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정 씨(가명·29)는 수원 소재 병원에서 3교대를 하며 중환자를 돌보는 간호사였다. 2019년 첫 출산 후 육아휴직을 지내는 동안 전직을 결심했다. 돌봄이 필요한 아이를 두고 밤낮없이 교대근무하기 어렵다고 생각해서다. “엄마니까 당연히 돌봄을 전담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유급 노동을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출산 후 경력이 중단돼 실의에 빠진 친구들을 자주 봐 왔기 때문이다. 교육공무원으로 전직하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 온종일 책만 들여다봐도 합격할까 말까 한 직렬이었다. 출근하지 않으니 열심히만 하면 전직 준비와 육아 모두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중환자실에 근무할 때는 3교대로 퇴근할 수 있었지만, 갓난아기 보는 일은 퇴근이 없었다. 24시간 대기조였다. 김 씨는 한밤중에도 자주 깨서 우는 아이에게 졸린 눈을 비비며 젖을 물렸다. 젖을 뗀 후에는 이유식을 직접 만들어 하루에 다섯 끼니 이상을 먹였다. 아기가 자는 시간에는 설거지, 청소 등 집안일을 했다. 온전하게 쉬는 시간은 3~4시간 정도에 불과했다. 마음은 바쁜데 공부할 시간이 좀처럼 나지 않았다. 자신의 먹는 시간, 자는 시간을 줄이기로 했다. 끼니는 이유식 만들고 남은 밥을 김에 싸 먹는 식으로 해결했다. 아이가 자는 시간에 졸음을 쫓으며 책을 들여다봤다.
이런 생활을 1년가량 했더니 가슴 두근거리는 증상이 나타났다. 주변 사물이 가끔 아지랑이처럼 흔들리기도 했다. 6개월 뒤, 그는 아이를 들어 올리다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2시간 뒤 집에 들어온 배우자는 깨워도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깊이 잠든 아내를 발견했다. 부모에게 털어놨더니 고향인 경북 포항 소재 한의원에 가보라고 했다. 배우자는 그제야 자신을 탓했다. 물리치료사인 그는 주 6일 일했고 야근할 때도 많았다. 집에 와서 아이 목욕을 시키는 정도만 육아를 도왔다. “남편은 제 일상을 모르니 제가 어느 정도로 힘든지 몰랐다고 하더라고요.” 양가 부모 모두 부산, 포항 등에 거주해 도움을 청하기 어려웠다.
김 씨는 한의원에서 ‘화병’ 진단을 받았다. 수면·식사의 양과 질이 모두 부족해 면역력이 무너졌다고 했다. 심장 위쪽의 피가 막혀서 고이니 손발까지 차가워지는 등 순환 장애도 있다고 했다. 김 씨를 진료한 변영휘 이동한의원 원장은 숙면과 혈액 순환을 돕는 한약을 처방했다. 평소 밥을 규칙적으로 먹고 자는 시간도 일정해야 한다는 조언도 했다. 그때부터 김 씨는 아이를 배우자에게 맡기고 밤에 푹 자려고 노력했다. 음식도 식은 밥 등 찬 성질의 음식보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음식 위주로 먹었다. 김 씨의 증상은 6개월 만에 호전됐다.
◇여성 화병 환자, 남성보다 4배 많아
대구광역시에 사는 이나연(가명·35) 씨는 지난해부터 일곱 살배기 아들의 하원 시간인 오후 3시만 되면 목덜미가 뻣뻣해지고 머리가 아팠다. 아들이 유치원 교사도 인정하는 ‘순한 기질’의 아이인데도 그랬다. 그는 하원길에 시장에 들러 반찬거리를 사고, 놀이터에서 아이와 놀다가 들어와 저녁을 준비했다. 개인 사업을 하는 배우자가 오후 8시께 귀가하면 또 밥을 차린 후 아이를 씻기고 재울 준비를 했다. 이 씨는 아이와 배우자를 돌보는 데서 보람을 느꼈다. 하지만 출산 전까지 연봉 상승 등으로 능력을 인정받을 때와 견줄 수 없는 헛헛함이 있었다. 반면 배우자는 결혼 후 론칭한 브랜드 사업이 성공해 많은 돈을 벌었다. 업계의 좋은 평가도 잇따랐다. 브랜드 론칭 기념식을 하고 돌아온 날이었다. 배우자가 이 씨에게 물었다 “결혼 이후 자기는 뭘 얻었어?” 이 씨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배우자 몰래 눈물을 훔쳤다.
