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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6월 20일 (토)

윤재윤 부장판사

윤재윤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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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자



“지금 당신의 방에는 어떤 액자가 걸려 있는가?

그것이 당신의 삶에 무엇을 말해주는가?

새 해를 맞이하면서 한번 쯤 액자에 대하여

눈길을 기울여 주면 좋지 않을까?”



어느 병원에 갔다가 <돈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은 것, 건강을 잃으면 모두 잃은 것>이라고 쓰여진 액자를 보았다. 건강이 최고니까 부지런히 병원에 다니라는 뜻이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아파서 병원에 왔는데 ‘모두 잃을 가능성’까지 있다고 경고하면 어쩌자는 것인지? 상상력이 너무 빈곤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사람의 방을 방문할 때마다 사람들의 취향이나 관심이 다양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림과 조각으로 방을 화려하게 꾸민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넓은 방에 멋대가리 없이 액자 한 개만 달랑 걸어 놓은 사람도 있다. 최신의 현대화를 걸어 놓아 자신의 수준을 은근히 과시하는 사람도 있고, 흔한 복제화를 걸어 놓아 최고급 인테리어를 무색하게 하는 사람도 있다. 방에 걸린 액자를 통하여 방 주인의 관심을 엿볼 수 있는 것 같아서 액자를 유심히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내가 본 것 중 가장 좋았던 것 두 가지가 생각난다. 정형외과 의사의 진찰실에서 본 것이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액자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내가 만일 로빈새 한 마리를 도와서 / 보금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줄 수 있다면 / 내 삶은 정녕 헛되지 않으리’ 수많은 글 중에서 이 소박한 글을 택한 그의 마음이 전해져서 내 마음도 금방 따뜻해졌다. 진료가 끝난 뒤 물어 보았더니 에밀리 디킨스의 글인데, 그는 피곤하고 짜증날 때마다 이 액자를 보면서 마음을 가다듬는다고 미소 지었다.



또 하나는 선배 변호사의 사무실에서 본 것이다. ‘見利思義’라고 쓴 큰 액자를 걸어 놓았다. 이는 논어에 나오는 말인데 ‘이익 앞에서 먼저 의로움을 생각하라’는 뜻이다. 돈벌이 하는 변호사가 이런 글을 붙여 놓은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더니 선배는 “이 글이 나를 여러 번 살렸어”하면서 웃는 것이었다. 사건을 맡을 때 이 글을 보면서 지나친 욕심을 경계하고, 올바르게 하였더니 결과적으로 의로움도 지키고 돈도 벌었다는 것이다. 사건 당사자들이 그의 올바름을 알아보고는 다른 사건도 소개해주는 일이 많아져서 결과적으로 훨씬 이득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느 대기업 회장방에는 단 한 개의 액자가 걸려 있는데 그 내용이 ‘守愚’라고 한다. 대기업을 경영하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마음의 우직함이란 생각에서 그 글을 택한 것이리라. ‘어리석음이 가장 큰 지혜’라는 깊은 인생철학이 녹아 있는 것 아닌가.



내가 가장 보고 싶은 액자는 빅터 프랭클의 방에 있는 것이다. 그는 정신과 의사로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다. 수용소에서 아내와 딸을 잃고도 그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임을 확신하고 실존심리치료인 의미요법(Logotherapy)을 창안하였다. 그가 쓴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20세기 최고의 책으로 꼽힌다. 그의 사무실에는 세 개의 액자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딸의 초상화, 펜싱 칼 두 자루,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그림이 그것이다. 이는 말러의 교향곡 2번 ‘부활’의 악보에 쓰여 있는 글과 관련이 있다. ‘아무 것도 헛된 것은 없어라. 우리가 사랑했던 것, 우리가 싸워냈던 것, 우리가 괴로움을 당했던 것, 그 아무 것도 헛됨은 없어라’ 3개의 그림은 각각 사랑·싸움·괴로움을 나타낸다. 삶에서 고통을 피할 수 없고 그 가운데에서 사랑을 하기 위하여 용감하게 싸움을 해야 한다는 뜻이리라. 그의 삶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그림인 셈이다.



나는 사무실을 2년마다 바꾸기 때문에 사무실에 특별한 액자는 걸어 놓지 않았다. 그러나 집 거실에는 보물이 하나 놓여있다. 길이 30cm 가량의 물고기 두 마리가 나란히 있는 화석이 그것이다. 마음이 산란할 때면 이것을 들여다 보면서 그놈들이 헤엄쳐 놀았을 태고의 어느 때를 생각해 본다. 지금 이 순간처럼 틀림없이 존재하였을 그 순간, 지금 살아있는 나처럼 숨 쉬고 있었을 물고기 두 마리! 순간과 영원, 생명과 죽음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신비함을 맛보곤 한다.

자기의 방에 마음 먹고 골라서 걸어 놓는 액자는 이처럼 자신을 깨워주고 지켜주는 역할을 할 때가 많다. 지금 당신의 방에는 어떤 액자가 걸려 있는가? 그것이 당신의 삶에 무엇을 말해주는가? 새해를 맞이하면서 한번쯤 액자에 대하여 눈길을 기울여 주면 좋지 않을까?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인 윤재윤 님은 1985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비행청소년과 시민을 연결하여 보호하는 ‘소년자원보호자’ 제도를 만들었으며 <법원사>(대법원 발간) 편찬 책임을 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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