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醫史學으로 읽는 近現代 韓醫學 (560)김남일 교수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李文宰 교수(1934∼1990)는 경희대 한의대를 제7회로 졸업한 후 모교의 교수로서 경희의료원 한방병원장을 역임한 한의학자다. 1973년 제3차 세계침구학술대회가 열릴 때 학술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면서 「耳診과 耳鍼」이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의 저술 가운데 『鍼醫學』(부제: 臨床 及 麻醉) (1975년), 『예백별총(䃜白別叢)』(간행년도 미상. 인용서적 가운데 가장 늦은 책이 1981년 간행이므로 1981년 이후로 추정)의 침구학 내용을 담고 있는 두 종류의 서적이 눈에 띤다. 『鍼醫學』은 제1편 臨床과 제2편 麻醉로 구성되었다. 제1편 臨床은 △제1장 鍼灸의 개요(침구의 특징, 침구발전의 개황) △제2장 經絡(경락의 의의, 경락의 작용, 십이경맥, 기경팔맥, 십이별락, 십이경근, 십오락맥, 경락계통의 표현) △제3장 腧穴(수혈의 명명, 수혈의 분류, 수혈의 작용, 수혈의 취법) △제4장 刺治療法의 일반상식(鍼의 유형, 자침의 수법, 시침의 수법, 자침의 시간과 간격, 자침의 기법, 보법과 사법, 시침상의 주의사항, 침의학의 금기) △제5장 灸治療法의 일반상식(구치요법의 종류, 구치료의 시간, 구치료의 금기) △제6장 經穴의 해설(正經穴의 해설, 奇經穴의 해설, 經外奇穴의 해설, 新穴의 해설, 耳部穴의 해설) △제7장 치료법(치료의 원칙, 처방의 기준, 문헌에서 본 異名과 別名) △제8장 치료의 처방(內因, 外因, 不內外因, 婦科, 幼科, 外科) △제9장 耳部의 치료(內科, 外科, 부인과, 안과, 이비인후과, 구강과, 피부과, 기타 질환) △제10장 舍岩 陰陽五行鍼法(음양오행침법의 개요, 음양오행침법의 기본이론, 유주육십사혈, 음양오행침법의 치법, 음양오행보사취혈법의 원칙, 자침보사법, 음양오행의 진단법, 사암음양오행침법의 치료) 등으로 구성되었다. 제2편 麻醉는 △제1장 침마취의 특징(특징, 결점) △제2장 침마취의 發達略史(外國史, 韓國史) △제3장 침마취의 기본적 이론과 지식(장부경락학설에 관한 지식, 신경·체액·해부·생리에 관한 지식 △제4장 침마취의 이론과 원리연구(得氣에 관한 문제, 자침의 진통작용, 자침에 의한 진통과정, 자침의 조절작용, 정신요소의 작용, 침마취중 주의할 문제, 결론) △제5장 醫用電子와 생체공학(한의학에서 본 생체전기, 생체의 전기저항과 임피던스·전류성피부반사, 전기쇼크·감전사) △제6장 침마취 방법(침마취의 적응범위, 수술전의 준비, 경혈의 선택방법, 침의 선택과 수리, 경혈의 자극방법, 보조약품, 자침하의 외과적 조작, 수술후의 처치) △제7장 침마취의 常用穴(體鍼마취의 상용혈, 耳鍼麻醉의 상용혈) △제8장 침마취의 각종수술에의 응용(뇌수술, 眼部수술, 이비인후부의 수술, 구강·面部의 수술, 頸部의 수술, 흉부수술, 복부수술, 會陰·肛門部手術) △제9장 특수침마취(頭鍼마취, 鼻鍼마취, 面鍼마취, 耳根마취, 救急鍼마취, 無鍼電氣刺戟麻醉, 水鍼麻醉)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의 다른 침구학 연구서적인 『예백별총(䃜白別叢)』은 △卷之一 침구의 역사 △卷之二 실험적 電位差(Energy) 생성체계로 본 침의 작용(침은 왜 병을 고치는가?) △卷之三 새로운 鍼灸器機의 이론과 실제(路石 鍼灸器機의 新知見)으로 구성되었다. 이 연구 자료에서 그는 鍼의 역사와 灸의 역사를 대별해서 중국의 원시고대사회로부터 현대의 침의학에 이르기까지 간결하게 정리하고 있다. 卷之三에서는 이문재 교수는 그의 호를 따서 새로 이름 붙인 ‘路石生體鍼’과 ‘路石灸’라는 신개발 의료기구를 소개하고 있다. 이채로운 점은 이 책의 卷之二와 卷之三을 中文으로 번역해서 부록처럼 덧붙여 놓았다는 것이다. -
과학으로 보는 한약 이야기 12김호철 교수 경희대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김호철 교수(경희대 한의대 본초학교실)의 ‘과학으로 보는 한약 이야기’를 통해 임상 현장에서 자주 제기되는 한약의 궁금증과 문제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최신 연구 결과와 한의학적 해석을 결합해 쉽게 설명할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독자들이 기존의 한약 지식을 새롭게 바라보고, 실제 진료 현장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아코니틴, 왜 맹독인가: ‘꺼지지 않는 스위치’의 문제 부자의 독성을 이야기할 때 피할 수 없는 이름이 있다. 바로 아코니틴(aconitine)이다. 생부자(生附子)에 함유된 아코니틴은 강력한 신경독이자 심장독이다. 이 독성은 막연한 자극성이나 ‘열이 세다’는 인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 근원은 매우 구체적인 분자 수준의 작용 기전에 있다. 아코니틴은 신경세포와 심근세포의 세포막에 존재하는 전압의존성 나트륨 통로(Voltage-gated Na⁺ channel)에 결합한다. 정상적인 나트륨 통로는 짧게 열렸다가 즉시 닫히며 활동전위를 형성하고, 이 리듬을 통해 신경 신호 전달과 심장 박동이 정밀하게 조절된다. 그러나 아코니틴이 결합하면 이 통로는 열린 채로 고정되어 닫히지 않는다. 문을 열어버린 뒤 잠금장치 자체를 망가뜨리는 셈이다. 그 결과 나트륨 이온이 세포 안으로 끊임없이 유입되고, 세포는 흥분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신경계에서는 입과 혀, 사지의 저림과 마비가 나타나고, 심장에서는 통제되지 않은 수축 신호가 연속적으로 발생한다. 이 과정이 심방성·심실성 부정맥으로 이어지고, 심하면 치명적인 심실세동으로 진행한다. 흔히 비유하듯, 아코니틴은 ‘눌린 채 고장 난 초인종’과 같다. 한 번 울림이 시작되면 멈출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하나다. 아코니틴의 문제는 ‘강하다’는 것이 아니라, ‘조절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아코니틴은 부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 오두·초오·천오·진범이 공유하는 기전 이 지점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아코니틴의 이러한 독성 기전은 비단 부자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두(烏頭), 초오(草烏), 천오(川烏), 그리고 국내에서 진교 혹은 진범(眞芃)으로 불려온 Aconitum 계열 약재들 역시 모두 아코니틴 또는 구조적으로 유사한 디테르펜 알칼로이드를 함유하고 있으며, 기본적인 작용 기전은 동일하다. 이들 모두 전압의존성 나트륨 통로를 지속적으로 활성화시켜, 통제되지 않을 경우 치명적인 흥분을 유발한다. 따라서 특정 본초가 ‘유독 위험하다’는 인식은 약재의 이름 때문이 아니라, Aconitum 계열 알칼로이드라는 공통된 화학적 뿌리에서 기인한다. 이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면 부자만을 과도하게 두려워하거나, 반대로 다른 Aconitum 계열 약재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하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독성의 실체는 본초의 이름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있는 분자 기전과 그것이 얼마나 통제되었는가에 달려 있다. 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포제(炮製)다. 오두와 초오, 천오는 포제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아 강한 자극과 진통 작용이 중심이 되는 반면, 충분히 포제된 부자는 아코니틴의 지배력이 약화되고 약성의 중심이 전신 반응성 회복으로 이동한다. 