이 씨는 아이를 유치원에 보낸 시간에 집안일을 했다. 집안일과 육아에 매일수록 자기 자신이 없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활력을 얻기 위해 택시로 30분 거리에 있는 공동육아센터를 이용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공허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양가 부모나 여동생에게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아이를 맡기고 악기를 배우는 등 숨통을 트기도 했다. 코로나19가 극성을 부리던 올 초에는 아이와 부모, 이 씨가 한꺼번에 코로나19에 걸렸다. 이 씨는 홀로 자가 격리와 치료, 아이 돌봄과 치료를 도맡았다. 격리 해제 후 3개월이 지나도록 숨 가쁨, 가슴 답답함, 혓바닥이 화끈거리는 증상 등이 이어졌다. 시부모는 자신들이 다니는 한의원에 가보라고 했다. 이 씨가 사는 곳에서 1시간 30분 떨어진 창원 소재 한의원이었다. 아이를 두고 치료받는 일이 내키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절박했다. 몸·마음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면 뭐라도 하고 싶었다. 어렵게 찾은 한의원에서 이 씨는 ‘화병’ 진단을 받았다.
이 씨를 진료했던 한진근 대성한의원 원장은 “이 환자는 육아·가사 등 전통적으로 여성이 가정에서 맡는 역할을 집중 수행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 등 부정적인 감정을 경험했다”며 “이런 감정은 소화불량, 명치 통증, 두근거림, 혀가 화끈거림, 목·어깨·허리 통증 등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스트레스가 환자의 자율신경계통에 영향을 준 결과, 혈관이 수축하고 장 기능이 약해져서 복근과 척추 근육 약화, 근육경직, 팔다리 저림 증상까지 함께 나타난 것이다.
가정에서 가사·돌봄을 전담하는 여성들의 몸·마음 건강이 위협받고 있다. 물심양면으로 대가 없는 노동을 제공하다 한계에 부딪혀 박탈감, 우울감 등 부정적 감정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통계청의 ‘가계생산 위성계정’에 따르면 무급 돌봄(가사) 노동에는 영·유아·청소년 뿐만 아니라 장애 유무와 무관한 성인을 돌볼 때 제공되는 모든 행위가 포함된다. 지난해 ‘코로나19와 돌봄경제: 지속가능한 돌봄사회로의 전환’ 콘퍼런스에서 서울대 국제이주와 포용사회센터 전지원 책임연구원이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코로나19 기간 동안 휴원, 휴교에 따른 자녀돌봄 증가로 코로나19 이전보다 더욱 우울감·피로감·스트레스를 느낀 여성은 56.4%·78.7%·72.9%로 같은 항목에 대한 남성의 응답인 39.7%·64.4%·58%보다 높았다.
무급 돌봄 노동자들은 애초 보상을 원하진 않았다. 하지만 행위의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 구조 속에서 우울감과 박탈감을 느껴 화병을 얻기도 했다. 한국한의약진흥원에서 발간한 ‘화병 한의임상진료지침’ 2021년 개정판에 따르면, 화병은 우울·불안·분노 등 부정 정서 중 분노로 발생한 신경정신과 질환으로 한국 고유의 질병 개념이다.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 상으로는 ‘U222’ 코드에 해당하며 국내 유병률은 4.2~13.3%다. 보건의료빅데이터 개방시스템에 따르면 2019년 12월부터 2021년 12월까지 화병 상병코드의 연평균 건강보험 청구건수는여성 4215건, 남성 1129건으로 여성이 남성의 4배가량 된다.
