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운데 우선 漢醫學과 洋醫學의 비교 조화에 대하여 살펴보면, 1920년대의 침체기 속에서 한의계는 한방피병원 설립과 전염병치료 권한 확보 등에 대하여 노력하였고 서양의학을 수용하여 공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당시 한의계를 대표하는 조직인 東西醫學硏究會도 이러한 배경 속에서 활동을 지속하고 있었고, 1920년대 후반 식민당국의 한의학 장려로의 정책 전환 속에서 醫學講習所의 교육을 강화하며 한의학의 정체성을 살리는 동시에 서양의학을 접목하는 방향으로 한의학 부흥을 시도하였다. 1934년 10월 東西醫學硏究會의 개편도 이러한 흐름 속에서 나온 결과였다.
개항 이후 도입된 서양의학이 빠른 속도로 주류의학으로 정착하는 과정 속에서 한의학이 서양의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움직임은 이미 대한제국 시기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초기에도 朝鮮醫師硏鑽會의 新舊醫學講習所와 洪鍾哲의 公認醫學講習所 등에서 이미 서양의학을 수용하여 교육에 적용하기 시작하였다.
한의학 이론, 효능에 대응하여 서양의학 지식 접목
예를 들어 洪鍾哲의 『經絡學總論』(1922년)은 12경락의 순행과 삼음삼양 경기의 흐름 등 한의학 내용을 설명하면서 『人體形』 부분에는 서양 해부지식을 바탕으로 解剖臟器圖를 동시에 설명하고 있었다.
또한 의생제도의 성립으로 인하여 기본적인 서양의학 지식에 대한 습득이 늘어나게 되었는데, 1924년에 東西醫學硏究會가 의생시험 합격을 위하여 발간한 『東西醫學要義』(도진우, 1924년 4월)는 식민당국의 직접적인 규제를 받지 않고 한의계 중심으로 저작된 교재였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醫方綱要』(1917년)와 『朝鮮衛生要義』(1918년) 등이 단순히 해부학 및 생리학, 약물학, 전염병학 등 서양의학의 기초지식과 진료 및 치료 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던 것과 달리, 『東西醫學要義』는 각 편을 동서의학으로 구분하여 서술함으로써 양자 간의 결합을 중시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趙憲泳은 동서의학을 비교한 후 조화를 시도하였는데, 1930년대 중반 한의학 부흥에 대한 논쟁이 벌어질 당시에 한의계의 모든 의견이 이와 같지는 않았다. 朝鮮日報에 『綜合醫學 樹立의 前提』의 글을 기고하였던 李乙浩는 동서의학의 융합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趙憲泳은 1934년 5월 3일에 朝鮮日報에 기고한 『東西醫學의 比較批判의 必要』에서 동서의학을 2분법적으로 비교하면서, 양자의 장단점을 서로 보완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접근이 『通俗漢醫學原論』에서는 우선 한의학의 기본 이론이나 임상치료의 효능들에 대응하여 서양의학의 지식들을 접목시키는 방향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相火를 부신수질의 adren aline에 비유하여 심장의 박동을 강화하는 것이 바로 相火가 君火를 보좌하는 작용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대응 관계를 넘어서 趙憲泳은 사람의 삶을 영양(개체보전), 생식(생명연장), 투쟁(목적달성) 등으로 분할하고 각각에 腑[脾], 腎, 肝을 배속하여 足三陰의 경락체계와 연결시켰다. 이러한 체계 속에서 다시 腎은 내분비, 생식, 비뇨 관련 호르몬의 기능과 연결되며 여기에 命門, 膀胱, 子宮 등이 결합된다.
自然의 理法에 적합한 치료가 곧 ‘理療法’
즉, 趙憲泳은 한의학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재해석한 이후에 현대의학의 지식들과 접목을 시도한 것이다. 또한 趙憲泳은 朝鮮理療會의 의료계몽 활동 이후 출간한 『民衆醫術理療法』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理療法의 의미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러나 萬一 이 治療法을 科學的 根據가 없다고 詆毁하여 그 實行과 普及을 妨害하는 者가 있거나 또는 病者 自身이 이 治療法에 對한 信念이 弱해서는 안 되겠으므로 不得已 多少間 科學的 論證과 學理的 解說을 試한 것이다.