다시 말해 Aconitum 계열 약재들은 하나의 ‘독성 군집’이 아니라, 포제를 통해 단계적으로 설계된 치료 스펙트럼이며, 부자는 그 스펙트럼에서 가장 정밀하게 길들여진 지점에 위치한다. 포제, 독을 약으로 바꾸는 정밀 화학 – Diester에서 Monoester로 한의학은 오래전부터 이 ‘조절되지 않는 자극’을 포제라는 기술로 다뤄 왔다. 포제는 단순히 독을 씻어내는 세척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분자 구조 자체를 바꾸는 정밀한 가수분해 공정이다. 화학적으로 아코니틴은 디에스터(Diester) 구조를 가진다. 이 구조가 강독성의 핵심이다. 부자를 가열하고 수침하는 포제 과정을 거치면, 먼저 에스터 결합 하나가 끊어지면서 벤조일아코니틴(Benzoylaconitine)으로 전환된다. 이 변화가 결정적이다. 디에스터가 모노에스터(Monoester)로 바뀌는 순간, 독성은 생부자 대비 약 1/200 수준으로 급격히 감소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점에서 약효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벤조일아코니틴은 여전히 진통, 항염증, 심근 수축력 개선 등 임상적으로 의미 있는 생리 활성을 유지한다. 이 단계가 바로 맹독이 ‘쓸 수 있는 약’으로 전환되는 경계선이다. 가열과 가수분해가 더 진행되면 최종적으로 아코닌(Aconine) 상태에 이른다. 이 단계에서는 독성이 생부자 대비 1/2000 수준까지 떨어져 매우 안전해지지만, 동시에 생리 활성 역시 크게 약화된다. 따라서 임상적으로 이상적인 포제부자는, 독성은 통제되었으면서도 약효는 유지되는 벤조일아코니틴 영역을 중심으로, 아코닌이 보조적으로 공존하는 상태라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포제의 본질은 분명해진다. 포제는 아코니틴을 완전히 없애는 기술이 아니다. 독성의 ‘지배력’을 낮추고, 조절 가능한 약성만 남기는 과정이다. 다시 말해 포제는 독성 제거 기술이 아니라, 치료역(Therapeutic window)을 설계하는 기술이다. 효과와 독성은 같은 뿌리에서 갈라진다 아코니틴의 독성과 치료 효과를 전혀 다른 작용으로 이해하는 것은 흔한 오해다. 실제로 이 둘은 동일한 작용이 ‘어떤 조건에서’, ‘어떤 강도로’ 발현되느냐의 차이에 불과하다. 나트륨 통로를 활성화시키는 작용은 조절되지 않으면 부정맥과 마비로 이어진다. 그러나 반응성이 극도로 저하된 심근과 신경계에서는, 일정 수준의 활성화가 오히려 기능 회복의 시동이 될 수 있다. 이것이 고전에서 말한 회양(回陽)과 온심통양(溫心通陽)의 생리적 실체다. 포제는 바로 이 위험한 경계선을 임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범위로 넓혀 준다. 진짜 부작용과 가짜 부작용 – 독성보다 중요한 것은 병태다 임상에서 경험하는 부자 관련 ‘부작용’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첫째는 진짜 중독이다. 포제가 불충분하거나, 약재의 품질이 나쁘거나, 용량이 과도할 때 나타난다. 혀끝과 입술의 얼얼함, 뚜렷한 심계항진, 오심과 구토는 대표적인 경고 신호다. 이는 아코니틴계 독성이 아직 지배적인 상태라는 뜻이며, 즉각적인 중단이나 감량이 필요하다. 둘째는 병태 불일치에서 오는 가짜 부작용이다. 이미 열이 성한 환자, 교감신경이 항진된 상태, 음허화동이나 습열 병태에 부자를 사용했을 때 나타나는 번조, 두통, 불면, 출혈 경향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것은 독성의 문제가 아니라 진단의 문제다. 불이 난 집에 기름을 부은 결과다. 부자의 독성은 제거 대상이 아니라 통제 대상이다 부자는 분명 위험성을 내포한 약물이다. 그러나 그 위험성은 무작위적이지 않다. 정확히 포제된 부자를, 정확한 병태에, 환자의 반응성을 살피며 단계적으로 사용한다면, 부자는 그 어떤 온약보다 예측 가능하고 강력한 효과를 보여준다. 아코니틴은 악역이 아니다. 길들이지 않으면 맹수가 되지만, 조절되면 가장 힘이 좋은 말이 된다. 부자의 독성은 제거해야 할 결함이 아니라, 이해하고 통제해야 할 에너지다. 이 지점까지 이해할 때, 부자는 더 이상 “무서워서 피해야 할 약”이 아니라, 가장 깊은 저반응성 병태에서만 꺼내 쓰는 정밀한 도구로 제자리를 찾게 된다. 이것이 부자를 제대로 아는 길이며, 동시에 가장 안전하게 사용하는 길이다. -
“한‧중 전통의학 교육의 접점을 마주하며…”지난달 4일부터 19일까지 동의대학교 한의과대학 학생으로서 중국 난징에 위치한 중국약과대학에서 진행된 ‘2025학년도 제1회 중국약과대학 겨울 단기 연수캠프’에 참여했다. 이번 캠프는 4일 중국 입국을 시작으로, 5일부터 18일까지 2주간의 교육과정으로 운영됐으며, 19일 중국 출국으로 일정을 마무리했다. 이번 연수에는 국내 6개 한의과대학이 참여했다. 대전대학교 9명, 원광대학교 8명, 상지대학교 6명, 세명대학교 16명, 그리고 동의대학교 한의과대학에서는 예과 1학년부터 본과 3학년까지 총 28명의 학생이 참여해 학년과 학교를 넘어선 교류가 이뤄졌다. 기초 단계의 예과 학생부터 임상 교육을 앞둔 본과 학생까지 함께 참여했다는 점은, 전통의학 교육을 연속적인 흐름 속에서 바라볼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전통의학을 현대적으로 ‘이해’하는 교육 프로그램 이번 겨울캠프는 단순한 해외 연수나 문화 체험이 아니라, 전통 중의약을 현대 과학기술과 연결해 이해하도록 설계된 교육 프로그램라는 점에서 인상 깊었다. 중국약과대학 측은 본 연수를 통해 전통 중의약의 이론적 기반과 임상 술기, 그리고 본초와 처방을 바라보는 현대적 연구 관점을 함께 제시하고자 했다. 프로그램은 중국약과대학 재학생 멘토들과 함께 총 5개 그룹으로 나뉘어 진행됐으며, 평일 오전에는 이론 중심 강의를, 오후에는 실습·참관·견학 중심의 일정으로 구성됐다. 강의는 영어로 진행되거나, 중국어 강의 시 영어 통역이 제공돼 언어적 장벽 없이 수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론과 술기를 함께 익히는 전반적인 교육 구성 이번 겨울캠프의 수업은 특정 이론이나 연구 분야에 국한되기보다는, 전통 중의학을 임상과 생활 속에서 어떻게 활용하고 가르치는지에 초점을 맞춘 전반적인 교육 구성이 인상 깊었다. 설진을 중심으로 한 진단 교육, 일상에서 적용할 수 있는 중의약 지식, 침·뜸·부항·추나 등 침구 치료의 실제 적용을 다룬 수업들은 전통의학을 보다 실천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구성돼 있었다. 특히 침 자침 기술, 뜸 시술, 부항과 괄사, 추나 기법 등을 직접 체험하는 실습 수업에서는 술기의 원리뿐 아니라 환자에게 적용되는 실제 맥락과 주의점을 함께 설명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이는 술기를 단순히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임상 상황 속에서 어떻게 판단하고 적용해야 하는지를 함께 고민하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또한 설진과 생활 속 중의약 지식을 다룬 수업에서는 전통의학적 진단이 임상 현장뿐 아니라 일상적인 건강 관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강조했다. 이러한 접근은 전통의학을 병원 안의 학문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생활 속에서 살아 있는 의학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교육 방식으로 느껴졌다. 이론에서 임상과 산업 현장까지 이후 강의에서는 설진과 생활 속 중의약 지식, 중약 자원과 약용 식물, 질량분석 이미징(MALDI-MSI)을 활용한 본초 분석,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을 활용한 중약·천연물 연구 등 전통의학과 첨단 과학기술을 연결하는 내용이 이어졌다. 이러한 커리큘럼은 전통의학이 현재 진행형의 학문으로 어떻게 확장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또한 참가 학생들은 중국 현지 중의원을 방문해 진료 과정을 참관하고, 침·뜸·부항·추나 치료를 직접 체험했다. 