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태우 교수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한의원의 인류학 : 몸-마음-자연을 연결하는 사유와 치유> 저자
언어에는 생각의 방식이 녹아 있다. 단어 하나에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공명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가는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준다. 언어적 인간이라는 말은, 단지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이라는 의미를 넘어, 그 함의는 깊고, 넓다. 언어를 통해 지식과 기술을 전달하기도 하지만, 언어에 내재한 생각의 방식이 우리의 상상력과 행동을 제한하기도 한다. 어떤 생각의 방식이 규정되어 있는 언어를 사용하면서,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언어를 굴려 문명을 발전시키기도 하지만, 우리가 언어에 굴림을 당하기도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우리를 말해주듯이, 어떤 시대에 주로 회자되는 말들은 그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말해준다. 인류세가 하나의 시대라면 인류세에 주로 사용하는 말들은 그 시대에 대해 말해준다. 특히, 인간의 바깥을 지칭하는 말들과 그 말에 내재한 생각들을 돌아보는 것은 인류세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기후,’ ‘지구,’ ‘대기,’ ‘온실가스’ 등이 그러한 말들이다. ‘환경’도 그 중의 하나다.
‘환경’위기는 기후위기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기후변화와 ‘환경’변화도 혼용되곤 한다. 말할 것도 없이 ‘환경’은 인류세의 키워드이다. 인류세의 문제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는 ‘환경’에도 어떤 생각의 방식이 이미 규정되어 있다. 환경은, 글자 그대로 둘러싸여 있는[環] 지대[境]를 가리킨다. ‘국경’할 때 사용하는 경(境)자를 써서 그 지대가 나뉘어져 있다는 것을 표현한다. 그것에 의해 둘러싸여져 있는 것은, 물론 사람이다.
‘환경’에는 차별화되는 구역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는 경계와 나눔이라는 생각의 방식이 내재해 있다. 환경이라는 말을 사용하며 우리는 이러한 생각의 방식을 따라하고, 반복한다. 환경(environment)은 번역어다. 19C 말 일본에서 번역되었다. 봉투(envelop)와 같이 내용물을 덮고 있거나, 싸고 있다는 의미를 통해, 안의 내용물과 주변을 나누어서 말하고 있다. “환경”이라고 말하며 우리는 우리 인간을 둘러싼 배경을 연상한다. 환경은 배경이고 인간은 주인공이다. 공부 환경, 사무 환경이 중요하지만, 공부 자체와 사무 자체를 위해 중요할 뿐이다. 환경은 조연이고, 무대의 중심에 있는 것은 따로 있다.
“천인상응”이라는 말에는 다른 생각의 방식이 들어있다. 천은, 환경과 같이 인간의 바깥에 해당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천인상응에서 천은 인간과 떨어져 있지 않다. 상응으로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응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응한다는 것은 응할 수 있는 조건이 이미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 관계없는 것들이 “서로(相) 응할(應)” 수는 없다. 응한다는 것은 이미 연결되어 있는 관계를 의미한다. 천과 인이 관계 속에 이미 존재하고, 또한 그 관계가 어떤 힘들과 조건에 의해 다시 서로 응한다.
뜬금없이 “천인상응”을 끄집어내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상응”과 같은 생각의 방식이 주목받고 있기 때문에 그 의미를 돌아보자는 것이다. 최근, 인간 대(對) 환경과 같은 경계가 있는 사유를 떠나기 위해 새로운 시선을 담지한 언어들이 제안되고 있다. 그중에 상응과 유사한 생각을 담고 있는 말이 인터라-액션(intra-action)이다. 이 용어는 미국 캘리포니아대(산타클루즈) 교수인 캐런 버라드(Karen Barad)가 제안한 말이다. 최근 가장 주목받는 학자의 한 사람인 버라드는, 양자역학을 연구한 물리학자이면서, 양자역학에 내재한 생각의 방식을 가져와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기저에 놓인 이슈들을 논한다.

그가 제안하는 인터라-액션(intra-action)에는, 상호작용으로 번역되는 인터액션(interaction)에 내재한 생각의 방식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인터액션은 개별적으로 떨어져 있는 항들을 전제하는 말이다. 하지만 양자역학이 증명하는 세계의 현상은 결코 떨어져 있는 항들의 문제가 아니다. 지속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회절하는 관계 속에서 물(物)들은 존재한다.
