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미숙 여의도 책방-56신미숙 국회사무처 부속한의원 원장 (前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 [편집자주] 『신미숙의 여의도 책방』은 각 회마다 1개의 키워드에 5권의 도서를 추천하는 형식으로 이어갑니다. 몇 년 전이었을까? 워낙 손힘이 드센 나여서일 수도 있고, 중국산 면봉의 부실함 때문일 수도 있다. 샤워 후 습관적으로 귀 안을 면봉으로 돌리다가 ‘또각’하는 소리와 함께 솜이 뭉쳐져 있는 면봉의 끝부분이 귓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거울로 들여다보니 부러진 나무 끝부분이 살짝 보일락 말락 했다. 뜨개질, 네일아트, 슬라임 등으로 자잘한 손기술이 좋은 딸내미에게 “하진 씨, 무서워 말고 이 핀셋으로 요 끝부분만 살짝 당겨주면 응급실 안 가고도 해결될 것 같은데…. 해볼 수 있겠니?”라고 말했다. “어머니, 일산백병원이 코앞인데 저랑 같이 다녀오시지요. 제가 같이 가 드릴게요.” 그때만 해도 내가 철이 없었는지, 딸아이가 철이 이미 들었던지 아이의 말이 옳았다. ‘행여라도 잘못되면 누가 누구를 원망하리오?’ 그렇게 자정 전후 도달한 대학병원 응급실에는 붐비지 않을 정도의 환자와 보호자들이 간간히 드나들었고 ‘경증오브경증’에 해당하는 나는 ENT 응급으로 분류되어 해당과 당직 레지던트가 내려오기를 환자대기석에 앉아 기다리게 되었다. 10여 분도 되지 않아 눈을 후비적거리며 세탁이 필요해 보이는 청결도의 가운을 입은 남자 수련의가 내 앞에 나타나 나의 이름을 호명한다. 안쪽 베드로 안내한 후 측와위로 눕게 하더니 긴 포셉으로 수 초 만에 면봉 쪼가리를 제거했다. 그리고 귀 안으로 소독액을 몇 방을 뿌려준 후 남은 점이액을 챙겨주었다. 2-3일간 이어폰사용, 귀이개, 면봉 사용 피하라는 주의 사항 당부를 끝으로 치료는 종료되었다. 토탈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던 야간 응급실 체험은 저렴한 비용과 신속한 치료에 ‘일산백병원 응급실 따봉’을 외치며 가벼운 마음으로 딸내미와 무사히 귀가했었던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면봉은 죄가 없다. 애먼 데까지 넘쳐흐르는 나의 힘이 문제인 게지. 추석 잘 보내시라는 인사 대신 “응급실 갈 일 없는 무사한 명절 되세요.”라는 인사말이 생겨날 정도로 올 추석의 키워드는 응급실이었다. 추석날 조상님께 절을 올리면서 “응급 상황 없도록 해 주세요, 혹시 실려 가는 일이 있더라도 응급실에서 받아줄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응급실에서 받아주더라도 담당 의사가 있게 해 주세요, 의사가 괜찮은 인격과 실력을 갖춘 사람이게 해 주세요.”라고 빌었다는 친구의 진지한 표정에 웃을 수도 없었다. 지난 9월 2일 시민언론 민들레의 온라인판에서 『의료 대란 속에서 각자 살아남기』라는 제목으로 유시민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병원과 관련된 목표도 세웠다. 죽을 때까지 대형병원 응급실과 수술실에 가지 않는 것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문제가 있으면 동네 병의원에 간다. 뭐 하러 굳이 큰 병원에 간단 말인가. 독자들이 ‘의료시스템 붕괴’라는 말이 풍기는 공포감에 전염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으니 가볍게 참고하시기를 바란다. 전공의가 떠나고 대형병원 응급실이 문을 닫아도 우리는 살아갈 수 있고, 살아가야 한다.” NYU에서 노화와 암 면역치료를 연구하는 면역학자이자 의사인 Derya Unutmaz는 9월 14일 X(구, 트위터)에 아래와 같은 글을 게시했다. “의사로서의 경력을 고려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경고하자면 AI는 특히 표준 진단 및 일상적인 치료와 관련된 역할에서 ‘인간 의사’에 대한 수요를 감소시킬 것이다. 질병 진단, 의료 영상 해석, 치료 계획 수립과 같은 의료 업무는 곧 인간 의사보다 더 빠르고 일관성 있는 AI 시스템으로 처리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의학은 수술, 응급 의학 및 기타 중재 전문 분야와 같이 중재에 중점을 둔 분야를 전문으로 하지 않는 한 차세대 의사들에게 덜 매력적인 진로가 되고 있지만, 이들 역시 결국 로봇 시스템에 추월당할 수 있다. 아마도 10년 정도 안에 그럴 것이다.” 의료기술 측면에서 AI의 발전이 기존 의료인들을 어디까지 내몰 것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1년간 박사논문을 쓰며 고심했던 내용을 챗지피티에 의뢰하니 1시간 만에 뚝딱하고 나오더라’ 라는 많은 연구자들의 경험담을 떠올려본다면 Dr. Derya가 경고한 의사의 어두운 미래에 대한 내용도 결코 과장이 아닐 수도 있다. 지방 공공의료원의 구인난, 응급실 뺑뺑이 문제와 피부과-안과-성형외과로의 쏠림 현상이 의대정원을 2000명으로 확대한다고 해서 과연 해결될 것인가? 의정갈등은 어떤 조정을 거쳐 종점에 이르게 될까? 그 끝에서 우리는 어떤 장면을 목격하게 될까? 2025학년도 의대 수시모집에서는 3천명 정원에 7만명 이상이 몰렸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멀쩡하게 잘 다니던 SKY, 대기업, 공무원 다 그만두고 의대입학을 위한 긴 행렬에 동참하는 것이 이과 최고득점자들의 필수코스가 돼버린 지 오래다. 전국 12개 한의대생들도 한의대에서 의대로 갈아타고자 하는 휴학자들이 넘쳐나는 바람에 면학 분위기가 말이 아니라고 한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가 아니라 ‘의사면 살고 非의사면 죽는다’는 법이라도 생긴 모양이다. 의사 집단을 바라보는 의사 개개인의 직접적이고 솔직한 내용이 주로 담긴 책 몇 권을 골라보았다.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 인생에 대한 찰리 채플린의 명언이었던가? 의사는? 한의사는? 희극과 비극 그 어디쯤을 헤매고 있을까? 『의사는 사라질 직업인가』(김현정, 느리게읽기, 2014년 12월) 정형외과 전문의이면서 아유르베다 의학을 뒤늦게 공부하면서 전인치료에 대한 시선을 가지게 된 저자는 2012년 『의사는 수술받지 않는다』에 이어 2014년 이 책을 출간하며 의료계에 관한 ‘미래리포트’라는 부제를 붙였다. - 정성을 들여서 진찰한다거나 얘기를 성심껏 들어주고 설명하는 것은 코드에 잡히지 않는 의료행위이다.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 의료행위에는 아무런 비용이 발생하지 않는다. - 진정한 공공의료는 유일하게 공공병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인지 모른다. 공공병원에 가면 최소한 바가지나 속임수는 당하지 않는다든지 무조건 고가의 검사나 수술부터 권하지 않는다든지, 돈이 없어도 꼭 필요한 진료라면 사회복지사를 연결해서라도 어떻게든 받을 수 있는 방안을 찾아준다든지, 복지 사각지대의 환자들에게 따뜻하게 붕대를 감아준다든지, 등등. 