제약회사 견학을 통해 중약이 산업 현장에서 생산·관리되는 과정도 확인할 수 있었다. 실습 수업에서는 침 자침 기술, 뜸 시술, 부항과 괄사, 추나 기법, 본초 포제, 전통 기공 등 전통 치료기술을 실제 임상 적용의 맥락 속에서 경험했다. 국제 교류를 통해 다시 생각한 한의학 교육 이번 연수 프로그램은 한커코리아 유영상 대표의 지원과 협조를 통해 성사됐으며, 이를 통해 국내 한의과대학 학생들이 중국 현지의 전통의학 교육·연구·임상 환경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국제 교육의 장이 마련됐다. 프로그램 마지막에는 조별 성과 발표와 수료식이 진행됐고, 참가 학생들은 각자의 시선에서 전통의학 교육의 공통점과 차이를 정리해 공유했다. 이러한 과정은 단순한 비교를 넘어, 한의학 교육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확장될 수 있을지를 고민해보는 계기가 됐다. 이번 중국약과대학 겨울 단기 연수캠프는 전통의학을 과거의 지식이 아닌, 현재와 미래의 학문으로 바라보게 만든 경험이었다. 특히 다양한 학년의 학생들이 함께 참여함으로써, 전통의학 교육이 기초에서 임상, 연구로 이어지는 하나의 연속선 위에 놓여 있음을 체감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국제 교육 프로그램이 지속돼, 한의학과 중의학이 서로의 교육 방식과 연구 관점을 존중하며 함께 발전해 나가기를 기대해본다. -
한의약 세계화와 글로벌 통합의학오현민 국제/기획이사 (대한한의사협회) Ⅰ. 한의약 국제 교류, 이제는 ‘실행을 전제로’ 논의할 단계 한의약의 세계화는 오랜 시간 한의계 내부에서 반복적으로 논의되어 왔다. 해외 의료봉사, 학술 교류, 단기 연수 프로그램 등 다양한 시도가 이어졌지만, 그 이후 무엇이 남았는지에 대한 질문은 늘 따라왔다. 교류가 교류로 끝나지 않고, 제도·교육·현장으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되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이번 우즈베키스탄 방문은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추진되었다. 이번 일정은 단순한 가능성 탐색이나 관계 확인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 제도 정비와 프로그램 실행을 전제로 한 논의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특히 “지금 당장 가능한 것부터 진행하자”는 공감대가 형성되며, 실행 단계로의 전환이 분명히 논의되었다. 필자는 대한한의사협회 국제/기획 이사로서 협회장과 함께 이번 일정에 참여했으며, 이번 방문은 우즈벡 보건부와 대한한의사협회의 공식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개인의 활동이 아닌, 협회를 중심으로 한의약 전반의 국제 교류 기반을 점검하고 실행 구조를 논의한 자리였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Ⅱ. 협회를 중심으로 한 ‘대표성 있는 실행 구조’ 이번 우즈베키스탄 방문의 또 하나의 특징은, 한의약 분야의 다양한 현장 전문가들이 함께 참여해 협의가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한 동행이 아니라, 현실적인 실천을 전제로 한 역할 분담 구조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교육 분야 전문가로는 대전대학교 한의과대학 류호룡 학장이 참여하여 교육 체계와 학문적 기준의 관점에서 국제 교류와 협력 방안에 대한 논의를 자문하였다. 임상 분야에서는 한국바이오헬스학회 양유찬 회장이 동행하여 실제적인 일상 진료 현장에서 경험한 한의의료기관의 개업부터 경영까지의 모든 과정에 대한 부분을 임상의로서의 관점을 바탕으로 현실적으로 조언하고 점검하였다. 한의약산업 분야로는 한의약산업발전협의회 총회 최형일 의장이 참여해서 전통의학 및 현대 첨단 기술 기반의 보건·복지·바이오·제약 산업의 관점에서 우즈벡 산업 환경과 제도적 여건을 한국의 현황과 비교 분석하고 향후 한의약 세계화를 위한 기반 조성에 대한 논의를 함께 진행했다. 필자는 대한한의사협회 국제/기획 이사로서, 협회를 중심으로 교육·임상·산업 각 영역의 논의가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조율하는 역할을 맡아 이번 일정을 함께 했다. 이는 개인의 성과를 부각하기 위한 구성이 아니라, 협회가 주축이 되어 각 직역 간의 필수적인 실행 구조를 책임성 있게 만들어 가기 위한 과정임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다. Ⅲ. 우즈베키스탄 전통의학, 역사적 기반과 제도화의 흐름 1. 중앙아시아 전통의학의 출발지 우즈베키스탄의 전통의학은 중앙아시아 지역의 민간 치료 경험과 함께, 중세 이슬람 의학 전통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어 왔다. 이 지역은 그리스·로마 자연철학이 이슬람 문명권으로 흡수·재해석되는 과정의 중요한 무대였으며, 이러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의학적 사유 역시 발전해 왔다. 특히 중세 이슬람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의사이자 철학자인 이븐 시나(Avicenna)는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지역인 부하라 인근에서 태어나 활동했으며, 그의 의학적 사유는 이후 오랜 기간 중앙아시아 전통의학 및 유럽의 서양의학 형성 과정에서 이론적인 구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권 의약에 이븐 시나가 위대하게 언급되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철학적 업적과 맥락 때문이다. 다만 현대적 의미에서 우즈베키스탄 전통의학을 하나의 고정된 체계로 단정하기보다는, 여러 역사적 요소와 다양한 문명의 의학적 경험이 교류하고 융합되어 형성된 독특한 전통의학 문화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고 하겠다. 2. 한의약 기반의 전통의학센터와 국가 보건의료 관리 체계 이번 방문에서 확인한 중요한 변화는,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전통의학을 국가 차원의 관리와 제도 안으로 편입시키려는 방향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보건부 산하 전통의학센터는 이러한 정책 방향의 핵심 기관으로, 전통의학 교육과 활동을 일정한 기준 아래 관리하기 위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교육 이수 시간, 수료 체계, 활동 범위 등에 대한 논의는 이미 실행 단계에 들어가 있으며, 완성된 제도라기보다는 실행과 보완을 병행하여 발전시키는 구조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 한의약 분야와의 협력이 단순한 선언에만 그치지 않고, 향후 실제적인 보건 제도의 정비를 위한 핵심적 가치로서의 논의로 이어질 수 있다는 현실적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 Ⅳ. ‘배우고 싶다’에서 ‘함께 정비하자’로 전통의학센터 및 현지 관계자들과의 미팅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된 점은, 한국의 전통의학을 단순히 참고 사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배우고, 제도적으로 정비해 나가기 위한 보건의료체계 모델이라는 인식이었다. 이는 특정 치료 기술에 대한 관심을 넘어, 상호적인 교육·연수·제도 전반을 함께 논의하자는 적극적인 태도로 나타났다. 이러한 인식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오랜 기간 이어져 온 한국 한의사들의 의료봉사와 교류를 통해 축적된 신뢰 위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번 논의에서는 장기 과제와 별도로, 현행 제도 범위 내에서 지금 당장, 오늘부터 바로 실행가능한 내용들을 확인해서 실천해 나가자는 데 의견이 모였다. 우즈베키스탄 측은 실행 가능한 사안에 대해서는 속도감 있게 추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하며, 한국의 실무 추진 방식에 대한 이해를 표현했다. -