理療法을 近來에 많이 流行하는 物理療法으로 單純히 解釋하는 이가 있는 듯하나 物理療法에 局限된 것이 아니요 心理療法도 되고 生理療法도 되고 物理療法도 되고 化學療法도 된다. 다시 말하면 그 基礎를 心理學, 生理學, 生物物理學, 生物化學에 둔 가장 合理的인 自然療法이다. 肉體方面은 西洋의 自然科學으로 究明하고 生命現像은 東洋의 哲學的 方面으로 觀察하여 綜合的으로 自然의 理法에 適合한 治療를 하는 것을 『理療法』이라고 命名한 것이다.
生은 刺戟에 依하여 營爲된다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治療도 刺戟에 依하지 않을 수 없다. 治療는 體表刺戟에 의한 外治와 體內刺戟에 의한 內治 두 方面이 있으니 外治法은 本篇에 說述하였고 內治法 卽 藥餌療法에 대해서는 『通俗漢醫學原論』에 詳述하였다.
부득이하게, 과학적 논증과 학리적 해설을 시도하기는 하나 한의학을 포함하는 理療法이 합리적 자연요법이므로 자연히 心理學, 生理學, 生物物理學, 生物化學 등에 기초를 둘 수밖에 없으며, 궁극적으로 육체방면에 대한 서양 자연과학적 규명과 생명현상에 대한 동양철학적 관찰이 종합된 自然의 理法에 적합한 치료가 곧 ‘理療法’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自然의 理法은 곧 구체적인 ‘자극’으로 요약 표현되며, 이 자극의 개념 속에 한의학과 물리요법, 인체의 생리와 병리가 모두 망라된다. 自然의 理法이라고 하는 보편적 개념을 바탕으로 의학을 넓게 해석한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표면적으로 淸末 唐宗海, 張錫純 등의 中西匯通 운동과 유사해 보이나, 단순히 한의학의 내용이 서양의학의 그것과 상통함을 강조함으로써 그 가치를 서양의학에 빗대어 인정받으려고 하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다.
趙憲泳의 이러한 생각은 해방 후 한의학의 현대화 연구로 이어지게 되는데, 실제 초기 한의과대학에서 韓方生理學 연구를 이끌었던 尹吉榮은 젊은 시절에 『通俗漢醫學原論』을 읽고 한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며, 그의 ‘韓方生理學의 方法論硏究’와 『東醫學의 方法論硏究』에 나타난 서양의학을 바라보는 관점도 한의학의 이론과 방법론의 특성을 살리는 방향으로 현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趙憲泳의 입장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흐름은 오히려 서양의학의 생리학을 재해석하여 한의학의 五運六氣 및 藏象 등의 체계와 결합하려고 했던 시도로도 이어졌다.
임상 부분에 있어서는 『東洋醫學叢書 : 五種』에서 한의학의 證治를 자세히 설명한 이후에 ‘洋診漢治’의 부분을 별도로 두어 실용적으로 현대적 질환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하였다. 현대 병명을 나열한 후, 각각에 대하여 손쉬운 변증 방법이나 통치방을 제시하기도 하고 또는 앞부분에서 제시한 證治의 각론을 참고하도록 하였는데, 각 질병별로 임상에서 유효한 證治와 연결시킨 것이 특징이다.
한·양의학 상호 공존과 보완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趙憲泳이 추구했던 동서의학의 비교 및 조화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의 학술적 평가는 앞으로 더 진행되어야 하며, 그가 비록 한의학의 가치를 중시하였으나 또한 전체적으로 한의학과 서양의학이 서로 공존하면서 보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기본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趙憲泳은, 한의학의 가치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노력을 하지 않거나, 한의학의 가치를 무조건 옹호하면서 표면적으로만 서양의학을 접목하여 단순히 대응하려고 하거나, 아니면 양자 각각의 특성이 매우 뚜렷하여 서로 접합점이 없다고 보는 등의 태도가 실제 질병을 치료해야 하는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본 것이며, 동서의학의 특성을 철저히 따져보고 각각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서 서로 접목해 나가면 현실에서 많은 질병들을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