존재한다면, 그 개념 위에 자연에 대한 이용가능성과 남용가능성의 생각과 행위가 있다면, 그 자연 너머를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다행히 자연의 복수성은 자연(Nature) 너머의 자연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자연의 견고함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자연에 안주할 수 없게 만드는 초유의 위기는, “자연”을 바꾸는 강력한 동기가 될 수 있다.

 

자연의 변화를 생각해보기 위해, 자연이 변화한 역사의 대목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항기가 자연(自然)에서 자연(Nature)으로의 전이를 가능하게 한 시점이라면, 기후위기는 자연(Nature)에서 또 다른 자연(?)으로의 전이를 가능하게 할 시대의 길목이기 때문이다. 개항기에 물밀 듯이 밀려온 새로운 말들, 제도들, 행위들을 통해 자연(Nature)이 자리를 잡았다면, 이제는 피할 수 없는 기후위기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피할 수 없다는 데서 개항기의 변화와 기후위기의 변화는 그 공통점이 있다. 그만큼 공통적으로 강력한 힘이다.

 

자연의 역사성은 자연을 아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이렇게 견고한 자연도 변화한다는 것을, 한 번씩 세상이 뒤집히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 동아시아로 들어오기 이전, 서구의 “자연”에도 역사가 있었다. 지금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자연은 근대 서구에서 탄생했다. 유럽에서도 근대 이전에는 지금과는 다른 “자연”을 가지고 있었다.²⁾ 지금 자연 개념을 논의하는 학자들은 이 자연의 기원으로,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주체중심주의 철학과 뉴턴으로 대표되는 근대 과학에 주목한다. 데카르트의 철학으로부터, 정신과 분리된 물질, 자연이 나타나게 된다면, 뉴턴의 물리학을 통해, 자연은 내재한 특성을 알 수 있고, 측정 가능한 대상들의 집합이 된다.

 

칸트의 대표작인 『순수 이성 비판』에서도 인간과 자연의 분리는 기본값으로 사용된다. 칸트는 인간의 의식을 구분해서, 이성, 지성, 감성 등을 나누어³⁾ 순수 이성에 관해 말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의식에 대한 논리이면서 또한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는 구도가 된다. 칸트는 인간의 의식에 대한 논의를 심화하지만, 자연과 분리된 인간은 더 확정적이게 된다.

 

칸트는 인간의 의식을 분명히 밝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인간과 세계(자연)의 관계를 말하려고 하였지만, 세계 이전의 인간 의식을 강조하면서, 이 자체가 인간과 세계를 구분 짓는 근대 서구의 사유 틀로 자리잡는다. 칸트 이후에 이러한 분리는 고착화된다. 이와 같은 사유에 관한, 과학에 관한 근대적 변화 속에서 수동적 자연, 고정된 자연, 활용 가능한 자연은 자연스러운 자연이 된다.


“자연하다” 동사 자연의 비가시성

자연하다는 말은 없다(필자가 지금 사용하는 한글프로그램도 “자연하다”를 입력하자마자 그 밑에 빨간 줄을 쫙 긋는다). 우리가 주로 사용하는 자연은 명사다(“순수한 자연,” “광활한 자연,” “태고의 자연”과 같은). 일부 형용사(“자연스러운”과 같이)나 부사(“자연스럽게”와 같이)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동사 “자연하다”는 없다. 말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하다”는 행위를 통해 존재한다.

 

위에서 언급한 데카르트와 뉴턴의 “자연”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연”을 자연화 하는 행위가 필요하다. 데카르트, 뉴턴과 칸트는 인간과 정신으로부터 자연을 떨어뜨리는 “행위”를 하였다. 그럼으로써, 수동화된 자연을 만들었다. 뉴턴 이후 물리학, 화학의 공식들은 순수한 자연을 만드는데 기여한다. 그 공식처럼 자연이 순수하지는 않지만, 다양한 변수를 소거하면서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식을 만든다. 이상기체방정식이 대표적 예다. 기체가 온도(T), 부피(V), 압력(P)의 함수로만 표현되지는 않지만, 변수를 제거하고 즉, 이상적 상태에서 공식을 만든다. 이상기체방정식에서 “이상”은 “순수”와 통한다. 

 

브뢰노 라투르는 이러한 “자연하다”의 행위를 정화작용(purification)이라고 한다(필자의 생각으로는 순수화가 더 적절한 번역인 것 같다). 인간과 자연을 분리의 틀로 바라보는 근대 이후의 생각의 관성이 순수화의 대표적 예시이다. 도시와 자연을 구분하고, 도시에 기거하는 우리의 생활도 순수화와 직접적 연관을 가진다. 도시의 영역에 거주하는 것 자체가 자연을 순수하게 한다.

 

자연이 순수한 자연이 되면, 알 수 있고 통제 가능한 대상이 된다. 순수한 자연은 말 그대로 섞여 있지 않다. 잡스럽지 않다. 순수해서, 잘 알 수 있으므로 통제 가능하고, 개입 가능하다. 순수는 곧잘 순진이고, 나이브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용가능하고, 때론 남용가능한 대상이 된다.

 

김태우.jpg

 

순수한 자연은 없다

그러므로 순수한 자연은 없다. “순수화”를 통해 만들어진 자연이므로 순수한 자연은 없다. 인간의 행위를 통해 순수하게 된 자연이므로 사실은 순수하지 않다. 인간과 자연, 인간과 물질, 주체와 객체를 분리하는 사유의 틀 위에서, 자연, 물질, 객체의 영역으로 비인간을 배치하는 행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이미 인간의 생각과 행위에 연루된 비순수다.

 

라투르의 “순수화”(purification, 혹은 정화작용)가 의미하고 있듯이, 순수한 자연은 없다. 인위적으로 “순수화”된 자연만 있을 뿐이다. 우리가 “자연”이라고 되뇌일 때, 이미 인위가 밀착되어 있다. “자연” 안에 인위가 벌써 들어 있다. 그 자연을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한다. “순수화”된 자연을 순수한 자연이라 말하며, 때 묻지 않은 자연을 동경하며, 자연과 인간의 분리 속에서 우리는 일상을 산다(다음 연재 글 “자연은 하나가 아니다 II”에서 계속).


1) 이 문장의 의미가 보다 분명해지기 위해서는 부가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자연(自然)과 자연(Nature)이, 하나의 대상을 달리 부르는, 혹은 전자는 한자로 후자는 영어로 부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自然)은 연결성과 그 연결성을 관통하는 이치를 강조한다. 자연(Nature)은 인간과 분리된 저기 바깥의 대상을 강조한다. 동아시아에서는 인간 외부의 Nature를 지시할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같은 자연이라고 하더라도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2) 유럽의 중세와 르네상스까지 기본적 존재 이해의 틀이었던 거대한 존재의 고리(The Great Chain of Being)는 근대 이전의 다른 자연에 대한 이해를 예시한다. 신에서부터 인간, 동물을 거쳐 물질들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거대한 위계 사슬 속에서 존재들을 바라보는 관점을 제시한다. 이 관점은 17세기까지 유럽에서 자연에 대한 이해의 틀을 제공하였다.

 

3) 순수 이성 비판에서 “비판”은, 본디 자른다는 의미를 가진다. 의식을 해부하고 분리해서 칸트는 “비판”의 본래 의미를 충분히 살리고 있다.

김태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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