“현장에서 확인된 재택의료 수요, 한의 방문진료의 가치”홍석민 원장 (중랑구한의사회 이사/친절한홍한의원 대표원장) 기록이 말해주는 현장의 목소리: 환자가 기다리는 한의 주치의 초고령 사회의 파고 속에서 ‘방문진료’는 이제 우리 사회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보건의료의 핵심 과제로 떠올랐다. 최근 집계된 ‘2025년 중랑구 의료취약환자 방문진료 주치의제 활성화 지원사업’의 실적 현황은 우리에게 유의미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지난 한 해 중랑구에서 수행된 전체 방문진료 중 한의사들이 담당한 비중은 상당히 높게 나타났다. 주목해야 할 점은 단순한 건수가 아니라, 거동이 불편한 환자와 그 가족들이 한의 방문진료를 꾸준히 선택하고 의지하고 있다는 실질적인 ‘수요’의 흐름이다. 진료실 밖 현장에서 만난 환자들은 한의 치료의 효과뿐만 아니라, 환자의 전반적인 생활을 살피는 한의사 특유의 통합적 접근에 깊은 신뢰를 보내주었다. 이러한 기록은 우리 곁에 한의사 주치의가 꼭 필요하다는 현장의 절실한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환자가 원해도 높기만 한 ‘재택의료센터’의 문턱 이처럼 현장에서의 높은 선호도와 필요성이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보건복지부의 ‘장기요양 재택의료센터 시범사업’에서 중랑구를 비롯한 서울 대다수 지역에서 한의계가 비 선정된 현실은 진한 아쉬움을 남긴다. 정부는 재정 지출의 효율성을 중시하겠으나, 진정으로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장기적인 요양 비용을 절감하는 길은 환자가 체감하는 의료 서비스를 적기에 제공하는 것이다. 현장에서 확인된 환자들의 선택권을 존중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통합 돌봄이다. 보건복지부는 양의계 중심 행정에서 벗어나, 실제 현장에서 환자들이 누구를 필요로 하며 어떤 치료에 만족하고 있는지 그 실무적 수요를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할 시점이다. 결론: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공정한 정책 설계를 기대하며 한의사는 지역사회 돌봄의 핵심적인 한 축을 담당하고 있으며 환자 한명 한명을 통합적으로 돌볼줄 아는, 앞으로 이루어질 돌봄통합 사업에서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최고의 의료인력 자원이다. 보건복지부는 한의계가 재택의료센터 시범사업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국민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도록 선정 및 제도 개편을 전면 재고해야 한다. 공급자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 환자 중심, 현장 중심의 공정한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 지속 가능한 재택의료 시스템을 구축하는 진정한 해법이 될 것이다. 맺음말 : 한의 방문진료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한의재택의료 학회와 협회 등 수많은 원장님들께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묵묵히 환자들을 돌보며 한의사의 가치를 몸소 증명해 주고 계신다. 우리 한의계가 재택의료의 중심에서 더 확고히 자리 잡는 과정에, 현재의 헌신과 더불어 앞으로 이런 방향들이 조금씩 더해질 수 있다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선, 우리가 현장에서 이미 수행하고 있는 포괄적인 진료를 차팅과 통계에 온전히 담아내는 일이다. 우리 한의사들은 현장에서 근골격계 통증뿐만 아니라 불면, 소화기 장애, 정신 건강, 내과 및 부인과 질환 등 환자의 전신을 세심하게 돌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적극적인 상병 입력과 차팅으로 남지 않아 국가 통계에서 과소평가되는 현실이 늘 아쉽다. 우리가 행하는 다각도의 케어를 꼼꼼히 기록하여 한의약의 실제적인 기여도를 수치로 증명해 나갔으면 한다. 나아가, 혈액검사와 포터블 초음파 등 현대적 진단기기를 통한 보여주는 신뢰 강화에 힘을 싣는다면 방문진료 현장에서 더욱 탄탄한 데이터를 쌓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AI 기술의 도입으로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고, 정부가 지향하는 다약제 관리 및 타 직역과의 유기적인 연계에 앞장선다면, 한의계는 방문진료 분야에서 명실상부한 우위를 확고히 하며 통합 돌봄의 더 큰 주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교실 밖에서 만난 방제학, 1박2일간의 치열했던 처방 로드맵[한의신문] 17, 18일 이틀간 대한동의방약학회(회장 이원행)가 주관한 ‘동계 학생특강’이 개최됐다. 본과 2학년을 마치고 방제학 이론을 1년간 수강한 시점에서 맞이한 이번 강의는, 교실 안의 지식을 복습함과 동시에 임상의 언어로 재구성하는 소중한 기회였다. 석고제부터 대황·어혈제까지, 6명의 임상가들이 각자의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약물군별 처방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주셨고, 그 안에서 방제학이 실제 진료 현장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한의대생들의 뜨거운 열기 속에, 방학의 나태함은 사라지고 어느덧 배움의 열정만이 현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복습과 재구성: 석고·부자·감수제 강의 특강의 서막을 연 석고제 강의는 나에게 ‘시동 걸기’와 같았다. 원광대학교에서 운 좋게 이원행·김휘열 교수님께 방제학을 배우며 다져온 기초를 복습할 수 있어 반가움이 컸다. 하지만 강의는 단순한 복습에 그치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진조조 교재의 체계에 따라 작약감초탕을 간담삼초 계통 안에서 배웠으나, 이번 강의에서는 감수제 범주 내에서 감수반하탕과 함께 다루는 식의 새로운 목차 구성을 접할 수 있었다. 같은 처방이라도 분류 체계에 따라 그 의미가 얼마나 입체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 깨달으며, 방제학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사고의 체계임을 실감했다. 강렬한 이미지화: 황련·치자제 강의 “황련증 환자의 눈빛과 성격을 아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있는 이번 강의는 처방을 ‘사람’으로 치환하는 과정이었다. 우울과 분노 사이에서 황련과 치자를 어떻게 짝지을지, 환자의 눈빛과 설진, 성격까지 구체적으로 묘사되는 강의를 들으며 머릿속에는 환자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특히 현대 임상에서 심리·정신적 영역의 황련증 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통찰은, 방제학이 과거의 텍스트가 아니라 지금 진료실에서 마주하는 현실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광활한 내용의 내비게이션: 복령·시호제 강의 복령·시호제 강의는 방대한 지식을 한 줄기로 꿰어내는 시간이었다. 