◇전 생애에 걸쳐 이어지는 무급 돌봄 노동
화병을 앓는 무급 돌봄 노동자는 육아 집중기에 있는 양육자뿐만이 아니다. 신경정신과 질환을 주로 보는 주성완 해아림한의원 원장은 “자폐스펙트럼이나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코로나19 확산을 계기로 한 등교 거부 등 자녀 요인의 화병 발현이 증가하는 추세”라고 분석했다. 기존에는 장애가 있는 자녀나 은퇴한 배우자, 양가 부모 돌봄 등이 원인인 50대 유자녀 기혼 환자들이 많았다. 대한한방신경정신과학회가 2010년 연구한 ‘화병역학연구 자료를 기반으로 한 화병 환자의 특성’을 보면, 경희대 등 전국 9개 대학부속한방병원에서 화병 관련 증상으로 진료를 받은 대상자 151명 중 50대가 68명(45%)으로 가장 많았다.
서울시 동작구에 거주하는 박정자(56·가명) 씨는 장남인 배우자, 시동생들과 함께 살며 2010년부터 2020년까지 시가의 살림을 책임졌다. 거리가 멀어 시동생도 찾지 않는 포항 소재의 시가에 2주마다 한 번씩 찾아갔다. 이 곳에서 홀로 남은 시모의 식사를 챙기고 집안일을 하며 시모를 돌봤다. 타계한 시부의 제사 준비도 박 씨의 몫이었다. 시동생들은 그런 박 씨에게 고맙다는 말도 없고, 제사 참석 연락에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군부대에서 밥을 짓는 봉사활동을 자주 하는데요. 여기서조차 아들 같은 군인들이 제게 연신 고맙다고 해요.” 억울하고 속상하지만 박 씨는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건 지난해부터였다. 시모의 병환이 깊어져 임종을 앞뒀을 때였다. 시모는 자신과 박 씨만 알고 있던 비밀을 시동생들에게 누설했다. 박 씨는 난임 탓에 자녀를 입양해서 친자식처럼 키우고 있었다. 박 씨는 수치심을 넘어 배신감, 분노 등의 감정을 느꼈다. 시모가 별세한 후에는 숨쉬기 어려운 느낌과 두통, 무기력함 등의 증상이 쏟아졌다. 살고 싶어 찾은 한의원에서 ‘화병’ 진단을 받았다. 그를 진료한 홍순상 한음한방신경정신과 한의원 원장은 “화병 환자들은 대체로 사회 속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하는 경향이 있다”며 “자신이 원해서 한 일이었지만 결국 박탈감, 공허함 등의 모순된 감정을 느끼며 병을 키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양희(64세·가명) 씨는 배우자와 함께 지내며 다투는 날이 늘어났다. 몇 년 전 퇴직한 배우자는 집안일을 거의 해 보지 않아 씻은 쌀을 가스레인지에 얹히는 일도 힘들어 했다. 김 씨는 스스로 끼니도 못 챙기는 배우자가 안쓰러우면서도 못마땅했다. 맞벌이하는 아들 부부의 세 살배기 손주를 평일 저녁 시간마다 돌봐주며 체력까지 바닥났다. ‘일단 살고 봐야지’ 하는 마음에 조심스레 아들의 돌봄 부탁을 거절한 적도 있었다. 그런 그에게 아들은 박 씨보다 자신의 장모가 더 낫다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젊은 시절을 다 바쳐 키운 아들이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박 씨는 두통과 가슴 답답함을 느꼈고, 눈물도 왈칵 쏟아졌다. “평생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왜 여전히 마음 편하게 쉬지 못하는 걸까요.” 그의 상병코드 역시 화병이었다.