바로 여기에 공공병원의 빛나는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 - 검사자, 해석자, 치료자로서 의사의 역할이 점점 더 컴퓨터로 대체되어 가면서 의사들은 입지가 좁아진다. 의료 환경의 변화는 점점 더 ‘의사 없는 의료’를 향하고 있다. 『환자가 된 의사들』(로버트 클리츠먼, 동녘, 2016년 4월) 정신과 전문의인 저자가 우울증을 경험하며 평생 의사로 살아오다 환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환자의 편의대로 흘러가지 않는 의료시스템을 피부로 느끼며 전과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게 된 경험을 토대로 환자가 된 의사 70여 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 환자들은 점점 더 교육받은 소비자가 되고 의료 시스템은 점점 더 사용자의 친화성과 멀어지고 있다. - 의사들은 의사라는 신분이 마치 질병에 대한 보호장치인 양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마치 일종의 면역이나 방어라도 된다는 듯이, 의사란 병이 감히 무너뜨릴 수 없는 불가사의한 불사신이라는 식이다. 직업인으로서의 역할이 그들의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것이다. - 병원은 환자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의사와 행정진과 경영인의 필요에 따라 틀이 만들어지고 있다. 사실 요즘엔 의사를 위해서도 잘 기능하고 있지 않는 듯하다. - 과학적 의학에 대해 수련을 받았음에도 병에 걸린 많은 의사들은 눈에 띄게, 그리고 아주 대놓고 미신적 사유나 마술적 사유에 빠져들었다. - 보완대체의학은 의학 정보의 평가와 관련된 복잡한 갈등 양상을 더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환자가 된 의사들 중 일부는 태도를 바꾸어 비서양의학적인 치료에 우호적으로 되기도 했다. 의심의 눈으로 대체의학을 바라보도록 훈련받았음에도 몇몇 의사는 직접 그런 치료를 받아보기 시작했다. - 우리는 모두 언젠가 환자가 될 것이다. 그 사실을 완전히 깨닫거나 인정하기를 원치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부정에 도전하는 것이다. 『환자 주도 치유 전략』(웨인 조나스, 동녘 라이프, 2019년 6월) 30년 넘게 만성질환 치유를 연구해 온 가정의학과 전문의인 저자는 치료 중심에서 건강 중심으로 의료 환경을 바꾸는 운동을 통해 병의 치료가 아닌 치유의 과정을 현대의학과 대체의학을 넘나들며 탐색해 오고 있으며 이 책에서는 그 구체적인 임상 사례를 근거로 치유의 이론을 요약하고 있다. - 의사들이 처방하는 치료제로는 20퍼센트 치유만 가능하다. 이 치료제에는 약물, 수술, 침술, 약초, 영양제, 식이요법을 비롯한 모든 외부적인 것들이 포함된다. 치유의 나머지 80퍼센트는 유의미한 반응을 쌓아가는 데서 오는데, 이 반응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사람마다 매우 다르다. 몇 가지 단순한 기본원칙과 절차만 적용하면 일어날 수 있다. - 치유는 섬세하고 개인적인 과정이다. 치유는 잘 살고 있다는 느낌과 관계가 있다. - 각각의 대체보완 의학적 치료들이 실질적 질병을 치료한다는 과학적인 증거는 없다. 그럼에도 그렇게 치료가 되는 경우는 놀랍도록 흔하다. 그렇다면 과학은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인가? - 침술은 유럽과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안전하고 효과적인 통증 치료법으로 인정받고 있다. 당신도 당신에게 맞는 의사를 찾기 바란다. 의사가 대체의학이 무가치하다고 하거나 전체론적 의학에 대해 알아보는 것을 시간낭비라고 한다면 당신에게 적합한 의사가 아니다. 『돌팔이 의사의 생존법』(김연종, 황금알, 2022년 10월) 의정부에서 내과 개원의로 활동 중인 저자는 의사이자 시와 수필을 쓰는 문학가이기도 하다. 동네 의사와 변방의 시인을 병행 중인 김 원장님의 수필에서는 친숙함이, 중간에 삽입된 다양한 시에서는 번뜩이는 유머도 느껴진다. - 죽음이란 삶의 완결이지만 어떤 죽음은 서사의 중단이기도 하다. 이럴 땐 무엇이 위로될까. 거창한 문학이나 사회적 대책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의학적 상담도 마찬가지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의사의 처방이란 우울한 쪽지일 뿐이다. - 사람들이 정작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자체보다 죽음의 과정일 것이다. 자기 삶을 직접 통제하지 못하는 데 따른 상실감과 무력감이 마지막을 더 힘들게 할지도 모른다. - 환자의 얼굴은 보지도 않고 컴퓨터 화면만을 응시하며 진료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컴퓨터의 장벽에 막혀 더는 만져지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 진료가 정당한 의료행위일까, 서로의 감정을 철저하게 배제해 버리는 원격진료가 의사와 환자 모두에게 결코 행복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꿈의 진료실』(황윤권, 타임북스, 2024년 2월) 1987년 정형외과 전문의를 취득하고 2001년부터 개원의로 활동 중이신 황윤권 선생님의 저서로 병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의사가 아닌 환자 자신이라는 사실을 외치시며 진단기기 한 대 없이 손으로 눌러서 진찰하고 환자 스스로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교육하시는 독특한 방식의 진료를 고수하시는 분으로 유명하다. - 애석하게도 내가 아는 바로는 양심 없는 의사들이 세상에 너무 많다. 욕먹고 비판받아야 마땅한 그들이지만 오히려 많은 수입을 올리고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더 존경받고 더 목소리를 높여가며 나날이 기득권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이게 현실이다. - 지금도 디스크 수술, 협착증 수술이 계속되고 있고 어깨 회전근개 파열 수술 치료 역시 계속되고 있다. 무릎 연골 타령도 여전하고, 골다공증 치료 역시 대유행의 소용돌이 속에서 의사와 제약회사를 살찌우고 있다. MRI를 비롯한 무차별적인 검사, 밥 먹듯이 하는 시술 등도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들이 하루아침에 개선될 거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 철벽같은 기득권 세력과 비양심적인 상업적 의사들은 앞으로도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디스크, 협착증, 회전근개 파열, 무릎연골 타령 같은 말들이 사라지는 날이 올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추석 연휴 때 짧은 일정으로 친정어머니와 결혼을 앞둔 막내 여동생을 대동하고 상하이에 다녀왔다. 