복령제가 적합한 환자군(HSP, 민감한 사람)의 큰 그림을 그린 뒤, 오령산을 중심으로 각 본초의 약리와 작용을 세밀하게 짚어주신 점이 좋았다. 특히 시호의 약리부터 외증, 체질, 약대, 그리고 처방으로 이어지는 일목요연한 구성은 학교에서 배운 방대한 양을 단시간에 효율적으로 정리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항염증과 항스트레스를 아우르는 시호제의 광활한 초원을 탐험하고 싶은 학생이라면 학회만의 이 독특한 해석을 꼭 접해보길 권하고 싶다. 집중력을 높이는 입체적 설명: 계지제 강의 둘째 날의 포문을 연 계지제 강의는 ‘입체적’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렸다. 강약 조절이 확실한 강의 스타일과 PPT 너머의 상세한 부연 설명 덕분에 집중도가 최고조에 달했다. 특히 상한론 64조문의 ‘기인차수자모심(其人叉手自冒心)’을 “가슴 밑에 베개를 대고 주무세요?” 혹은 “엎드려 주무세요?”라는 실제 문진 질문으로 치환해 설명해주신 대목에서 시야가 트였다. 학생 눈높이에 맞춘 팁들은 상한론의 높은 장벽을 허물어 주었고, 마치 선배가 곁에서 귀띔해주는 듯한 친근함을 느꼈다. 질환 간의 연결고리: 마황제 강의 마황제 강의는 단순히 ‘발한’이라는 키워드에 머물러 있던 나의 시야를 임상의 현장으로 확장해주었다. 슬관절통 환자가 내원했을 때 무엇을 먼저 확인해야 하는지 등 실전적인 질문들이 쏟아졌다.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체중과 슬관절통의 상관관계였다. 막연히 다이어트나 부종 치료제로만 생각했던 마황제가, 순환 부전으로 체중이 늘고 그 하중으로 무릎에 부담이 가는 환자를 치료하는 핵심 처방으로 연결되는 순간, 방제학이 단편적 증상 대응이 아닌 환자 전체를 보는 시스템임을 깨달았다. 마지막에 전수해주신 다이어트 처방의 Flow 정리본은 즉시 임상에 적용해도 손색없을 만큼 실용적이었다. 명확한 임상 적용: 대황·어혈제 강의 마지막 대황·어혈제 강의는 여성 질환과 생리통을 중심으로 명확한 감별 포인트를 제시했다. 대황의 포함 여부를 기준으로 환자의 상황을 구분하는 방식은, 임상 현장에서 마주할 수 있는 구체적인 선택지들을 머릿 속에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본초의 세밀한 정리부터 어혈제 사용의 실전 팁까지 아우르며 1박 2일의 대장정을 멋지게 마무리해주었다. 극대화된 밀도, 치열했던 1박 2일의 자극 방학의 휴식 속에 머물던 나에게 이번 특강은 거대한 지적 자극이었다. 이틀간 6개 테마를 압축적으로 소화하며 가장 크게 느낀 점은, 방제학은 결코 시험을 위한 암기 과목이 아니라 살아있는 ‘임상의 언어’라는 점이다. 6명의 원장님이 풀어낸 방식은 제각기 달랐지만, 그 중심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하나였다. 처방의 구성을 아는 것을 넘어 ‘어떤 환자에게,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꿰뚫어 보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특강에서 배운 임상의 디테일과 사고의 흐름은 앞으로 본과 3, 4학년의 실습과 훗날 한의사로서 마주할 수많은 환자 앞에서 소중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밀도 높은 배움을 선사해준 학회와 원장님들에게 감사를 전하며, 이 귀중한 경험을 끝없는 복습을 통해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 것을 다짐해본다. -
‘화양연화’, 우리는 그들과 달랐을까최순화 원장 (대구시 남구 보광한의원) 1. 봉인된 도시, 방콕의 골목에서 길을 잃다 영화 <화양연화>의 오프닝은 신경질적인 소란으로 가득하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는 인부들과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이삿짐들. 1962년 홍콩, 상하이에서 이주해 온 이방인들이 부딪히는 그 비좁은 복도는 사생활이 소멸된 ‘밀밀(密密)한 감시의 사회’를 상징한다. 왕가위 감독은 60년대 홍콩의 원형을 찾기 위해 태국 방콕의 차로엔 크룽 골목을 배회했지만, 그가 실제로 렌즈에 담고 싶었던 것은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질식할 것 같은 압박감’이었다. 수리진(장만옥)의 목을 단단히 옥죄는 높은 옷깃의 치파오는 그녀의 정조를 지키는 심리적 갑옷인 동시에, 밖으로 새어 나가려는 홍콩의 자유를 결박하는 정치적 결계다.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그녀의 20여 벌의 치파오는 억압된 리비도(Libido)의 전치이자,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라고 되뇌는 초자아(Superego)의 처절한 비명이다. 이 억압은 1962년의 홍콩이 본토의 거대한 그림자 아래서 느꼈던 정체성의 위기와 완벽한 평행이론을 이룬다. 2. 맥락 없는 역사, 멜로의 가면을 벗기다 영화 중반, 두 주인공의 감정선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삽입된 드골 장군의 캄보디아 입국과 환영 인파의 뉴스 화면은 이 영화가 지독하게 정치적인 미장센임을 폭로하는 균열의 지점이다. 1966년, 중국 본토의 문화대혁명 광풍이 홍콩의 좌파 폭동으로 이어지기 직전의 그 소란은, 개인의 사랑 따위는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짓눌려도 무방하다는 세계의 냉소적인 선언이다. 이 장면은 결코 맥락 없는 삽입이 아니다. 차우(양조위)와 수리진이 서로에게 끝내 다가가지 못하는 ‘용기의 부재’는 단순한 우유부단함이 아니라, 거대한 시대적 흐름 앞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직감한 자들의 집단적 무기력이다. <아비정전>의 아비가 ‘발 없는 새’로 떠돌다 비극적으로 추락했듯, 차우는 행동하는 대신 기록(무협 소설)하는 쪽을 택한다. 이는 검열의 눈을 피해 정치적 탄식을 사랑의 언어로 번역해야만 했던 예술가로서의 고육지책이자, 돌이킬 수 없는 홍콩의 운명에 대한 은유다. 3. 2001년의 파격: 붕괴된 신화와 잔인한 가정법 그러나 2025년 특별판에서 감독은 본편의 고결한 침묵을 깨뜨리는 파격적인 장면들을 배치한다. 지적인 신문사 기자였던 차우는 생계를 꾸리는 슈퍼마켓 주인으로 전락해 있고, 목 끝까지 단추를 채웠던 수리진은 머리칼이 흐트러진 채 목선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1962년에는 절대 허용되지 않았던 두 사람의 2001년의 키스 장면은 관객에게 형용할 수 없는 당혹감과 슬픔을 동시에 안긴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라는 수리진의 명분은 여기서 무너진다. 이는 감독이 던지는 잔인한 ‘가정법’이다. 2001년의 자유로운 문법으로 그들을 재배치함으로써, 1962년의 그들이 보여준 절제가 얼마나 처절한 ‘자기 처벌’이었는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이제 그들은 목을 풀어헤치고 자유롭게 키스할 수 있는 시대에 도달했지만, 역설적으로 그 시절의 숭고했던 ‘화양연화’는 영영 잃어버렸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신화가 현실로 내려앉는 순간, 홍콩의 우아했던 슬픔은 세속적인 회한으로 바뀐다. 4. 앙코르와트, 역사의 무덤에 묻은 “잘 가, 나의 홍콩”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앙코르와트 제2회랑. 수천 년의 시간을 견딘 석조 벽면에 차우가 비밀을 속삭이는 장면은 이 영화가 바치는 가장 숭고한 장례식이다. 그가 구멍에 대고 말한 것은 연인에 대한 뒤늦은 고백이 아니다. 그것은 “잘 가, 나의 홍콩”이라는 비통한 작별 인사다. 감독은 정치적 서사를 멜로라는 탐미적인 외피 속에 숨겼다. 검열당하지 않기 위해 사랑을 빌려왔지만, 그 속에는 1966년의 혼란과 1997년의 불안, 그리고 2046년의 종말이 켜켜이 쌓여 있다. 앙코르와트의 진흙으로 봉인된 구멍은 언젠가 역사가 그 비밀을 파헤쳐 줄 것을 기다리는 고고학적 유적이다. 