인터라-액션은 단지 인터렉션이라는 단어 하나에 국한된 문제를 지적하기 위한 것은 아니며, 우리 시대 생각의 전제를 극복하기 위한 제안이다. 거리를 두고 나뉘어져 있는, 각각의 개별 물체를 상정하는 사고의 습관을 떠나고자 하는 노력이다. 익숙한 사고의 습관 속에서 그동안 우리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환경을 분리해서 바라보았다. 인터라-액션은 그와 같은 사고 습관을 넘어서기 위한 제안이다. 또한, 기존의 생각을 넘어설 때 열리는 물들에(인간을 포함하여) 관한 새로운 논의 가능성을 위한 제안이다.
인터라-액션과 같이, 천인상응에는 인류세의 주된 언어들의 방식과는 다른 생각이 들어있다. 천인상응은 인류세의 실상을 직시하는데 도움이 된다. 천인상응은, 만물이 이미 관계되어 있고, 또한 세계의 현상이 응함의 문제라는 것을 말한다. 인류세의 문제도 응함으로 바라볼 수 있다. 화석연료 태우기 같은, 인간의 활동이 하늘에 응하는 것이 인류세다. 그 하늘이 다시 인간에 응하며 우리는 위기를 맡고 있다. 이미 연결되어 있는 “서로 응함”의 관계이므로, 인간의 태우기는 하늘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에도 바로 응한다. 이것이 기후위기의 정황이다.
“환경”이라는 말을 사용하며 환경에 내재한 경계와, 나눔의 생각의 방식을 기각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환경과 인간 사이 떨어진 거리를 상정하지 않고 우리와 환경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은 쉽지 않다. “환경”이라고 말할 때 이미 환경은 멀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언어만의 문제가 아니고, 그 언어가 사용되는 시대의(인류세와 같은) 시선에 관한 문제다.
환경과는 달리 천인상응에는 주인공과 배경이 따로 없다. 서로 응하는 존재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세계다. 천인상응에서, 천인보다는 상응에 방점이 있다. 천인은 하나의 예시이고, 그 자리에 다양한 만물이 들어갈 수 있다. 천인이 거창한 것도 아니다. 천과 인 사이 거리가 먼 것도 아니다. 기후변화가 일어나는 하늘, 즉 육기(六氣)가 흐르는 하늘은 지표로부터 20km 이내다. 지구반지름이 6400km라는 것을 고려할 때, 하늘과 사람은 접해있는 형국이다. “서로 응하는” 관계에 있다(이에 관해서는 “크리티컬 존과 천인상응”이라는 주제로 다음 연재글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것이다).
동아시아의 몸과 자연에 대한 이해에서, 하늘과 인간은 분리되기 힘들다. 생명의 하늘과 생명의 몸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늘에도 사시가 있고 몸 안에도 사시가 있다. 몸 밖에도 육기가 있고 몸 안에도 육기가 있다. 동아시아에서 천(天)은 단지 대기가 아니다. 생명이 가득 차 있는 장소다. 인간과 같은 생명들은 이 생명의 꽃밭을 떠날 수 없고, 그러한 분리된, 개별적 존재를 상상할 수 없다. “환경위기”는 인간이라는 개별자에 너무 강한 방점이 찍힌 인류세의 증상이다. 이 환경과 떨어진 개별자는 뿌리 없는 존재처럼 탄소 태우기를 해왔다. 얼음이 녹고, 해수면이 상승하고, 기온이 올라가는 그 장소가, 내가 뿌리 박고 있는 바로 그 땅임을 새삼 상기하는 시대가 인류세이다.
천인상응을 말하는 것은 철지난 유행어를 꺼집어 내는 것이 아니다. 인류세라는 문명사적 전환의 시기는, 그동안 인류의 지혜를 모아야 하는 시대이다. “상응”의 관점이 어느 때보다도 요구되는 시대가 인류세이다. 부름을 받는 말이다. 르네상스도 과거의 지혜를 다시 소환하여, 당시 인류가 봉착한 문제를 풀어보려는 노력이었다(르네상스는 문예부흥으로 번역되지만, 실제 의미는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를 가진다).
르네상스가 다시 불러낸 것은, 신에 의해 인간들의 존재가 규정받고 있는 시대를 넘어서기 위한, 그리스·로마의 인본주의였다. 신들이 중심에 있는 중세의 언어로 그 시대를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다른 언어가 필요했기에 중세 이전 시대의 말들과 생각을 가져왔다. 하지만 지금은 인본주의 시대의 끝에 봉착해 있고, 그 증상이 인류세의 문제로 드러나고 있다. 포스터휴먼 시대에 (버라드는 포스터휴머니즘의 대표적 논자 중 한 명이다) 우리는 동아시아의 생각의 방식을 소환할 수 있다. 인터라-액션과 일맥상통하는, 천인상응은 지금의 인류세에 부름을 받는 말이다. 그 말 속의 생각이 인류세에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