팔순 어머니께서 하루 2만 보를 걸으시며 우리와 일정을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에 지금도 감사와 감동이 가슴을 가득 채운다. 이번 상하이 여행은 한 마디로 ‘현금이 사라진 도시 체험’이었다. 알리페이 앱을 깔고 그 앱에 연동된 카드에 여행할 해당 국가의 화폐로 환전해서 일정 금액을 적립해 두면 결제할 때마다 자동으로 차감이 되는 시스템이었다. 여행 내내 현금이 오가는 광경은 단 한 건도 볼 수 없었다. 현금이 사라진 도시는 너무도 편리했다. AI가 진단과 치료의 대부분을 대체해서 의사에의 의존도가 말도 안 되게 약화된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아무 의사도 없는 혹은 최소한의 사람 손이 필요한 곳에만 인간 의사가 배치되어 있는 세상은 또 어떤 모습일까? 10년 전 정형외과 전문의 김현정 선생은 의사라는 직업의 존재론적 고민을 담은 책을 쓰며 “아마도 진료실에서 의사 얼굴을 마주 보고 직접 진찰받는 아날로그 방식의 전통적 진료는 극소수 슈퍼 부자들의 전유물로 전락하거나 훗날 인터넷 고분벽화에나 등장할 진귀한 풍경으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라고 예언했다. 최첨단의 기술력 속으로 빨려 들어갈 의료계의 미래에 한의학은 어디쯤에서 숨 쉬고 있을까? 환자 얼굴을 마주 보고 직접 진찰하는 아날로그 방식의 한의학적 진료는 과연 극소수 슈퍼 부자들의 전유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고분벽화에나 등장할 진귀한 풍경이 될 것인가? 과연 그 결말은? -
신미숙 여의도 책방-55신미숙 국회사무처 부속한의원 원장 (前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 [편집자주] 『신미숙의 여의도 책방』은 각 회마다 1개의 키워드에 5권의 도서를 추천하는 형식으로 이어갑니다 * 지역에서 올라와 대치동 근처 호텔에 머물며 고3과 재수생 두 딸들 케어를 마무리하고 다시 내려간다는 친구의 연락을 받고보니 여름방학이 막바지인 모양이다. 휴가철도 끝나가는지 줄서서 들어간다던 유명 전시회도 막상 가보니 사람들 발길이 이미 뜸하다. 짧은 소나기가 멈춘 후 땡볕이 주춤해진 틈을 타 강변서재(국회 내 북카페) 쪽으로 점심 산책을 나서는 길, 유독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그러고보니, 이번주 월요일부터 코로나 뉴스가 쏟아진다(『개학 동시에 줄줄이 코로나 확진…고3들 “칸막이 쳐달라” 비상』 중앙일보, 『코로나 하루 확진자 15만명 때 수준…고위험군 주의』 연합뉴스TV). 작년 5월11일, 대통령 주재 중대본 회의에서는 사실상 코로나19 종식을 선언했고 이는 무려 3년4개월만의 일상 회복이었다. 비대면 중단과 마스크 해제, 그 자유로부터 딱 1년3개월만에 다시 코로나 재확산의 분위기를 접하니 답답한 마음에 식을 줄 모르는 폭염까지 더해져 뜨거워진 한숨이 절로 나온다. 행여 다시 마스크 의무착용과 사회적 거리두기를 권고받는다해도 우리 모두는 또 ‘하라면 해야지 뭐.. 별 수 있나?’라며 눈치를 챙길 것이다. “일단 이번 주부터는 우리부터 마스크 씁시다.” 진료실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부터 시작해본다. 또 다시 고개 드는 ‘코로나19’ 코로나 발병률에 따른 단계별 사회적 거리두기는 강화에서 완화로의 수순을 밟다가 오늘같은 거의 완벽한 일상으로의 복귀에 이르렀다. 극장에서도 음료와 팝콘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환호했었고, KTX 안에서도 간단한 식사가 가능하다는 안내문 덕분에 여행길의 낭만도 느낄 수 있었다. 별 이벤트 없는 평범한 날들의 반복은 자주 지겹고 또한 지루하지만 그 평화가 깨어졌을 때 그리고 부분적으로 제한받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엄청난 불편함을 호소하고 동시에 별탈없는 일상의 잔잔한 지속을 간절히 희망하게 되는 법이다. 지난 7월 초 개봉한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그 포스터만으로도 영화에 대한 기대감이 솟구쳤다. 일본의 안성기+송강호라 불리우는 야쿠쇼 코지가 주연이기 때문이다. 한 칼럼니스트는 “늙은 남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제목으로 이 영화의 감상기를 투고했고, 조선일보의 한 문화부 기자는 “야쿠쇼 코지의 얼굴로 쓴 인생이라는 하이쿠”라는 멋진 한 줄로 이 영화를 추천했다. 아침마다 창가 앞 올망졸망한 화초에 열심히 물을 준 후 작업복을 갖춰 입고 집을 나선다. 문앞에서 하늘을 응시하는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드리워져있다. 자판기 캔커피를 든 채 트럭에 시동을 걸면서는 반드시 카세트 테이프 하나를 골라 모두의 귀에 익숙한 올드팝을 듣는다. 도쿄 공중화장실 청소부인 그는 작은 손거울을 이용해 보이지 않는 구석진 곳까지 반짝반짝 광을 낼 정도로 화장실 청소에 진심이다. 가까운 신사의 돌의자에 앉아 샌드위치와 우유 하나로 점심을 때우는 사이에도 나뭇잎 사이로 흘러나오는 햇살을 오래된 카메라로 촬영도 한다. 업무가 끝나면 걸어서든 자전거로든 지하상가 입구의 간이 선술집에 들러 늘 마시던 보리소주 한 잔을 들이키고 가끔은 단골 이자카야에 가서 마담이 불러주는 노래도 듣는다. 주말에는 동네 목욕탕과 코인 세탁소, 촬영한 필름을 인화하기 위해 사진관에도 들른다. 그저그런 비슷한 사진이지만 남길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하고 새 필름을 넣은 카메라는 다음 촬영을 위해 늘 그의 주머니 어디에든 담겨져 있다. 하루의 끝, 잠들기 직전이면서도 소박한 조명 아래에서 문고판 책 몇 페이지 읽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이 밝으면, 오늘같은 이 일상을 또 다시 반복한다. 평범한 일상의 유지…우리 모두가 바라는 소박한 목표 빔 밴더스 감독의 『퍼펙트 데이즈』는 2017년 12월에 개봉한 짐 자무쉬 감독의 『패터슨(Paterson)』과 무척 닮아있다. 뉴저지 주의 소도시 패터슨에 사는 버스 운전사 패터슨의 잔잔한 일상이 영화의 전부이다. 주인공 패터슨은 버스 기사로 일하면서 틈틈이 자신의 비밀노트에 시를 쓴다. 아내는 남편을 존중하고 그의 시를 사랑한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뭐하나 특별할 것 없는 그들의 일상은 평화롭게 흘러간다. 버스가 고장 난다거나 펍에서의 난동 해프닝, 강아지 마빈이 패터슨의 시 노트를 찢어 놓는 일 등 약간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도 찾아오지만 우연히 만난 일본 시인이 “때론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라는 말과 함께 빈 노트를 선물하는 행운도 맞이한다. 