김씨를 진료한 이정환 혜민서한의원 원장은 “화병으로 진단받는 환자 중 간병·양육 등 돌봄노동으로 내원한 분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다”며 “시기에 따라 다르지만 최근에는 하루에 한 명 정도는 내원하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주성완 해아림한의원 원장은 “화병이 주로 가족 등 개인 관계의 불화에 원인이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무급 돌봄 노동이 화병에 미치는 영향은 적지 않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분석했다.
강동경희대병원 한방신경정신과에서 전공의를 지냈던 곽희용 원장 역시 “돌봄 노동의 수혜자인 영유아나 치매 어르신 등은 소통이 안 되거나 욕구를 해소해줘야 하는 대상”이라며 “돌봄 노동이 위주가 되면 스트레스를 원활하게 해소할 창구를 마련하기 어려워 화병 유병률이 높을 수 밖에 없다”고 했다. 미국 인디애나대의 에밀리 Q. 아호넨 교수가 2020년 국제학술지 ‘비판공중보건’에 투고한 논문에 따르면, 50~79세 미국 여성 6만8615명 중 유급 노동만 수행한 여성은 무급 노동을 함께 수행한 여성보다 심혈관계 질환이 유의미하게 낮았다.
◇돌봄은 ‘개인 문제’ 인식 탓 의료기관 찾지 않아…돌봄 사회화 정책 절실
무급 돌봄 노동자들은 억울함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이야기가 밖으로 드러나길 원하지 않는다. 홍순상 원장은 “화병은 기본적으로 스스로를 억압해서 나타나는 질환이기 때문에 환자 본인이 치료 등 적극적인 대처를 하지 못 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한 발 더 들어가면 가사나 돌봄 등이 으레 가정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사회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한진근 대성한의원 원장은 “근본적으로 취업 이후에도 육아, 가사 등을 함께 감당해야 하는 이중 부담 구조나 유자녀 여성의 취업 활동이 제한되는 상황을, 지역사회의 공동 육아 등 시스템으로 제도화하는 국가정책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무급 돌봄 노동자가 화병 등 의학적 조치가 필요한 단계에 진입하기 전에 ‘돌봄의 사회화’를 강화해야 하는 이유다. 여기에는 무급 돌봄 노동의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거나, 돌봄에 드는 비용을 사회가 공동으로 부담하는 등의 노력이 포함된다.
영국 지방정부는 2014년 제정된 ‘돌봄법’(The Care Act 2014)에 따라 무급 돌봄 노동자에게 휴식시간 제공이나 집안일·장보기 등 생활 부문, 집수리 등 거주 부문, 정서 부문, 교육 및 동아리 등의 모임 자유, 운동 등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부문, 변호 부문 등을 지원한다. 스웨덴은 아동보육에 대한 비용이 월 최대 18만원을 넘지 않도록 하는 보육료 상한제를 도입하고 있다. 이 제도 하에 만 5세까지 다닐 수 있는 아동보육기관 ‘푀르스콜라’를 오전 6시부터 오후 7시까지 운영한다. 부모의 다양한 근로형태를 고려해 일·가정 양립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오후 3~4시면 대체로 보육기관에서 하원하는 분위기인 한국과 대조적이다.
무급 돌봄 노동의 가치를 연구해온 윤자영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무급 돌봄 노동에 사용하는 시간과 성별 간 차이를 생활시간조사 등으로 꾸준히 추적하고, 이를 바탕으로 무급 돌봄 노동을 지원하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며 “동시에 남성이 더 많은 무급 노동을, 여성이 더 많은 유급 노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밝혔다. 성수현 한국한의약진흥원 의료정책팀장은 “돌봄 노동자에게 발생하는 증상, 질환 등 의료 차원의 문제에도 지자체가 대응할 수 있도록 촘촘한 통합돌봄체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세명대 기획탐사 디플로마' 교육과정의 일환으로 작성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