결론: 부초 같은 무기력이 남긴 마지막 품격 결국 왕가위의 주인공들은 부초처럼 떠돌다 스러진다. 그들에게 행동할 용기가 부재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그만큼 홍콩의 가치를 훼손하고 싶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손대면 부서질 것 같은 그 시절의 공기, 그 시절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그들은 차라리 무기력한 관찰자(동자승)가 되기를 자처했다. <화양연화>는 한 남녀의 불륜담이 아니라, 우리가 가장 사랑했던 공간과 시간이 어떻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는지를 기록한 가장 탐미적인 보고서다. 2001년의 우리는 특별판의 키스신을 지금(2025~ 2026)보며 잠시나마 위안을 얻지만, 이내 앙코르와트의 구멍 앞에 선 차우의 뒷모습을 보며 비로소 깨닫는다. 우리의 화양연화는 이미 돌벽 속에 영원히 박제되었으며,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찬란했던 무기력을 애도하는 것뿐임을. -2000년 홍콩의 밀레니엄을 함께 했던 왕학감 원장을 기억하며- -
한의 방문진료, 재택의료 시대의 필수의료이자 ‘게이트키퍼’진료실의 벽을 넘어, 환자의 삶으로 뛰어들다 의료 기술의 눈부신 발전 이면에는 여전히 거동이 불편해 병원 문턱조차 넘지 못하는 의료 사각지대의 환자들이 존재한다. 필자는 이들을 직접 찾아가는 '일차의료 한의 방문진료'를 통해 진료실 안에서는 미처 보지 못했던 환자들의 진짜 삶을 마주하고 있다. 방문진료는 단순히 아픈 곳에 침을 놓는 행위를 넘어, 환자가 평생 살던 곳에서 존엄하게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돕는 ‘Aging in Place’의 실현이자, 한의사가 걸어가야 할 시대적 소명이라 확신한다. 현장에서 증명한 한의 방문진료의 독보적 경쟁력 친절한홍한의원은 지난해 중랑구 내 기초생활수급자를 대상으로 729건, 기타 지역 포함 총 1,385건의 방문진료를 수행했다. 이는 중랑구 내 한·양방 의료기관을 통틀어 가장 높은 실적이다. 특히 기존 재택의료센터로 지정된 타 의료기관들의 실적(A의원 66건, B의원 545건)을 크게 상회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장에서 경험한 한의학은 재택의료에 최적화된 독보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첫째, 도구의 유연성과 공간의 확장성이다. 침, 약침, 부항 등 전통적 수단은 물론 포터블 초음파까지 도입하여 장소의 제약 없이 의료 현장을 재현하고 있다. 둘째, 포괄적 주치의 역량이다. 한의사는 한·양방 의료 전반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환자의 통증뿐만 주거 환경, 영양 상태 등을 통합적으로 살피는 ‘게이트키퍼(Gatekeeper)’ 역할을 수행한다. 또한 혈액검사기를 활용하여 내과 질환 및 다약제 관리까지 관리가 가능하기에 포괄적 주치의와 연계에서 한의 방문진료의 진정한 가치는 증명된다. 디지털 전환을 통한 근거 구축: ‘기록의 힘’ 최근 WHO 글로벌 서밋에서 강조된 전통의학의 핵심 과제는 ‘과학화와 데이터 기반의 근거 구축’이었다. 필자 역시 한의 방문진료가 제도권 내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철저한 기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를 위해 본원에서는 녹음 기반 AI 차팅 시스템을 도입하여 진료 중 발생하는 대화와 판단을 실시간으로 데이터화하고 있다. 또한, 자체 방문진료 앱을 개발하여 모바일에서 환자 접수부터 상병 입력, EMR 연동까지 원스톱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러한 디지털 전환은 개별 한의사의 헌신을 넘어, 향후 재택의료 정책 설계와 연구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학술적·제도적 근거가 될 것이다. 제도적 장벽을 넘어 시스템의 중심으로 가장 높은 실적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장기요양 재택의료센터 시범사업’에서 서울 지역 한의원이 대거 배제된 현실은 뼈아픈 대목이다. 인력 채용과 팀 기반 사업 준비를 마쳤음에도 불투명한 심사 기준으로 현장의 노력이 온전히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멈출 수 없다. 한의 방문진료는 이제 주변적인 대안이 아니라, 만성질환 증가와 의료비 부담이라는 현대 보건 체계의 문제를 해결할 구조적 해법으로 재구성돼야 한다. 정부는 양방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성과를 내고 있는 한의사들이 재택의료 시스템의 주역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적극 활용해야 정부-환자가 윈윈하는 환경이 마련될 것이다. 환자가 기다리는 그곳에 한의사가 있다 방문진료 현장에서 “차라리 빨리 죽고 싶다”던 어르신이 치료 후 밝은 표정으로 “언제 또 오느냐”고 물으실 때, 필자는 한의사로서의 존재 이유를 찾는다. 한의 방문진료는 환자의 정서와 생활을 어루만지는 가장 따뜻하고도 강력한 의료 모델이다. 거동이 불편한 이웃들에게 한의 방문진료가 최고의 선택지가 될 수 있도록, 동료 한의사들과 함께 묵묵히 현장의 문을 두드릴 것이다. 정책적 관심과 사회적 지지가 더해진다면, 한의학은 초고령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든든한 의료 시스템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 확신한다. -
論으로 풀어보는 한국 한의학(312)김남일 교수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지난 2025년 12월19일 경희대학교 청강한의학역사문화연구소(소장 차웅석)에서 제6회 근현대한의학연구사 콜로키움 및 근대한의교육문화특별전으로서 ‘영소회통으로 침구종주 바로 세운 한의지사, 전광옥(田光玉, 1871〜1945)’이라는 주제로 세미나가 열렸다. 이날 주인공 田光玉(1871∼1945) 선생은 諸醫書에 博通한 한의학 교육자이다. 그는 황해도 태생으로 京城에서 醫生으로 활동하면서 한의학을 살리기 위한 활동을 전개한 인물이었다. 1904년 洪哲普의 노력과 고종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한의과대학 同濟醫學校의 敎授로 金永勳과 함께 선발되어 한의학 교육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15년 전국적인 학술단체인 全鮮醫會가 만들어진 이후 東西醫學硏究會 등 단체에서도 講師로 활동하면서 한의학 교육에 힘썼다. 1936년에 간행된 『忠南醫藥』 제5호에는 전광옥의 ‘治病要領論’이라는 제목의 글이 나온다. 『忠南醫藥』은 忠南醫藥組合이라는 충청남도에 조직된 한의계를 망라하는 단체에서 간행한 기관지다. 『忠南醫藥』은 1937년에 『漢方醫藥』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가면서 1942년까지 50호까지 간행되었다. 『忠南醫藥』 제5호에 게재된 전광옥의 ‘治病要領論’은 한의사가 병을 치료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기본 원칙을 정리한 것이다. 아래에 그 내용을 요약한다. 첫째, “治病必求其本” 즉 병의 근본을 치료하라는 것이다. 병은 標本의 구별이 있으니, 겉으로 드러난 증상(表)에만 집착하지 말고, 그 원인이 되는 기혈의 허실과 장부의 상태(本)를 찾아야 하며, 눈에 보이는 증상뿐만 아니라 은연 중에 숨어 있는 無形의 원인을 살펴야 훌륭한 의사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대소변 불통이나 인후 폐색처럼 위급한 상황에서는 먼저 증상(表)을 치료하여 급한 불을 끄고, 나중에 근본(本)을 치료하는 유연하다는 것이다. 