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의신문] HIV(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 치료기술의 발전으로 감염 이후에도 장기간 건강한 일상을 이어가는 사람이 늘면서 국내 HIV 정책의 무게중심을 ‘예방과 관리’에서 ‘치료와 삶의 지원’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과 함께 입법 필요성이 제기됐다.
특히 감염인 10명 중 4명 이상이 50세를 넘어서고 70세 이상은 6년 새 두 배 이상 증가했으나 현행 법체계와 상담·돌봄 인프라는 감염인의 생애주기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서미화 의원(더불어민주당)이 질병관리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에서 HIV와 함께 살아가는 내국인은 1만7557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해당 연도 신규 감염자가 아닌 신고된 내국인 HIV 감염인 가운데 생존자 규모다.
생존 감염인은 ’12년 7678명에서 증가한 반면 내·외국인을 합한 연간 신규 신고 인원은 ’19년 1223명에서 ’25년 927명으로 감소했다. 생존 감염인 증가를 신규 감염 증가가 아닌 치료기술 발전과 지속적인 치료에 따른 장기 생존의 변화로 살펴야 한다는 설명이다.
70세 이상 HIV 감염인 6년 새 두 배 이상 증가
감염인의 고령화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25년 기준 50세 이상은 7632명으로 전체의 43.5%, 60세 이상은 3831명으로 21.8%를 차지했다. 70세 이상은 ’19년 595명에서 ’25년 1228명으로 106.4% 증가했다.
이에 따라 HIV 정책도 감염 예방과 치료비 지원을 넘어 △장기복약 △만성질환 관리 △심리·정신건강 △사회적 고립 예방 △간병·요양 △주거·자립 등 생애주기 전반으로 넓혀야 한다는 지적이다.
치료 중인 감염인도 ’20년 1만3767명에서 ’24년 1만6502명으로 늘었다. 다만 이는 HIV를 주상병으로 항레트로바이러스제 처방 내역이 있는 사람을 건강보험 청구자료에서 집계한 수치로, 신고자료에 기반한 생존 감염인 규모와 직접 비교할 수는 없다.
HIV와 AIDS의 개념을 법체계에서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는 문제도 제기됐다. HIV 감염인은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을 뜻하는 반면 AIDS는 HIV 감염 이후 면역기능이 일정 수준 이하로 저하되거나 기회감염 등의 임상증상이 나타난 상태를 의미한다. 지속적인 치료·복약을 통해 체내 바이러스를 억제하고 건강한 일상생활을 이어갈 수 있으며, 바이러스가 미검출 상태로 유지되면 성접촉으로 HIV가 전파되지 않는다는 ‘미검출=전파불가(U=U)’ 원칙도 확립돼 있다.
쉼터 전국 1곳…상담간호사 1명이 297명 담당
하지만 현행 법률의 명칭은 여전히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이다. 감염인 보호·지원 조항이 마련돼 있지만 법률 명칭과 기본 체계는 AIDS 예방과 감염인 관리에 무게가 실려 있어 HIV 감염과 AIDS를 구분하고 치료·생활 지원에 대한 국가 책임을 구체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지원 인프라도 부족하다. 질병관리청은 HIV 진료·치료비 지원과 의료기관 감염인 상담, 요양·돌봄, 쉼터 및 취약계층 지원사업 등을 시행하고 있지만 ’26년 기준 HIV 감염인 쉼터는 전국에서 대구 한 곳만 운영되고 있다.
의료기관 감염인 상담사업 참여기관은 ’19년 26곳에서 ’26년 6월 32곳으로 늘었고 참여율도 ’19년 65.0%에서 ’25년 71.1%로 상승했다. 반면 ’26년 기준 상담간호사는 45명에 그쳤다. ’25년에는 상담간호사 1명이 평균 297명의 감염인을 담당했으며, 32개 참여기관 중 23곳에는 상담간호사가 1명만 배치됐다.
HIV 환자단체인 ㈔함께서봄 권태윤 이사는 “HIV와 함께 살아가는 감염인에게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치료를 넘어 간병과 요양, 돌봄의 문제를 함께 마주하는 일”이라며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거부와 배제는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만큼, 법률과 지원체계를 개선해 감염인이 지역사회에서 배제되지 않고 한 사람의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에이즈 예방법’에서 ‘HIV 감염인 지원법’으로 전환 추진 예정
서 의원은 현행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을 가칭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 감염 예방 및 감염인 지원에 관한 법률’로 전부개정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개정 방향으로는 △HIV 감염과 AIDS의 명확한 구분 △감염인의 건강권·치료권 △진단 이후 치료 연계·지속복약 지원 △심리·정신건강 지원 △고령 감염인 요양·돌봄 △주거·자립 지원 △진료·사회서비스 이용 과정의 차별 방지 △개인정보 보호 △감염인 실태조사·정책 참여 보장 등이 제시됐다.
서미화 의원은 “HIV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늘고 고령화되고 있지만, 법률과 정책은 여전히 에이즈 예방과 감염인 관리의 관점에 머물러 있다”며 “감염인을 관리와 통제의 대상으로 보는 법에서 벗어나 감염 예방과 함께 치료와 일상, 돌봄과 자립을 지원하는 법체계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 “예방과 감염인 지원은 서로 대립하는 목표가 아니다”며 “감염인이 낙인과 차별에 대한 두려움 없이 검사받고 치료받을 수 있도록 건강권과 존엄을 보장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인권적인 예방정책”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국립중앙의료원에선 HIV·AIDS 환자의 통합적 건강관리를 위한 임상근거도 축적되고 있다. 국립중앙의료원 한방진료부 연구팀이 지난 8월 국제학술지 ‘European Journal of Integrative Medicine’에 발표한 연구에서 HIV·AIDS 환자 3783명을 대상으로 한 29건의 무작위 대조군 임상시험을 분석한 결과 △한약 14건 △침 9건 △침·뜸 병용 3건 등 전통 동아시아 의학 중재가 통증·증상 관리와 삶의 질, 면역 관련 지표에서 잠재적 유용성을 보였다.
연구팀은 이를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의 보완적 접근으로 제시하고, 한약과 항레트로바이러스제 간 상호작용에 대한 안전성 평가와 한·의 다학제 협력 등을 통한 통합적 HIV·AIDS 진료 근거 축적을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