월요일 아침, 패터슨은 평상시와 같은 평온한 하루를 다시 맞이한다. 특별하지 않지만 평범한 일상이 유지되는 삶. 어쩌면 우리 모두가 바라는 소박한 목표일 지도 모른다. 화장실 청소부인 히라야마는 생업 이외에 화초가꾸기, 음악듣기, 독서하기, 사진찍기 등에서 즐거움을 찾는 일도 열심히 수행한다. 버스기사 패터슨은 버스운전 이외에 반드시 틈을 내어 시를 쓴다. 예술적인 행위를 보태지 않는 생존만을 위한 삶을 살 때, 그 삶의 주인공은 심신표리 모든 부위가 메말라간다. 도를 닦는 심정으로 일상을 유지시키려는 노력은 생활을 넘어서 의식이 된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가장 마지막 장면에는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어 하나가 제시된다. 그 단어는 일본어 코모레비(こもれび: 木漏れ日·木洩れ日)로 우리말로 번역하면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다. 일을 나서는 히라야마의 얼굴은 아침마다 말갛게 빛이 난다. 그 엷은 미소에는 평범한 하루하루가 유지될 수 있음에 대한 감사함이 묻어 있다. 빽빽한 일상을 살아내면서 우리는 짧은 틈을 만들어서라도 기어이 각자의 예술을 추구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코모레비는 희망의 은유적 표현일 수도 있다. 출근길이 즐거우려면 건강한 루틴을 발굴하고 습관화하는 지독한 훈련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루틴의 힘』(조슬린 K. 글라이 엮음. 도서출판 부키, 2020년 1월) 다양한 분야에서 구루로 추앙받는 유명 인사들의 솔루션만 요약해놓은 소책자 형식으로 『루틴의 힘 2』(2021년 1월)까지 연이어 발간되었고 목차만 훑어봐도 키워드 몇 개는 자연스럽게 메모하게 된다. 통찰력이란 익숙한 일은 계속 뿌리치고, 현실에 안주하는 대신 한걸음 앞서 나가는 과정을 통해 준비되는 것이다(스콧 맥도웰), 돈 벌기와 일은 일종의 예술이기 때문에 결국 좋은 비즈니스는 최고의 예술이다(앤디 워홀), 정말 하고 싶은 프로젝트를 완수하고 싶다면 우선 그 일의 난이도부터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스테판 사그마이스터), 성공하고 싶다면 소통해야 한다. 그리고 좀 무감각해지고 뻔뻔해질 필요도 있다(마크 맥기니스), 좋아하는 일이라면 자주 실천하라. 자주 하면 시작이 수월해진다(그레첸 루빈). 『마음홈트』(마리안 로하스 에스타페, 레드스톤, 2021년 7월) 스페인의 우울증 전문 정신과 의사의 책으로 30여 가지의 임상사례를 통해 나만의 행복 루틴을 만드는 의학적 방법을 제시한다. - 2017년 <The Journal of Pain> 5월호 기사에 상담시 의사 태도의 중요성에 관한 내용이 실렸다. 의사의 태도가 고통을 덜어준다. 환자가 의사를 신뢰하면 통증 감각이 줄어든다. 신뢰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 친절은 건강한 뇌의 기초이다. 이는 신경심리학 박사인 리챠드 데이비슨의 좌우명이다. - 병에 걸리기 훨씬 전에 몸은 불편함과 약함 또는 통증의 형태로 우리에게 경고 신호를 보낸다. 불안은 ‘마음과 영혼의 열’이다. 우리의 환경이 적대적이거나 우리 몸이 감당할 수 없는 과도한 활동, 감정 또는 상황에 노출되어 있다는 경고이다. - 건전하고 적절한 태도는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자연 치료제이다. 태도는 삶을 대하는 방법에 관한 결정이다. 태도는 기분을 움직이는 강력한 활성제이다. 『시간을 찾아드립니다』(애슐리 윌런스, 세계사, 2022년 1월) 사회심리학을 전공한 행동과학자 애슐리 윌런스의 책으로 루틴을 벗어나 각자의 속도를 찾아내어 타임푸어를 벗어나라고 조언한다. - 인생의 목표 달성과 꼭 해보고 싶은 일들은 ‘내년’으로 미룬다. 매년 미루기를 반복하다 시간을 다 써버리고, 결국 사용하지 못한 비행기표로 관을 장식하기에 이른다. - 시간 빈곤은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만성질환이다. 시간을 중시한다는 것은 친사회적인 행동이다. 친사회적이라는 용어는 남들을 이롭게 하는 행동을 설명할 때 사용된다. 더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비결은 간단하다. 돈보다 시간을 우선시하고, 결정은 한 번에 하나씩 하라. - 죽을 뻔한 적이 있는 사람들은 시간이 천천히 간다고 느낀다. 그들은 매일의 경험에 더 많이 감사했고, 직업적 성공보다 인간관계와 관련된 목표를 먼저 생각했다. - 미래의 시간은 약속과 위험으로 채워져 있다. 모든 희생을 감내하며 직업적 성공을 추구하는 것은 할 일은 너무 많은데 그 일들을 처리할 시간은 부족하다고 느끼는 원인이지 그 현상에 대한 해법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살다 보면 부작용이 따른다. 『뛰는 사람』(베른트 하인리히, 도서출판 윌북, 2022년 7월)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 생물학자 베른트 하인리히의 80년에 걸친 러닝 일지로 연구자로서의 삶과 그 삶을 지탱하기 위해 러닝을 병행한 초인적인 실천력에 찬탄을 멈출 수 없다. - 환갑이라는 나이가 생각보다 너무 빨리 찾아와 충격을 받았다. - 우리는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 과거의 타오르는 열정을 식히는 것 자체가 노화의 일반적인 과정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 여든이 되어도 달릴 수는 있었지만 더 이상의 경주는 무리였다. 적어도 40세와는 말이다. - 그동안 나는 마법같은 순간들을 달려왔다. 이제는 가까이 갈 수 없기에 더없이 훌륭해 보이는 시간들이다. 과거는 지나갔다. 그러나 언제나 매일의 새로운 기회가 과거 위에 세워진다. - 이제 여든 번째 생일을 치른 나는 더는 과거처럼 달리기 선수도 과학자도 아니다. 허나 나는 내가 바라던 꿈의 대부분을 이루었다. 인생의 마지막 단락을 쓰며 이제 내가 달려야 할 새로운 경주는 더 깊이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임을 다시금 느낀다. 『나무』( 고다 아야, 달팽이출판, 2017년 10월)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서 주인공 히라야마가 잠들기 전 집어들었던 단행본 중 한 권이 바로 이 책이다. 고다 아야 말년에 10년간 나무를 찾아다니며 기록한 15편의 에세이 모음집이다. 원시용과 근시용 두 종류의 안경을 바꿔 쓰는 번거로움, 발밑의 불안함, 이상해진 귀, 메모 능력 저하라는 생각이 들자 결론은 빠른 노화라는 한마디가 된다. 차곡차곡 쌓은 것은 세월과 나이 뿐인데 이것은 내 의지로 쌓아온 것이 아니라는 쓸쓸함이 있다. 몇 년 동안 생각만 하고 이루지 못한 일이 갑자기 일사천리로 끝날 때가 있다. 나무에게는 역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이 있는 것일까? 