둘째, 정기를 보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邪氣를 小人에, 正氣를 君子에 비유하여 설명했고, 사기를 몰아낼 때 도적의 괴수를 잡듯 핵심을 타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셋째, 陰陽氣血의 상호 의존 원리를 설명했다. ‘陽生陰’, ‘氣生血’이라는 키워드를 들어서 음과 양, 기와 혈은 서로 뿌리가 된다고 주장했다. 양이 부족하면 음이 생기지 않으므로 양을 보충해서 음을 키우는 것과 기를 보해서 혈을 안정시키는 원리를 설명했다. 痰의 치료에 있어서도 痰은 火와 氣의 움직임에 따라 발생하므로 단순히 痰을 제거하려 하기보다 火를 내리고 氣를 다스리는 것이 기본이라고 했다. 넷째, 겉모습과 반대로 치료하는 反治法의 지혜를 터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것으로서 ‘塞因塞用’, ‘通因通用’의 두가지를 예를 들어서 설명했다. 속이 막힌 듯해도 허해서 생긴 것이면 보하는 약을 쓰고(塞因塞用), 설사를 해도 열이 심한 것이면 오히려 내려주는 약을 쓰는(通因通用) 등 병의 실질에 맞는 처방을 강조했다. 다섯째, 한의사의 소명으로서 三世之書에 정통해야 함을 강조했다. ‘三世’의 의미에 대해서 그는 鍼灸(黃帝), 本草(神農), 脈訣(岐伯)의 세 가지 학문에 대한 능력이 갖춰져야 함을 뜻한다는 해석을 가하고 있다. 그는 맥으로 병을 살피고 약으로 다스리며 침으로 질병을 쫓아야 한다고 하였다. -
신미숙 여의도 책방-72신미숙 국회사무처 부속한의원 원장 (前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 [편집자주] 『신미숙의 여의도 책방』은 각 회마다 1개의 키워드에 5권의 도서를 추천하는 형식으로 이어갑니다. “저속노화, 고속으로 정책화해 시민들 건강해지게 도울 것.” 이는 저속노화 창시자가 서울특별시 초대 ‘건강총괄관’이라는 비상근직 3급 국장직위의 시청 공무원으로(한달에 2회 이상 출근, 급여는 336만원) 2025년 8월1일 출근하며 언론사에 밝힌 당찬 포부였다. 모든 분야가 속도 경쟁이기는 해도 노화라는 단어 앞에 저속이니 고속이니 단어가 붙어서 하나의 현상 혹은 열풍이 될 줄은 몰랐다. 물론 나 또한 그 유행어의 물결을 외면하지 못하고 2023년 3월 의사 정모씨의 책을 인용하며 “한의학은 고령친화적인가?”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저속노화’라는 생소했던 네 글자는 왠지 오래갈 것 같았다. “어르신들 약 복용 중복해서 하지 마시라”는 대학병원 노년내과 의사다운 건전한 메시지와 함께 탄생한 단어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그가 햇반 껍질에, 편의점 도시락 커버에, 렌틸콩 포장지에 그리고 두유 박스에 저속노화 광고모델로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했을 때 호사가들의 입방아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부적절한 관계 어쩌고 저쩌고가 중요한게 아니다. 일이 터지고 나니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숨겨왔던 의심의 눈초리를 맘껏 드러냈다. “렌틸콩만 넣으면 라면도 저속노화 메뉴인가요?”, “잡곡식만 하면 만병이 다 낫나요?”, “저속노화, 알고보니 저속한 노화였다”, “저속노화의 고속나락” 등의 언어유희적 댓글 수만개를 생성시킨 후 저속노화 창시자는 2026년 1월11일, 일단은 활동을 멈춘 상태다. 시대착오적 단어로까지 추락한 상태는 아니지만 당분간 ‘저속노화’ 타령은 들리지 않을 것 같다. 대신 유사한 개념의 또 다른 힙한 신조어가 나타나 새로운 건강 유행을 선도할 것이고, 그 유행 또한 잠시동안은 영원할 것 같은 생명력을 발휘하다가 다양한 혹은 치명적인 결함을 드러낸 후 초고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수십년 전 도올 선생님께서 “띄우느라고 한 번 써 먹고, 밟아 없애느라 또 한 번 써 먹는다”를 언론의 악질적 취미로 정의하신 바 있다. 대유행의 협곡 사이에서 눈치 빠른 자들은 늘 크게 챙기고 빨리 빠진다. 이것 또한 업계의 정해진 수순이다. AI기술의 발전…항노화 아닌 탈노화 시대로 접어드나? ‘저속노화냐? 고속노화냐?’로 1월의 글제를 정하고 보니 비슷한 내용을 자주 다룬 느낌이다. 아니나 다를까 노인의 돌봄 문제로 “힘이거나 짐이거나”를 썼고, 아버지 기일에 맞추어 “2년 전 그 날을 떠올리며”라는 제목으로 죽음에 대한 책들을 리뷰했었다. 이번에는 돌봄이나 죽음이 아닌 노화가 주제이니 최소한 자기복제는 되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글솜씨가 애매한 자의 부끄러운 몸부림이다. 올해 초 친정 엄니께서 팔순을 맞이하셨다. 정기적으로 의사를 만나야 하는 중증 질환도 없으시고 따라서 복용하는 약도 없으시다. 98세를 사신 외할머니의 DNA를 물려 받으셨고 그 누구보다도 긍정적인 마인드와 부지런한 생활습관으로 자기관리를 잘 해 오신 증거이기도 하다. 당신이 건강한 팔순이시면서도 TV에 등장하는 더 건강한 100세 노인들을 다룬 뉴스나 다큐를 유독 좋아하신다. 며칠 전에는 현재 5선 국회의원이신 83세 박모 의원님이 향후 국회의장을 꿈꾸고 계신다는 뉴스를 공유해주시며 엄니께서 덧붙이신다. “노인들 다루는 뉴스 그 어디에 좋은 거 있더냐? 오래 살아있는 것 자체를 문제인 것처럼 다루는 게 대부분이고 뉴스 화면에 나오는 노인들은 늘 병원 대기실에 앉아있거나 요양병원에 누워있더라. 그래서 우리 나이에 저렇게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 보면 그저 부럽고 무조건 반갑더라. 저렇게 열심히 일하는 노인네도 있으니 평범한 나도 더 힘을 내서 바쁜 척이라고 해야지 싶다.” 다짐을 내보이시던 엄니의 결론은 그 분이 후기 국회의장 되시는 데에 찬성 한 표라고 하셨다. 일론머스크와 피터딜이 내놓은 AI의 전망에 의하면 올해부터 2028년 사이에 인간 한 명의 지능을 완전히 넘어서는 AGI(범용인공지능)가 등장하고 화폐의 가치나 저축의 개념이 흔들리며 화이트칼라 상당수가 AI로 대체되는 등 교육과 고용 시장을 포함한 근본적인 경제 구조가 폭발적으로 바뀔 거라고 한다. 고용에 있어서도 AI를 활용하여 성과만 낸다면 20대든 50대든 무관하게 채용이 가능하므로 나이도 무의미해질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최근 20대들의 신입채용을 줄이고 있다. AI 덕분에 항노화가 아닌 탈노화의 시대로 접어든 기분이다. 저속노화냐 고속노화냐의 건강유지 방법의 탄력적 선택 대신 탈노화가 가능한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의 비가역적 분리가 이미 시작되고 있다. AI로 풀장착한 노인은 영에이티로 조롱받는 대신 노인 아닌 노인, 영원히 사는 갓파더로 추앙받을 날이 멀지 않았다. 『노인은 없다』(마크 아그로닌, 한스미디어, 2019년 1월) - 늙음이 문제라면 나이듦은 해결책이다. - 최고의 의료 서비스와 보살핌을 받더라도 기본적인 활동에 제한을 받으면 삶의 기쁨도 줄어든다. - 노인이라는 허상을 지워 내고 보면, 그 안에는 깊이 있고 다양하며 생명력 넘치는 노년의 문화가 존재한다. - 나이듦에 관한 긍정적인 자기 인식이 자리 잡힌 사람들은 부정적인 인식이 있는 사람들보다 생존율 중위값이 7.5년 더 길었다. - 노화가 진행되는 과정 중에도 높은 목적의식, 성취의식이 존재한다. - 나이가 들면 우리는 모두 육체적, 심미적으로 퇴화한다. 우리 대부분은 나이가 50대 이상이 되면 뇌의 능력이 바뀐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나이듦에 관하여』(루이즈 애런슨, 비잉, 2020년 2월) - 서양의학은 오늘날을 만성질환 전성시대 혹은 고령화 질환 유행시대라 정의한다. 그러면서도 노년층과 노인의학에 대한 실질적 지원은 만년 2순위다. - 안티에이징은 노인 집단과 노화의 특징을 거부하고 부정한다는 면에서 상당히 시대착오적인 표현이다. - 생물학 외의 다른 눈은 모두 감아 버린 현대 서양 의학은 큰 그림의 일부만 보고 있다. - 20세기 들어 노화와 임종이 마치 반드시 의학적 조치를 취해야 하는 사건인 것처럼 인식되면서, 의학은 스스로를 죽음이라는 절대악에 대항하는 무기라 자처해 왔다. - 의학은 인간이 자연스러운 생의 단계를 보다 편안하게 넘기도록 돕는 사회적 수단이어야 마땅하다. - 현재 최고령 세대는 어떤 의료 행위를 제안받든 최우선 관심사는 통증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 노년기는 길고 개인차가 있으며 상대적이다. 