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남일 교수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李馨益(조선 인조년간)은 조선 침구술의 전통을 잇는 鍼灸專門醫의 한사람이었다. 그는 충청도 대흥 출신으로 인조 10년(1632년)에 內醫院의 추천으로 서울에 초청되어, 인조의 질병을 침구술로 치료했다. 그는 번침술(燔鍼術)을 사용했는데, 이 기술은 그 당시의 鍼灸醫들이 많이 사용한 방법은 아니었기에 당시의 朝士들 중에 이 기술은 邪術이라 하여 수차례에 걸쳐 그 죄를 묻고자 하였으나, 인조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계속 그 요법으로 인조의 질병을 다스렸다.
이형익의 치료 기록 가운데 『承政院日記』에서 흥미로운 자료를 발견했다.
“○藥房都提調 金瑬, 提調 崔鳴吉, 副提調 李景憲 등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臣等이 入侍한 醫官들의 말을 들어보니 임금께서 中氣가 極虛하여 駝酪粥을 계속해서 드시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春間에 傳敎를 停止하였기에 내일부터 다시 올리고자 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이에 알겠다고 대답했다(『承政院日記』 1633년 인조 11년 10월 5일). ○午時에 임금께서 養和堂에서 침을 맞았다. 藥房提調 崔鳴吉이 閤門 밖에서 承旨 李景憲, 編修官 柳昌文, 假注書 尹瀁, 記事官 兪榥이 窓外에서 入侍하였다. 御醫 申得一, 鍼醫 李馨益, 柳連이 入侍하여 執鍼하였다. 李馨益은 間使左右二穴, 人中一穴, 手大指端(일곱글자 빠짐) 大淵二穴, 申脈二穴, 風(몇글자 빠짐), 承漿一穴, 大陵二穴, 上星一穴, 曲池二穴, 內庭二穴 등에 침을 놓았다. 申得一이 내일에 또 계속 침을 맞으시겠냐고 묻자 임금께서 하루 사이를 두고 맞겠다고 말씀하셨다(『承政院日記』 1633년 인조 11년 10월 6일).”

위의 기록은 1633년 10월 6일 인조11년 인조에게 침 치료를 했던 치료 내용을 적은 것이다. 李馨益은 번침술이라는 치료법으로 당시 유명했던 침구전문 어의였지만 위에 그가 사용한 혈자리에 번침술을 사용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사용된 치료혈만 가지고 본다면 어떤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글자가 파손된 부분이 많아서 몇 개의 혈자리가 누락되어 있지만 사용하고 있는 혈자리는 間使, 人中, 大淵, 申脈, 風府, 承漿, 大陵, 上星, 曲池, 內庭 등이었다. 여기에 나오는 혈자리는 대체로 十三鬼穴에 속하는 것들이 많다. 十三鬼穴은 人中(鬼宮), 少商(鬼信), 隱白(鬼壘), 大陵(鬼心), 申脈(鬼路), 風府(鬼枕), 頰車(鬼床), 承漿(鬼市), 勞宮(鬼窟), 上星(鬼堂), 會陰(鬼藏), 曲池(鬼腿), 海泉(鬼封) 등이다. 이 13개의 혈자리 가운데 7개를 취하고 있고 나머지 덧붙인 間使, 太淵, 內庭 등도 정신계통의 질환을 주치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아마도 인조는 이 시기 정신적 충격으로 고통받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어떤 치료혈자리를 사용했는가는 해당 의사가 환자를 어떤 병으로 진단하였는가를 드러내주는 것이다. 위의 침구처방은 인조의 질병의 진단의 결과로서 결정된 치료법이므로 이 치료혈의 조합인 침구처방은 인조의 진단명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즉 이형익은 인조를 정신적 질환이 있는 환자로서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十三鬼穴은 癲狂 등의 정신 질환을 치료하는 데 사용한 13개의 침혈로 구성된 침처방이다. 『千金要方』에 나오는데, 침자할 때 혈자리의 이름에 鬼란 글자를 붙여서 혈자리의 숫자가 13개이므로 십삼귀혈이라고 하였다.
『東醫寶鑑』 雜病篇, 邪祟門에도 ‘百邪所病鍼有十三穴’이라는 제목으로 十三鬼穴을 소개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李馨益이 『東醫寶鑑』의 침구법을 활용하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