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상의학에 눈을 뜨게 이끌어 주시고, 학문과 임상이 둘이 아님을, 그 위대함과 효율성은 양의학에 비해 월등함을 알게 해주신 김주 선생님!
30년 가까이 강의하시던 선생님께서 지난 겨울 병상에 누우셨어도 금방 툴툴 털고 일어나셔서 강의하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하였습니다.
기력이 좀처럼 회복이 안 되어서 걱정이 되었지만, 2개월 가까이 후배들과 함께 돌아가며 치료를 하던 중이라 더 오래 뵐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4월 2일 일요일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마음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순간 선생님을 모시고 제자들이 모두 모여 ‘사상의약 성리임상론’ 출판기념회를 열었던 일, 부산으로, 강릉으로 원행을 갔던 일, 생신날과 스승의 날에 모시고 식사하던 일등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생각을 더듬어보니 선생님과의 사상공부가 28년이 넘었더군요.
가시고자 했던 서울대 법대에 합격했지만 아버님의 반대로 다니지 못하고, 수년간의 방황 끝에 운명처럼 사상의학을 연구하게 된 선생님. 비주류학문이라는 편견 속에서도 체질감별과 처방을 연구하시다가 피부병을 얻으시고, 그 후유증을 평생 앓는 고초를 겪으셨습니다.
선생님의 명저 ‘사상의약 성리임상론’이 1997년 11월 5일 출간되었고, 저서의 주 내용은 체질통찰법과 생신원을 투약 후 나타나는 반응을 활용한 체질 감별법, 사상처방의 임상활용입니다.
체질 통찰법에서는 이목비구의 모양, 특히 이마의 모양, 손발의 한출 여부, 음수, 대소변 상태를 꼼꼼하게 관찰하여 분류하고 이를 종합하여 체질을 판별하는 객관적인 방법론을 제시하셨습니다. 이후 이 체질 통찰법은 여러 저서에 인용되고 있습니다.
‘생신원’은 선생님의 각고의 노력 끝에 탄생한 산제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산제 제조 과정에서 만 번이 넘는 공이질에 옆구리가 터진 절구가 여러 개이며, 수백 번의 실패를 경험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생신원 산제 2g 정도를 환자에게 투여 후 5~10분 정도 지나면 그 반응이 나타나는데, 양약의 피크타임이 20~30분임을 감안할 때 그저 감탄할 뿐입니다. 그야말로 ‘기’덩어리인 산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사상처방의 임상활용에 있어서는 철저히 동의수세보원의 편제에 따라 병증을 나누어 치료하게 하였습니다. 병을 보는 관점을 동의보감식이 아닌 폐비간신의 대소, 강약, 기의 승강 윤회에 따라 판별하게 하였으며, 그에 따라 병증을 해석하고 처방하면 기대한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한약은 효과가 더디게 나타난다는 통념과는 달리 치료하기 어려워 보이던 환자의 병이 좋아지는 것을 보며 환희를 느끼곤 했습니다.

단순하게 증상과 약물을 바로 연결하는 대증처방이 아닌, 장부성리이론에 맞춰 처방할 때, 보다 근본적이고, 보다 효율적인 치료가 됨을 알려주신 겁니다.
예를 들면 소양인 형방사백산은 생지황 지모 석고 등이 들어 있는데, 사상의학이 널리 알려지기 전에 이 처방을 가지고 한약재상에 약을 지으러 가면 약재상에서 이 처방대로 약을 지어줄 수 없다고 할 정도로 냉성의 약제로 구성된 처방입니다. 하지만 소양인 방광경조자에 쓰면 오줌소태가 한두 첩 만에 좋아질 정도로 빠르고 강력한 처방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후세방 개념인 비위가 냉해서 병이 온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냉한 약은 쓸 엄두를 내지 못하던 후배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때로는 질타하고, 때로는 격려하시고, 때로는 아버님처럼 자상하게 제자들의 가족까지 챙겨주시는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얼마 전 치료해 드리려고 갔을 때도, 부모님과 가족들의 안부를 묻고, 힘든 모습에서도 농담을 하시던 모습이 선합니다. 문상 오는 수많은 제자들의 눈물짓는 모습을 보며, 덩달아 또 눈물이 나옵니다. 이제야 선생님이 돌아가셨음을 실감합니다.
많은 인생의 굴곡을 겪으시면서 짊어지셨던 책임감, 걱정과 근심을 내려놓으시고, 편안히 안녕히 가십시오. 저희들은 가르쳐 주신 내용들을 잘 정리해서, 더욱 연구하고, 또한 우리의 후배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사랑합니다. 선생님
영면하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