나무란 겉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존재이며, 동시에 나무는 한번 상처를 입으면 평생 그 상처의 고통을 몸 속에 품은 채 살아간다. - 나무는 중심부가 아니라 항상 바깥쪽에서 바깥쪽으로 새로운 나이테를 만들어가며 성장한다. 그래서 어떠한 상처도 그 상처 때문에 생긴 변형도 세월과 함께 안쪽 깊숙이 감싸 안는다. 감싸 안는다란 따뜻한 정을 내포하는 표현이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감상에서 시작된 이 글의 마지막 단락을 적어내려가는 지금 때마침 CBS 라디오에서 인터뷰 중이신 이재갑 교수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전공의도 없는 각 대학병원 응급실에서는 밤새 코로나 환자를 받고 있으며 개학을 앞두고 코로나에 대한 준비가 전무한 상황에 확진이 되어도 병가가 불가능한 직장인들은 검사 자체를 건너뛰고 있는 이 총체적 난국에 엠폭스까지 국내 유입이 예고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정 갈등 때문에 후배들을 붙잡을 힘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는 절망적인 내용이었다. 신종 감염병 초기의 그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한의계는 또 얼마나 속 태웠던가? 질병청의 관리체계에서 배제됨을 서운해 하면서도 자체 의료봉사로 국민들에게 다가가려 했었던 그 처절함은? 무기력함을 강요받던 그 긴 시간, 그럼에도 끈질기게 그 날들을 버텨냈기에 지금은 그 때 만큼의 두려움은 아닌 상황에서 코로나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환자분들을 지속적으로 만나고 있는 것이다. 삶은 늘 느닷없는 일들의 연속이고 나 혼자만의 잘못에 의해서가 아니라 많은 외부 환경에 의해서 갑자기 중단되고 침해받고 상처입는다. 루틴이니 낭만이니 예술이니 의식이니 숭고함이니 나불댈 수 있으려면 우리 모두의 평온한 일상 유지라는 기본값이 필요하다. 입추와 말복도 다 지나갔지만 “서울, 118년 관측 사상 최장 열대야”라는 8월 중순의 뉴스 제목처럼 올 여름은 유난히 징그러울 정도로 길고 더웠다. 2024년 6월24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서울대 환경대학원 정수종 교수의 『올 여름이 제일 시원할 것입니다』라는 칼럼을 한줄한줄 다시 읽으며 올해가 오늘이 우리가 살아서 겪는 가장 시원한 여름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신종 감염병의 출연이 끝없이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이제는 우리의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퍼펙트 데이즈가 파이널 데이즈가 되는 그 날까지 코모레비 찾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지금은 지금이고 다음은 다음이니까 !! -
신미숙 여의도 책방-54신미숙 국회사무처 부속한의원 원장 (前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 [편집자주] 향후 『신미숙의 여의도 책방』은 각 회마다 1개의 키워드에 5권의 도서를 추천하는 형식으로 이어갑니다 * 폭염과 폭우의 교차 속에 정기적인 야외 운동을 하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는 요즈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닝 대유행의 시기인 것만은 분명하다. 방콕을 능가하는 고온다습한 날들의 연속임에도 새벽-한낮-야밤을 가리지 않고 거리에서 러닝화에 러닝복을 차려입은 러너들을 아주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회에도 몇 개의 달리기 동호회가 이미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고, 최근 임기를 시작한 국회의장실 비서진들도 건강한 국회를 표방하며 러닝크루를 모집한다는 포스터를 게시하기도 했다. 리스프랑 손상(Lisfranc injury) 진단을 받고 1∼2개월 가까이 반깁스 하다풀다를 반복하다가 다친 날로부터 시일이 꽤 지나서 이제는 괜찮겠지하는 생각이 들어 러닝을 재개해보니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며 이런 경우에도 한의치료가 도움되냐는 환자 한 분이 내원하셨다. 본인의 증상을 말로 다 표현하기가 어렵다고 하길래 A4에 현 증상을 차분하게 기재해서 다시 내원해 주실 것을 요청드렸다. 그랬더니 일주일 후 “평소 걸을 때 발 아치 앞쪽 부분이 아프다. 기상 직후 첫 발을 내딛을 때 아치 앞쪽으로 기분 나쁜 묵직한 통증이 있다. 복숭아뼈 앞쪽이 자주 붓고 체중이 실리면 복숭아뼈 앞쪽으로 통증이 집중된다. 뛰면 아치 부분으로 통증이 좀 더 세게 느껴져서 뛰지를 못 한다. 발을 왼쪽 방향으로 회전시키면 처음 다쳤던 부위로 통증이 재현된다”라고 증상을 자세하게 적은 종이를 들고 다시 내원하셨다. 발등 통증의 흔한 원인 ‘리스프랑 손상’ 발등 통증의 흔한 원인 중 하나가 리스프랑 손상이며 이 진단으로 1개월 가까이 고정을 하셨어도 초기 고정이 불완전(반깁스 하다풀다를 반복)했거나 후기 재활을 제대로 안 하는 경우(반깁스 풀고 별다른 준비운동 없이 걷기뛰기를 시도함)라면 수개월이 지나도 실내외 짧은 보행만 가능할 뿐 정상 궤도의 러닝이나 본격적인 운동으로의 복귀가 어려운 경우가 꽤 많다고 설명드렸다. 날마다 5km씩 뛰었다길래 그 강도는 당연히 힘들고 기상 직후, 체중부하시, 실내보행시 느끼는 불편감이 거의 소실되어야 1km 단거리 러닝이 가능할테니 거리를 살살 늘려가면서 5km에 이를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다시 러닝을 시작했을 때의 마음으로 되돌아가 보시기를 권유했다.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족저이완을 위한 볼 마사지, 아킬레스건 강화를 위한 스트레칭 보드 스탠딩, 좌우 족관절 밸런스 증강을 위한 다이나믹 에어쿠션 운동법을 알려드렸고 호소하는 통증 부위에 침, 뜸, 사혈, 물리치료를 주 2∼3회 받기로 했다. 5회차 치료를 마무리한 후 다행히 1km 러닝에 성공했고 이 정도면 살살 늘려서 3km까지는 무난할 것 같다는 소식을 알려 오셨는데 무척이나 기쁜 마음이 들었다. 리스프랑 손상 뿐인가? 지간신경종, 족저근막염, 무지외반증, 반복적 염좌로 인한 발목 불안정성, 분쇄골절 후유증 등의 다양한 진단명과 그 진단명과는 또 다른 구체적이고도 개별적인 불편감을 안고 진료실을 내원한 분들의 공통적인 속내는 이 애매한 상태에 한의학적 치료가 도움이 될 것 같은 기대와 영 아닐 것 같은 의심 사이에서의 방황이다. 정형외과에서의 치료는 끝이 났지만 다친 부위는 여전히 불편한 데다가 원래 하던 운동으로 복귀를 못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까지 가중된 기분 나쁜 상태. 주변인들의 “이럴 경우에는 한의원을 가야지”라는 경험담에 떠밀려 누군가에게 끌려온 듯한 못마땅한 표정으로 내 앞에 앉아있는 환자들의 표정을 자주 목격한다. 