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은 당연히 하나의 학문으로서 진실을 탐구하는 철학적, 과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그 의학이 당시 속해 있는 사회의 시대성을 충실히 반영하여 변화해 나가는 측면도 함께 가지고 있다.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는, 조선 말기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내적 모순과 부조리를 능동적으로 극복해내지 못한 상황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강점을 당하여 비정상적인 사회 구조와 문제점들을 그대로 내포한 채 이끌려 온 어두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의학의 경우도, 19세기말 개화와 함께 서양의학을 받아들이면서 1894년에 醫科取才가 폐지되고 이후 전통적인 한의학 교육을 담당하였던 典醫監도 없어지는 등의 변화를 겪는다.
한의학에 대한 국가적 지원이 점차로 줄어드는 가운데 대한제국은 국가체제를 다시 정비하여 醫學校官制, 醫學校規則, 病院官制, 病院細則 등을 제정 반포하고 廣濟院을 설치하여 한의와 서의를 동등한 지위에서 발전시키고자 하였으나, 이마저도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유명무실하게 되고 廣濟院에서 한의사들이 축출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최초의 근대식 국립 한의학 고등교육기관인 同濟學校 설립도 일제에 의한 한의학 소외를 벗어나기 위한 작은 몸부림에 불과했다.
개항 이후 선교사들에 의하여 서양의학이 소개되고 이어서 일본의 의사들이 한국에 유입되어 병원이 설립되면서 빠른 속도로 서양의학이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1910년 한국병합늑약 이후로는 총독부의 본격적인 지원 하에 서양의학은 한국의 주류 의학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와 그 충격에 대하여 한의계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한의학을 근대식 의학의 모습으로 탈바꿈하기 위하여 노력하게 된다.
한의계는 한국병합늑약 직후 朝鮮醫師硏鑽會, 醫學講究會 등의 단체를 결성하고 新舊醫學講習所, 東西醫學講座 등을 통하여 한의학 교육을 시행하였으며, 당시 洪鍾哲은 본인이 설립한 公認醫學講習所를 통하여 근대식 교육과정을 확립하고 최초의 근대식 한의학 잡지인 『漢方醫藥界』를 창간하여 학술 활동을 전개해 나가기도 하였다.
1920년대 이후로는 한의계 대표 단체인 東西醫學硏究會를 중심으로 교육 및 학술 활동이 진행되었는데, 이러한 자구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의학이 주류 의학으로 편입되기에는 여전히 요원한 상황이었다.
1930년대 들어서 조선총독부의 의료 정책이 한의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활용하는 방향으로 바뀌기는 하였으나, 이는 만주사변과 태평양전쟁을 앞두고 의료수요가 늘어난 배경 속에서 한의학의 일부를 채용하여 공급을 맞추려고 하는 일시 방편의 하나였으며, 한의학의 핵심적인 원리와 가치를 인정하지 않은 채 효용성만을 따져서 부분적으로 활용하겠다는 기만적인 개량주의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총독부는 일제강점기 동안 한의사면허 제도와 고등교육기관의 설립을 일체 허용하지 않았다.
趙憲泳, 의료계몽 활동의 연장선에서 한의학 인식
趙憲泳은 이러한 시기인 1934년 10월에 東西醫學硏究會가 그동안의 부진함을 일신하기 위한 振興大會를 열고 任員을 개편하는 자리에서 전격적으로 한의계에 투신하여 이후 활발한 활동을 해나간다.
당시 한의계를 주도하던 인물들은 대부분 晴崗 金永勳과 같이 조선말기의 醫官 출신이거나 洪鍾哲과 같이 민간에서 오랫동안 한의원을 운영하였던 의원이거나 근근이 유지되던 몇몇 醫學講習所에서 배출된 사람들이 전부였다.
이에 비하여 趙憲泳은, 비록 어려서부터 한의학에 조예가 있었던 사대부 집안에서 성장하였고 개인적으로 유학 시절부터 틈틈이 한의학을 공부하였으나, 동경 와세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수학, 졸업하고 이후 신간회 활동에 매진한 경력으로 보면 기존의 한의계 인물들과 배경이 달랐다.
근현대 한의학 역사에서 한의학이 아닌 다른 전공자들이 대거 한의과대학에 입학하고 한의사가 되어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1990년대 초반부터였다. 당시 상황을 직업적으로 한의사가 선망의 대상이 되어 그 기대감 때문으로 한의학계에 타 전공자들이 몰려든 것으로 분석하기도 하나, 결과적으로 한의학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한의학의 토양을 풍부하게 바꾸었다는 점에서는 주목해야 할 사회 현상이었다.
물론 다른 전공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한의학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의학의 가치를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한의학이 대중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수요자의 입장에서 가감 없이 접근할 가능성이 높다.
趙憲泳은 자신이 추구하는 의료계몽 활동의 연장선에서 한의학을 인식하였으며, 한의학이 민중의 건강과 행복에 기여할 수 있는 훌륭한 역량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였다.
또한 그의 실천은, 주로 한의학의 장점을 역설하고, 당시 주류의학으로 자리 잡은 서양의학을 한의학에 융합하여 설명함으로써 한의학의 과학화에 대한 불필요한 비판을 차단하고 한의학 부흥의 당위성을 수립하는 데에 집중되었다.
『通俗漢醫學原論』, 한의 교재용 개발 역사에 중요
특히 당시 전문 의학의 서비스로부터 소외되어 있던 민중들이 쉽게 한의학을 이해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간편하게 한의학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여 한의학에 대한 대중들의 친밀감을 높였다.
수년 간 전국을 순회하며 한의학 강좌를 진행한 것도 한의학의 우수성을 알리고 전문 인력의 양성하는 데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또한 『通俗漢醫學原論』은 한의학의 근대식 교육에 맞는 교과서로서의 구성 형식과 내용을 가지고 있어서 한의학 교육용 교재 개발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저작이다.
의학은 실용학문이면서 종합학문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관련 다른 학문 분야의 성과들을 토대로 발전하게 된다. 한의학도 마찬가지로 주변 학문들과 소통하고 융합하면서 발전해 나갈 수밖에 없다.
자연과학, 인문사회학, 현대의학 등과의 협력뿐만 아니라 의료 관련 정책 연구와 사회적 이슈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도 필요하다. 趙憲泳의 경우 신간회의 민족주의 사회운동에 참여하면서 당시 일제강점기의 사회에 대한 인식과 통찰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것이 이후 스스로 한의학을 공부하고 펼쳐나가는 데에 큰 밑바탕이 되었다.
또한 그가 제헌국회의원으로서 한의사제도의 수립에 큰 역할을 한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한의학의 핵심 가치를 정확히 짚어내고 한국의 의료 환경 속에서 한의학이 훌륭히 기여할 수 있음을 당시 정부와 정치권에 역설한 결과인 것이다.
납북 이전까지의 趙憲泳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 더 진행되어야 할 것이며,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21세기 한의학의 모습을 다시 돌아보고 미래의 나아갈 방향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