현대인 대부분이 심신이 현저히 쇠하기 전에는 노인 호칭을 극구 거부한다. - 오늘날의 의료 체계와 그 바탕 패러다임에는 무언가가 빠져 있는 게 틀림없다. 중대하고 결정적인 그 무언가가. 『노화의 정복』(로즈 앤 케니, 까치, 2023년 7월) - 사실 생물학적 노화는 아주 일찍 시작된다. 30대에 접어들면 노화 과정이 세포 안에서 이미 확실하게 자리를 잡는다. - 몇몇 연구들을 통해서 질병 상태와는 상관없이 ‘젊다고 느끼는 만큼 젊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인식 자체가 다른 요인들보다 더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 노화 과정의 속도를 7년만 늦추어도 각각의 나이에서 발생하는 질병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 - 사회적 참여와 인간관계는 혈관질환을 감소시키고 이것이 다시 치매를 발생시키는 혈관적 원인을 줄여준다. 사회적 접촉이 뇌를 보호해주는 이유를 이것으로 추가 설명할 수 있다. - 스트레스에 예민한 사람은 코르티솔 수치가 만성적으로 높아져 치매의 위험을 2배로 증가시킨다. - 50세부터는 매년 근육량이 줄어든다. 우리 몸은 신체활동을 위해서 디자인된 수렵채집인의 몸이다. 『왜 늙을까, 왜 병들까, 왜 죽을까』 (이현숙, 21세기북스, 2024년 9월) - 65세 이상 남성에서는 전립선암의 발병률이 80% 정도 된다. 이런 암의 특징은 나이가 들수록 매우 느리게 진행된다는 것이다. - 한의학 서적에서 암을 기록한 것은 <황제내경>이다. 이 기록이 기원전 3세기에 나타났으니 서양의 기록보다 100년 이상 빠른 것이다. 동양에서는 수술을 하지 않았고 서양에서는 17세기에도 수술을 했다. - 죽는 것이 아니라 대사를 더 하지 않고 에너지도 아주 조금만 만들어내면서 세포 분열을 안 하는 현상이 노화의 가장 기본적인 세포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 텔로미어의 길이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구조가 중요하다. 이 구조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 어쩌면 우리 생체 시계를 늦추는 방법일 수도 있겠다. - 텔로미어가 짧아진 세포에서는 염증 반응이 나타나고 면역 세포가 노화한다. - 데이터를 바탕으로 타깃을 할 수 있는 정보를 얻어내는 것, 이게 바로 개인 맞춤형 의학으로 가는 기반이 될 것이다. - 과학에서는 진리가 승리한다는 사실. 어떤 비밀도 그 메커니즘을 규명하면 인류에 이바지할 수 있다. 『과속 노화의 종말』(박민수, 허들링북스, 2025년 4월) - 노화는 시간이 흐르면서 유전자 변화가 쌓여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인슐린, 코르티솔, 성장호르몬 이 세 가지 호르몬은 노화 속도를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존재이다. - 통계적으로 암을 빼면 만성 질환으로 사망하는 원인 중에서 혈관 질환이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 백세 건강의 초석은 단맛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에서 시작된다. 정제당의 끝판왕인 밀가루는 담배의 니코틴, 술의 알코올과 비견될 정도이다. - 과일을 주스 형태로 섭취하는 것은 최악의 선택이다. 과일 속 섬유질은 파괴되고 당은 액체 형태로 농축되어 우리 몸에 빠르게 흡수된다. - 최근 오래 앉아있는 생활이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한 연구가 쏟아지고 있다. 우리 몸은 원래 서서 움직이도록 설계되었다. - 커피와 같이 카페인이 함유된 음료 외에도 만성 탈수를 유발하는 음료들이 있다. 탄산음료와 과일주스, 술이 그것이다. - 노화와 장수를 결정짓는 다섯 가지 핵심축은 5M이다. 마이크로바이옴(Microbiome), 멜라토닌(Melatonin), 마이오카인(Myokine), 마인드(Mind),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 5가지가 제대로 기능하고 균형을 이룰 때, 우리는 나이 먹는 속도를 늦추고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 여러 이유로『흑백요리사 2』를 외면하고 있다가 최종 우승자가 최강록님이라는 뉴스를 보고서야 최종편을 시청했다. 두 아이들이 중고생이었을 때, 간식이나 야식을 먹을 때 자주 보던 유투브 채널 중 하나가 『마스터 쉐프 코리아』 시리즈였다. 그 중에서도 시즌2 우승자인 요리사 최강록에 대한 아이들의 팬심이 신기했다. 그를 열렬하게 추앙한다기보다는 ‘그냥 요리하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사람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묘한 아저씨’라고 표현했다. 그 매력이 궁금하여 나도 같이 따라 보다가 자연스럽게 그의 팬이 되었다. 어메이징한 달변가들이 장악한 예능판에서 초단위, 분단위, 월단위로 유행어와 유행식당의 트렌드가 바뀌는 초스피드 대한민국에서 13년만에 나간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서 다시 1등을 차지할 꿈을 꾸기 아니 그것을 현실로 이뤄내기의 난도는 상상불가이다. 그는 『마쉐코2』에서 우승을 하고도 바로 속도 전쟁에 뛰어들지 않고 물 들어오려는 순간 노를 버렸다. 그만의 파격과 역설로 오늘날 더 큰 성과를 냈을 수도 있다. 고문에 비유되는 끈질긴 재료 손질과 징그러울 정도의 성실이라는 근성의 초심을 유지했다는 점이 기본값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었던, 요리가 아닌 사람에게 감동을 받은 대중들은 13년 전보다도 더 진지한 축하를 보내고 있다. 노화 완화를 위해 선택할 수 있는 현명한 태도는? 세계 최고령 현역 스프린터로 활약 중인 이탈리아의 엠마 마젠가(Emma Mazzenga, 1933년생)님의 기사를 읽었다. 고령임에도 체력과 근력을 유지하며 다수의 세계기록을 경신하고 있는 마젠가님의 신체적 특성을 노화 연구자들이 장기적으로 추적 중이라고 한다. 연구진은 18개월 간격으로 그녀를 검진하며 노화 진행도를 관찰했는데, 최근 검사에서도 심폐 지구력과 근육의 미토콘드리아 기능이 50대 일반 성인 수준, 근육 세포 구조와 회복능력은 20대 건강한 단거리 선수와 유사하다는 평가가 나왔다. 장수와 건강 유지의 비법에 관한 질문에 남긴 한결같은 대답은 다음과 같다. “중요한 건 계속 움직이는 것이다. 절대 멈추지 않는 것이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다.” 항노화든 탈노화든 노화 완화를 원한다면, 저속노화의 추구보다는 고속노화의 회피 방법을 찾는 편이 더 빠를 것 같다. 굳이 속도로 표현하자면 저속으로 생존하자는 것이다. 저공 비행으로 유급만 면하고자 장학금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국시합격만이 목표였던 많은 한의대생의 소박한 소망과 유사하다. 단거리 도전을 시작했었던 53세 때부터 40년째 주 3회, 회당 1시간 정도의 운동루틴을 한 번도 중단한 적 없는 93세 마젠가 할머니의 끈기를 실천하다 보면 올 한 해도 어쩌면 해피엔딩이 가능할 것 같다. 사소해 보이는 일상이라도 그래서 커다란 성공은 못 이루고 끝나버릴 것만 같은 불안한 예감이 자주 엄습해 오더라도 멈추지 않고 저속으로라도 계속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특별하지 않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시도할 수 있는 현명한 삶의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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