그럴 때, ‘천천히 나누는 이야기는 모두에게 이롭다!’는 나만의 주문을 외우며 마음 탁 열어젖히고 그들만의 절박한 호소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많은 경우 환자들의 의심과 두려움은 확신과 안도감으로 바뀌어져 있다. “달리기는 고통스러운 행복” 학교 앞 원룸에서 자취를 하던 아들이 여름방학에는 본가에 머무를 거라며 키우던 고양이까지 대동하여 짐을 싸들고 나타났다. 일렉기타 레슨, 복싱, 영어 온라인 수업, 오프라인 스터디 등 방학 때 하려고 마음 먹었던 몇 가지 계획들을 늘어놓더니 “지난 학기 러닝 동아리 가입해서 밤마다 뛰었는데, 너무 좋더라구요. 러닝화 신고 운동장까지 나가기가 힘들지, 일단 나가면 뛰게 되는 게 너무 신기했어요. 어머니, 체력 테스트도 할 겸 저랑 오늘부터 뛰어보실래요?” “뭐? 달리기?”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진료실에서 만난 각종 발질환 환자들의 러닝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이었다. “네. 제가 배운 대로 알려드릴께요. 너무 걱정 마시고 살살 시작해 보시죠! 워밍업으로 스트레칭 좀 하시고요. 오늘은 첫날이니까 집에서 원마운트까지 살살 뛰었다가 복귀할 겁니다. 거리가 얼마일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뛰는 감각을 익힌다 생각하시고 제가 몇 가지 중간에 지침 드릴테니 새겨 들으시고요. 저도 이런 식으로 마라톤 풀코스를 몇 번이나 완주한 친구한테서 반학기 지도 받으며 밤마다 학교 운동장 뛰었거든요. 어머니께서도 그 기쁨을 느껴보셨으면 해요. 정말 재미있어요.” 종일 근무 후 피곤이 몰려올까 말까 하는 8시였지만 바람도 적당했고 한 쪽 손에 STRAVA 앱을 켠 핸드폰을 손에 든 아들이 코치를 해 주겠다고 저 앞에 턱하고 서 있으니 신발장 안에 잠자고 있던 운동화 먼지를 툴툴 털어내고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들과의 야간런이 시작되었다. 첫날은 4.19km를 33분 38초에 둘째날은 3.85km를 28분 56초에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는 3km만 뛰기로 하고 21분41초-20분 28초-19분 57초 등으로 기록을 수초씩 단축해가며 우리의 러닝은 점차 안정감을 찾아가고 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옆에서 “어머니 체력 좋으시네요, 잘 뛰시네요. 나이 대비 훌륭하세요. 하루종일 근무하시고 이 정도면 정말 대단하신 겁니다.” “숨 천천히 쉬시고 보폭 넓게 하세요. 발뒤꿈치에 체중 싣지 마세요.” 칭찬과 격려를 동시에 퍼부어가며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가며 옆에서 같이 뛰어주는 개인 코치가 있으니 이보다 더한 보약이 없다. 종아리와 허벅지는 당겨오고 땀은 비오듯 쏟아지지만 3km 러닝 후 더 이상 뛰지 않아도 되는 이제는 걷기만 해도 충분한, 바람에 모든 것을 흘려보낼 수 있을 것 같은 그 순간이 너무도 행복하다. 아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집으로 돌아가는 그 평화로운 시간을 위해 뛰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10km, 하프, 마라톤 풀코스를 뛰셨다는 진료실에서 만난 많은 환자분들을 생각하니 ‘리스펙트! 리스펙트!’ 이외의 그 어떤 다른 단어를 떠올리리요?! 평소에 걷기를 워낙 잘 하고 좋아하는 그래서 하루종일 걸어도 웬만해서는 지치지 않는 강철 체력임을 자부했었는데 걷다가 달리니 이것은 또 다른 차원이다. 뭔가를 차분히 생각하기에는 달리기는 적당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걷기 이상으로 꽤 많은 생각들과 아이디어가 퐁퐁 샘 솟는다. 그게 신기했다. 고통스러운 행복, 달리기에 관한 나의 한줄평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걷고 달리는 이 오래된 행위에 얽힌 철학자들의 성찰과 깨달음의 일화는 또 얼마나 많은가?!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프레데리크 그로, 책세상, 2014년 4월) 미셸 푸코 연구자인 프랑스 철학자 프레데리크 그로는 걷기를 철학적 행위이자 정신적 경험으로 정의하고 여러 명사들의 걷기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을 이 책에 모았다. 아르튀르 랭보는 “자, 길을 떠나자! 난 그저 걸어 다니는 사람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라고 했고, 장자크 루소는 “나만의 도보 여행에서만큼 많이 생각하고 많이 존재하고 많이 체험한 적은 결코 없었다. 나는 편안하게 걷다가 마음 내킬 때 멈춰 서는 것을 좋아한다”라고 하였다. “걷는다는 것은 현실을 체험하는 것이다. 걸을 때의 현실, 그것은 단지 땅의 견고함일 뿐만 아니라 걷는 사람이 스스로 얼마나 꿋꿋한지를 시험하기 위한 시련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걷기를 다룬 최초의 철학개론서 <산책Walking>의 저자로 매일 세 시간에서 다섯 시간씩 엄청난 거리를 걷는 위대한 여행가이기도 했다. 『달리기, 몰입의 즐거움』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샘터, 2019년 7월) 긍정심리학자 칙센트미하이가 말하는 몰입(flow)은 무언가에 흠뻑 빠져 있는 심리적 항태 즉, 물이 흐르는 것처럼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행동이 나오는 상태를 의미한다. 몰입(flow) 이론의 창시자로 오랫동안 인간의 창의성과 행복에 대해 연구해온 칙센트미하이 교수의 관심과 적용이 달리기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된 셈이다.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몰입 현상에 대한 다양한 사례와 심층 인터뷰가 실려있으며 심리학자 크리스틴 웨인코프 듀란소와 필립 래터러닝 전문 기자가 함께 썼다. “달리기를 하면 다양한 상황에서 몰입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고 몰입을 경험하는 빈도가 높아진다.” “이 책은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경험하는 몰입 현상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까다로운 일을 해내기 위해 모든 정신을 집중할 때 우리는 언제든 몰입이 주는 최상의 효과를 경험할 수 있다.” 『달리기와 존재하기』 (조지 쉬언, 한문화 멀티미디어, 개정판 2020년 4월) 심장병 전문의이자 러너인 조지 쉬언(1918∼1993)의 책으로 부제는 “육체적, 정신적 그리고 영적 경험으로서의 달리기”이다. 44세에 의사를 접고 학창 시절의 달리기에 다시 몰입한 결과 그는 새로운 몸과 삶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50대가 되어 1 mile(1.6 km) 달리기 세계 신기록(4분 47초)을 달성하였고 운동으로서의 달리기에 진정한 철학을 부여했다는 찬사도 받았다. 