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예방접종 역사
1797년부터 1799년까지 영평(현재 경기도 포천) 현령으로 재임하던 실학자 박제가가 정약용과 함께 지역주민에게 천연두 예방을 위한 종두법을 실시한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예방접종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당시의 종두법은 천연두 환자의 고름이나 딱지 등을 피부에 상처를 내고 문지르거나 코 등에 흡입해서 후천 면역을 획득하는 인두법으로 접종 후 두창 환자가 되거나 무증상 감염자가 되어 오히려 주변에 병을 전파하거나 죽기도 해서 널리 보급되지는 못하였다.
이후 1876년 일본 수신사의 수행원으로 동행한 박영선(현재 한의사)이 일본에서 시행 중인 우두를 이용한 종두법을 접하게 되고 이를 제자들에게 소개하는데 그 중 한명이 지석영이다.
지석영은 1879년 부산의 일본 해군 소속의 제생의원에서 우두법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배우고 서울로 올라가던 중 충주에 있는 처가에 들러서 어린 처남에게 우두법을 실시하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사람이 실시한 최초의 우두법으로 보고 있다. 이후에 정부에서도 우두법의 효과와 필요성에 공감하고 서울에 종두장을 설립하여 우두법을 널리 보급하게 되었다.
지석영 선생의 한의사 논란
최근 지석영이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예방접종을 도입한 상징적인 인물로 대두되면서 당시 지석영이 한의사였는지 여부에 대한 논란이 발생하였다. 지석영에게 종두법을 소개한 박영선은 당시 한의사였으며, 지석영에게 한의학을 교육한 스승이었다. 이후에 지석영은 의생 면허를 받아 학술단체인 동서의학연구회에서 회장, 전조선의생회(현재 대한한의사협회 전신)에서 회장을 역임하였다.
국민 의료법이 조선 의료령을 대체하는 과정에서 당시 현존한 의생을 한의사로 개칭하였으므로 지석영은 현재 한의사로 보는 것이 적절하겠다. 물론 한의학뿐 아니라 서양의학의 생리, 병리 등에 대한 지식도 쌓으면서 당시 서양의학을 교육하던 대한의원 의육부(현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학감, 학생감을 역임하였고,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그의 정체성이 서양의학에 가깝다는 일부 주장도 있다.
당시는 의료 이원화 체계가 형성되기 전이므로 명확하게 구분이 어렵지만, 한의학을 기반으로 서양의학을 포괄적으로 흡수했다는 점에서 오늘날에 한의사 직종에 해당하는 인물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겠다.
한의사의 예방접종 시술자격 논란
현재 예방접종 시술 자격과 관련된 법률은 ‘감염병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20조’이다. 해당 시행령에서는 필수 예방접종 업무를 위탁할 수 있는 기관을 명시하고 있는데 이는 ‘종합병원, 병원, 요양병원(의사가 의료행위를 하는 곳만 해당한다) 또는 의원’이다. 이를 근거로 대한의사협회에서는 예방접종은 의사‘만’ 가능한 행위로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시행령에 필수 예방접종 업무의 위탁기관만을 명시하고 있고 예방접종 시술자의 자격에 대해서는 논하고 있지 않아 한의사, 치과의사와 같이 타 의료인들도 시술자격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비급여 등으로 실시하는 예방접종이 치과의사, 한의사의 면허 범위에 속하는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논란이 있다.
실제로 2019년 소아청소년의사회가 독감 예방접종을 한 경기도 용인시의 한 치과 의료진을 무면허 의료행위를 한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면서 예방접종의 면허범위에 대한 논란이 심화되었다.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과는 각 의료 단체에 의료법 해석에 관련된 자문을 요청하였으며, 대한치과의사협회에서는 “국가 예방접종을 제외한 본인부담 예방접종은 의료기관 자체 결정에 따라서 가능하며, 치과병원과 치과의원도 포함된다”는 취지로 답변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예방접종 시술자의 해외사례
국가별로 일부 차이가 있지만 미국, 캐나다, 유럽연합(EU), 호주 등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의사뿐만 아니라 간호사, 약사 등 다양한 보건의료직군이 예방접종을 실시하고 있다.
