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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6월 20일 (토)

[시선나누기-11] 우리는 프로다

[시선나누기-11] 우리는 프로다

문저온.jpeg

문저온 보리한의원장


[편집자 주] 본란에서는 공연 현장에서 느낀 바를 에세이 형태로 쓴 ‘시선나누기’ 연재를 싣습니다. 문저온 보리한의원장은 최근 자신의 시집 ‘치병소요록’(治病逍遙錄)을 연극으로 표현한 ‘생존신고요’, ‘모든 사람은 아프다’ 등의 공연에서 한의사가 자침하는 역할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우리는 프로잖아!”

취기가 오른 그가 처음 큰 소리로 말했다. 봄밤이었고, 빼곡하고 흥건한 뒤풀이 자리였다. 남도의 해물탕이 막걸릿잔 가운데서 졸아들고 있었다. 그는 뺨이 붉었고, 처음으로 편하게 마셨다. 갈 길은 멀었지만 운전대를 잡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마음을 느슨하게 풀고 흥이 올랐다. 

 

그런 그가 나를 향해 말했다. “우리는 프로잖아!”

 

오른발, 왼발, 무대로 그가 걸어 나온다. 파도 소리가 배경에 깔린다. 파도 소리에는 서늘한 바닷바람이 얹혀 있다. 이상하게도 파도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일순간 시야가 백배쯤 넓어진다. 거기에 푸른 조명이 가세한다. 눈앞에 바다가 펼쳐지고 바닷바람이 나에게로 쏟아져 온다.  

 

그게 연극무대의 힘일지도 모르겠다. 눈앞의 텅 빈 공간이 오직 소리로, 보이지 않는 바다로 채워진다. 영상은 광활한 바다를 우리 눈앞으로 직접 데려와 압도적인 화면을 보여줄 수 있겠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무대에서 들리는 파도 소리는 보이지 않음으로 해서 우리에게 더없이 구체적인 바다를 안겨준다. 내가 아는 바다, 내가 들었던 파도 소리. 그래서 객석에 앉은 각자는 각자의 바닷가에 가 있게 된다. 각각의 머릿속으로 자기만의 바닷바람이 불어온다.

 

활을 쥔 그가 바이올린의 현을 손가락으로 퉁기면서 걸어 나온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그의 걸음은 미약하게 불안한데, 나도 그에게 듣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다. 다친 적이 있는 한쪽 다리가 다른 쪽보다 약해서 의식적으로 힘주어 걷는다고 했다. 누군가의 충고를 듣고 균형을 잡기 쉽도록 양쪽 발끝을 살짝 벌려서 걷는다고 했다. 그래서 그의 걸음걸이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건 그의 등장이 곧 바이올린의 등장이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파도 소리에 얹히는 바이올린 소리는 듣는 이를 먼 곳으로 데려간다. 공간의 확장. 의식의 확대. 눈보다 귀가 열리고 마음이 더 열리는 그때, 음악에 온몸을 싣고 나면 다시 그 위에 시를 낭독하는 그의 목소리가 더해진다.     

 

문저온2.jpg


◇“저 몸짓 저 표정이 클라이맥스구나....”

‘연주자는 무대에서 잘 서 있어야 한다’던 그의 말이 생각났다. 그는 잘 서 있을뿐더러 잘 걷고 있다. 커튼 뒤에서 등장해서 약속된 조명 아래로. 

 

무대에는 붉은 꽃잎들이 흐드러져 누워있다. 배우가 조금 전까지 열연을 하고 사라진 자리다. 그 가운데로 그가 걸어 들어간다. 오른발, 왼발. 그는 곧 무대 가운데 자리를 잡고 발을 모으고 설 것이다. 오른발, 왼발. 나는 이제 그의 걸음 같은 건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잘, 걷는다. 그런데 한 발을 내민 그가 그대로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는 활을 켜기 시작한다.

 

그의 음악은 즉흥연주다. 직접 작곡한 곡을 연주하기는 하지만, 마임 배우의 손짓 하나 발짓 하나마다 교감해야 하는 무대이므로 그날그날의 연주가 달라진다. 리허설과 공연이 다른 게 이상할 리가 없다. 그래서 한순간을 놓치지 않고 배우를 주시하는 그의 긴장감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경지일 것이다. 몸짓에 음악이 얹히고 음악에 몸짓이 업히는 살아 움직이는 무대. 배우의 마임 또한 그날그날 다를 수밖에 없어서, 같은 작품으로 함께 무대에 서는 나도 매번 커튼 뒤에서 무대를 엿보는 재미가 있다. 

 

오늘 저 이는 저 장면을 저렇게 깊이 오래 끌고 가는 구나…… 오늘은 저 몸짓 저 표정이 클라이맥스구나……. 그런 배우의 몸짓을 바이올린은 끌며 당기며 밀어 올리기도 하며 선율을 쌓는다. 연주자만 그럴까. 배우는 선율의 색채와 떨림을 고스란히 느끼며 몸짓과 표현의 깊이를 만들어간다. 

 

그는 보폭대로 다리를 벌리고 선 채 연주에 몰입한다. 나는 그 역동적인 자세를 보며 생각한다. 오늘 무대는 저렇게 하기로 마음먹었구나. 그러면 그런대로 또 다른 무대의 맛이 생겨난다.


◇“그 집에 내가 색깔을 입힌 거잖아”

“몇 걸음 만에 저기까지 가야겠구나 하는 게 있잖아요. 나 스스로 마음먹은. 그래서 연주를 하면서 걷는데, 조명의 위치가 거기가 아닌 거야. 처음이랑 다른 거지. 어떡해. 활은 켜야겠고 한 발짝 더 나가면 안 될 것 같고. 걷던 자세 그대로 멈춰서 자리 잡고 연주해야지 뭐. 하하하……” 

 

그는 통쾌하게 웃었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 하지만 무대에 선 자 스스로 순간순간 판단하고 결단해야 하는 상황이 있다. 연주만 그럴까. 배우가 그렇고 음향이 그렇고 조명도 그럴 것이다. 때로는 진땀 빼는 순간들이 생기는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선생님이 쓴 시가 있어서 이 작품이 만들어진 거잖아. 그걸 뼈대로 마임이라는 집을 지은 거고. 그 집에 내가 색깔을 입힌 거잖아. 말하자면 인테리어를 한 거지. 이 셋 중에 하나라도 없으면 작품이 안 되는 거야.”

 

자기 음악의 자리매김을 제대로 하고 싶어 하는 그는 솔직했고, 당당했고, 아름다웠다. 뒷얘기는 줄였지만, 그래서 그의 말을 기록하고 싶었다. 그날 내게 선명하게 박힌 목소리처럼.

 

“우리는 프로잖아, 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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