전립선암 투병 7년만에 조지 쉬언은 74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완전히 지친 몸으로 전해 오는 그 좋은 느낌” “달리기는 자신을 대상으로 한 깊고도 머나먼 싸움이다. 그 싸움을 통해 러너는 완벽해져야만 한다. 우리가 서로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는 건 경기가 끝난 뒤다. 필사적인 30분간의 달리기가 끝난 뒤에 우리는 눈빛으로 자부심과 행복감과 일치감을 나눈다.” “장거리 달리기를 통해 나는 내 몸과 다시 만났다. 그리고 몸에는 그에 걸맞는 마음이 자리한다는 걸 발견했다.” “몸 안에서 즐거워하라. 말로 설명하기 곤란한 만족감을 느껴 보라. 피곤하면서 동시에 새롭게 태어나는 느낌을 맛보라.” “달리기는 과제였고 혁명이었고 전환이었다.” “나는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 달린다.” “나는 내 나이에 맞서지 않는다. 달리기가 나를 대신해 싸워 이긴다. 달리기는 내 젊음의 원천이며 내 불로초다. 달릴 때 나는 영원히 젊은이다. 달릴 때, 나이가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달리면서 노는 일이 시간을 이긴다는 걸 나는 안다.” “내게는 달리기가 예술이다. 이 세상 모든 예술 중에서 가장 오래된 최고의 예술이다.” 『달리기의 과학』(크리스 네이피어, 사이언스북스, 2021년 1월) 캐나다 물리치료사이자 달리기 선수인 크리스 네이피어와 크리스의 마라톤 코치인 제리 지애크가 함께 쓴 책이다. 기록 갱신을 목표로 실전을 뛰는 선수로서의 근력 운동이나 훈련의 방법은 물론이고 운동 관련 부상 연구자 입장에서 부상의 위험과 부상을 방지하기 위한 각종 근육별 스트레칭과 운동 방법을 아름다운 해부학 도해와 함께 싣고 있다. “훈련 계획에 근력 운동을 추가하면 근육골격계통의 능력이 향상되어 달리기가 주는 부하를 조절할 수 있다.” “적절한 회복은 훈련 그 자체만큼이나 중요하다.” “대부분 건강과 체력을 위해 달리기를 시작하지만 점차 경주 실력을 향상시키고자 한다.” 사이언스북스에서 출간된 DK 운동의 과학 시리즈에는 『달리기의 과학』 이외에도 『요가의 과학』(2021년 1월), 『근력운동의 과학』(2021년 12월), 『고강도인터벌트레이닝(HIIT)의 과학』(2023년 12월)이 있다. 『걷기의 세계』 (셰인 오마라, 미래의 창, 2022년 6월) 뇌 연구자이자 철학자인 셰인 오마라의 저서로 걷기가 몸에 어떻게 좋은지, 뇌에 어떻게 좋은지 나아가 더 나은 사회와 문명을 만드는 데에 걷기가 기여하는 바가 있는지 혹은 걷기가 어떻게 우리가 생각하고 추론하며 기억하고 읽고 쓰는 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한 과학적 설명서이다. “두뇌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는 가만히 서 있든, 걷고 있든 몸과 뇌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살기 좋은 도시들의 가장 큰 장점은 걷기 좋다는 것이다.” “적어도 인간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걷기와 감정은 상호 연관성이 있고, 시사하는 바가 분명하게 나왔다.” “걷기는 기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만, 적극적인 걷기 운동이 걷기 중 또는 걷기 운동 후에 기분을 상승시키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걷기가 다양한 가능성이 있는 해결 방안의 탐색이 필수인 확산적 사고를 필요로 하는 문제들의 해결을 돕는다는 것을 시사한다.” “걷기 중이거나 그 이후이거나 두 가지 다 창의적 사고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걷기는 우리를 또렷한 사고를 할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벗어나 해결방안이 있는 곳으로 걸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달리기와 존재하기』에 실려있는 ‘매직식스 운동법’을 소개하고 싶다. 벽 밀기, 햄스트링 풀어주기, 몸 접기, 정강이 풀어주기, 넓적다리 강화하기, 무릎 굽히고 윗몸 일으키기로 구성된 동작을 모두 따라하면 6분 내외, 달리기 전후 실시한다면 12분을 투자하는 셈이다. 이 12분으로 우리는 근육을 고르게 발달시키고 피로골절에 대비할 수 있으며 러너들에게 흔한 질병인 발뒤꿈치 통증, 아킬레스건염, 정강이 통증, 달리기 무릎 통증, 좌골신경통 등을 완화할 수 있다. 운동 부상을 방지하기 위한 기본기만 잘 지켜도 각종 관철 척추의 그 많은 병리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기본기가 가장 어려운 것이다. 너무 쉬워보이기 때문이다. 달리기의 성자로 불리운 조지 쉬언(George Sheehan)은 “무엇을 하든 모든 힘을 기울이기를”이라고 당부한다. 걷기와 달리기의 미덕은 꾸준함이다. 가장 쉬워 보이는 기본기를 갈고닦는 꾸준함이 결국은 우리 모두를 살릴 것이다. -
신미숙 여의도 책방-53신미숙 국회사무처 부속한의원 원장 (前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 [편집자주] 향후 『신미숙의 여의도 책방』은 각 회마다 1개의 키워드에 5권의 도서를 추천하는 형식으로 이어갑니다 * ‘태국 길거리 음식의 재해석’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같은 인테리어를 갖춘 종로의 어느 태국요리 전문식당을 방문했었다. 예약은 필수였고 입장을 하고 나니 방문 계기를 묻기도 했고, 창맥주 대신 오늘은 태국요리에 딱 맞는 와인을 추천하고 싶은데 괜찮냐며 와인을 강매하려는 작전을 노출시키기도 했다. 직원들의 응대에서 뭔지 모를 불편감이 막 피어오르려 했으나 코스요리 말고 몇 가지 단품만 간단히 먹고 나가리라 다짐하면서 나는 그냥 얼음컵과 창맥주 한 병을 먼저 달라고 했다. 태국요리를 워낙 좋아하니 고수나 소스만 좀 넉넉하게 달라고 부탁했고 주문한 요리들이 줄지어 서빙되었다. 지름이 20cm는 족히 되어 보이는 밀짚모자 엎어놓은 형상의 널따란 접시의 정 중앙에 너무도 소박해 보이는 양의 팟타이가 올려져 있었다. 휙휙 집어드니 두어번의 젓가락질만에 바닥이 바로 보인다. 똠양꿍은 따뜻한 국물온도를 유지하기 위한 신선로 모양의 고유 그릇이 아닌 은색 쟁반 위의 은색 국그릇 세트에 담겨져 나왔다. 고수는 파슬리처럼 한두어개 올려져 있었던가 고수가 아예 없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똠양꿍은 뜨거운 온도가 생명인데, 나오자 마자 식어버렸다. 그 흔한 로띠마저 가장 파삭할 지도 모르는 상하좌우의 네 면을 잘라내어 버리고 정중앙을 직사각형으로 6조각 내어두고 위에 별모양으로 만든 바나나를 살포시 올려놓았는데 그 터프하면서도 진득한 로띠의 맛이 아니었다. 