2018년 유럽연합집행위원회(European Commi ssion)에서 발간한 EU 회원국의 예방접종 서비스 조직 및 전달체계에 관련된 보고서1)에서는 “일부 국가에서 의사만 예방접종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였지만, 의사만 예방접종을 수행하도록 하는 제한적 정책을 지지할 어떠한 증거도 없다.
많은 나라에서 예방접종이 간호사와 약사에 의해서도 전적으로 안전하게 예방접종이 수행되고 있다”고 명시하여 예방접종 시술자를 의사에게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정책에 대해서 비판하였다.
특히 미국의 정골의사(DO)와 자연요법의사(ND), 중국의 중의사 등 한국의 한의사와 유사한 보건의료직종의 경우에도 예방접종에 참여하고 있다. 최근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예방접종과 같이 긴급한 감염병 사태의 경우에는 미국, 영국, 호주 등 다양한 국가에서 보건의료계열 학생을 포함하여 광범위한 직종에게 3시간~8시간 정도의 일정한 교육 후 예방접종 시술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한의사 예방접종의 필요성
우리나라는 의사와 한의사로 구분된 의료 이원화 체계로 되어 있으나 의료법에는 면허범위에 대해 포괄적으로만 기술되어 있다. 사회 경제 발전, 의료기술 발달, 국민 인식 변화 등으로 의사와 한의사의 면허 범위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영역이 넓어지고 있어 이로 인한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잦은 신종 감염병 출현 등으로 전 세계적으로 감염병 예방 및 관리에 국가적 역량이 집중되고 있으며 효율적인 보건의료자원 투입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의사, 한의사, 치과의사 모두 감염병에 대한 진단 및 신고의무는 있지만 감염병을 예방 또는 관리하기 위한 필수적인 예방접종에 대해서는 법률에서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지 않아 지속적으로 논란이 발생하고 있다.
특히 예방접종은 국민의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이 있는 행위로 하나의 면허에만 독점적 권한을 부여하게 될 경우 특정 집단의 기득권 강화를 위한 목적으로 그 권한이 사용될 위험이 커질 수 있다. 실제로 대한의사협회에서는 2015년 수가 문제로 노인 인플루엔자 사업에 참여를 거부하였으며, 2021년 의료법 개정 반대를 이유로 코로나-19 예방접종을 거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하였다.
국제적으로 미국, 유럽 등 주요 국가에서도 예방접종 시술자를 의사에게 국한하지 않고 간호사, 약사 등에게 폭넓게 허용하고 있으며, 유럽연합집행위원회에서 발행한 보고서에서는 의사에게만 제한적으로 예방접종을 하도록 하는 정책은 근거가 없으며, 다양한 보건의료 직종에게서 교육을 통해서 안전하게 예방접종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
역사적으로도 의료법에서 의사와 한의사를 명확하게 구분하기 전에는 현재 한의사에 해당하는 의생이 종두장, 우두국과 같은 기관에서 예방접종 업무를 담당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예방접종을 널리 보급한 지석영 선생도 의생으로 현재 한의사에 해당한다.
현재 국내 한의과대학에서는 공통적으로 주요 감염병에 대한 생리, 병리, 진단, 치료 등에 대해서 예방의학, 내과, 소아과 등의 교과과목에서 학습하고 있고 한의사 국가고시에서 예방의학, 소아과, 내과, 보건의료법규 과목에서 감염병 진단, 신고 및 보고 등에 대한 문항이 출제되었다. 현대의 한의사는 예방접종을 위한 기본적인 교육은 충분히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하듯 역사적 배경, 국제적인 사례 및 정책 흐름, 근거중심의 보건의료정책, 국민 중심의 정책, 예방접종 관련 교육 등의 다양한 측면에서 고려할 때 한의사에게 예방접종 시술을 허용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사회심리학에서는 한 번 일정한 경로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나중에 그 경로가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그 경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성을 ‘경로 의존성’이라고 말하며, 이에 대한 경계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2021년 대한민국에서 예방접종을 의사에게만 허용하는 것은 ‘경로 의존성’이 아닌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볼 시점이다.
참고문헌
1) The organization and delivery of vaccination services in the European Union-Prepared for the European Commission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