이런 수준의 로띠에 만 오천원을 받는 걸 보고 ‘이런 미친!’, ‘Oh, shit!’이 입 속에서 메아리쳤다. 실망 가득했던 종로에 위치한 태국요리집 이 집은 태국 길거리 음식의 재해석이 아니라 태국 외식물가의 한국적 가격 올려치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가성비도 가심비도 기대 이하였던 이런 집에는 별점테러가 약이겠지만 나쁜 이용후기는 쓰지 않는 것이 나의 원칙인지라 ‘나만 다시 안 가면 되지 뭐…’라며 사장의 또 오시라는 90도 인사를 애써 무시한 채 쓩 나와버렸다. ‘저런 실력으로 어떻게 식당을 열었을까? 인테리어가 고급지고 오픈주방이라 깔끔해 보이고 와인 몇 병 가져다놓으면 사람들이 마음과 입과 지갑을 열 수 있을거라 생각했을까? 어림없지. 절대로 오래갈 수 없는 식당이야. 저런 식당은 벌 좀 받아야 해!!’하는 저주의 화살을 마음 속으로만 수백개 날려본다. 가성비 최악이었던 종로의 그 태국음식점 때문이었을까? 6월 초에 3박4일의 여행이 가능한 일정이 나오자마자 ‘가자, 방콕으로!’를 실천에 옮겼다. 저가 항공 비행기 예약 완료, 지상철인 BTS 수라삭역과 호텔 3층이 연결되어 있다는 편한 접근성에 인피니티 풀까지 갖춘 가성비 만점 호텔도 예약 완료! 3박4일 일정에 맞춰 택시나 툭툭이가 아닌 대중교통으로 도달할 수 있는 식당, 카페, 쇼핑몰, 마사지샵, 공원 위주로 나만의 일정과 동선도 꼼꼼히 짜보았다. 야시장이나 노점상 대부분은 ‘위생은 개나 줘버려’와 ‘파리와 나눠 먹으렴’ 혹은 태국의 평균 기온을 감안할 때 ‘이거 먹다 더위를 함께 먹어도 우린 책임 음슴’의 3대 원칙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만 열려있는 곳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외에서의 식사를 포기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가성비였다. 또한 ‘한 번 뿐인데, 여기 오가는 비행기표값이 얼마인데, 이 정도는 감당해야 여행이지! 이게 낭만이지! 이게 로컬 갬성이지!’라는 난데없는 낭만 제일주의는 여행자들의 마음의 빗장을 해제시키는 가끔은 위험한 징조이기도 하다. 실내인지 실외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후텁지근한 공기, 그 습도 가득한 무더운 뿌연 공기와 바깥 매연이 섞여서 돼지고기와 닭고기가 직화구이가 되고 있는 건지 지금 내가 통구이가 되고 있는 건지 혼동스러움의 절정, 연신 땀을 훔쳐가며 끝도 없는 고깃덩어리들을 구워내던 덩치 큰 남자직원의 현란한 손동작, 식당 입구 쪽의 커다란 고무통 얼음박스 안에 얼음주걱과 얼음 덩어리들이 함께 뒹굴고 있었던 놀라운 광경, BBC에도 소개되었다던 방콕 맛집 영상 속의 그 유명한 쏨땀 할머니가 방금 온갖 재료들을 넣고 주물주물 했었던 일회용 장갑을 그대로 돈통을 휘적휘적 거리시더니 거스름돈을 직접 내어주신던 그 과감한 친절함. 직화구이 화로가 식당 안에 위치하는 에어컨 따위는 없는 그 정신없고 시끄럽고 비위생이 철철 넘치던 식당을 가득 채운 손님들을 그리로 이끈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쏨땀의 장인으로 소개된 분의 식당인데도 비싸지가 않았고 사람들이 바글대는 유명한 맛집에 일단은 착석을 해 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땀뻘뻘 흘리면서도 얼음컵에 넘치게 따라마시는 맥주가 목구멍만큼은 더위순삭이니 가성비와 가심비 다 챙기고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서도 식사를 할 때와 마찬가지로 무덥기는 매한가지라 초월적 고온다습이 특징인 방콕에게서는 뭐랄까 ‘불평할 거면 오지마!!’라는 자신감마저 느껴진다. 현재 한의의료기관의 가성비는 어떨까? 6월이라 그런지 한여름 대비 몸짱 준비기라 그런지 유독 라켓운동과 웨이트 트레이닝 과정에서의 과사용으로 어깨통증 환자분들이 많이 오신다. 오른쪽 어깨 오십견으로 2∼3년 전 고생하셨다가 우리 진료실에서 잘 나으셨던 한 직원분이 최근에 다시 오셨다. 외부 파견으로 국회를 떠나 있었는데 그 와중에 보고서 쓰다가 이번에는 왼쪽 어깨에 통증이 생겨서 일요일도 진료하는 집 근처 통증의학과 다녀오신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장사보다는 치료를 하는 병원을 찾기 드문 요즘 정말 좋은 곳을 한 군데 우연히 알게 되어서 원장님 혹시 양방으로 의뢰할 일 있으시면 이 쪽으로 해보셔도 좋을 것 같다고 병원을 알려주시는데 너무 고마운 정보였다. 골절 의심되는 급성 손상의 경우 의뢰서를 써서 바로 전원을 시켜야 하는데 여의도역까지 나가면 모를까 국회의사당역 근처에는 그야말로 보낼만한 병원이 없다. 정기적으로 의뢰를 하는 곳은 선유도역 쪽인데 당장 이동수단이 애매한 경우에는 국회 건너편 횡단보도 건너서라도 하나 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작년엔가 젊은 남자의사들 세 명이서 공동 개원한 재활의학과 한 군데가 문을 열기는 했다. 그런데 다녀온 직원들 대부분이 실비보험으로 돌아가는 병원이라 그런지 입장하자마자 보험 가입 여부를 묻고 손목 통증으로 골절 여부나 알아보려고 들어갔다가 28만원을 내고 나왔다는, 다른 직원은 무릎이었는데 도수치료까지 120만원을 부르길래 그냥 돌아섰다는 등의 후기 뿐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장사가 아닌 진짜 치료를 하는 병원 정보라니!! 원장님 한 분, 간호사 한 분 계시는 시장통 옆 허름한 건물 3층에 위치한 곳으로 엘리베이터도 없고 주차는 불가하단다. 초음파 진단 후 주사치료 회당 2∼3만원, 주 1회, 3회 연속이 원칙. 체외충격파나 도수치료실 없고 갈 때마다 환자들은 대기실에 1∼2명, 대기 없이 바로바로 치료 가능. 예약은 불필요. 이 병원 없어지면 어떡하나 걱정이 들었지만 본인처럼 그 원장님의 진정성과 실력을 맛본 사람은 계속 갈 병원이라고 평가했다. 한방 병의원들의 가성비는 어떨까? 종로의 겉보기에만 멀쩡했던 태국 식당처럼 외양만 유독 번지르르한 곳도 있을 테고 방콕의 로컬 맛집처럼 위생이나 시설은 그저 그렇지만 맛 하나만큼은 분명한 곳도 있을 것이다. 실비보험으로 유지되는 곳은 그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을 테고 간호사 한 명과 제한된 시공간에서 사투를 벌이듯 가성비 최고의 치료를 해내며 하루하루 버티는 곳도 분명 있을 것이다. 특히나 요즘은 고액의 비보험 치료비에 대한 수납저항도 만만치 않은 데다가 수납 이후 병의원을 오가는 환자들의 만족도가 기대 이하일 때 자칫 컴플레인이나 악플테러로 혹은 유사 의료사고 비슷한 의료진-환자가족간의 갈등으로 비화되는 경우도 적지 않은 듯 하다. ‘약값, 치료비 그 값어치를 제대로 하고 있나?’ 입원환자들을 보던 시절 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질문이었다. 그랬다가도 큰 문제 없이 호전되었다는 상호간의 교감 후에 무사히 환자를 퇴원시키는 그 날 아침의 회진만큼 마음 편한 순간은 없었다. 개운한 맛, 그렇다. 그보다 더한 깔끔한 맛은 없다. 『인생의 맛』 (앙투안 콩파뇽, 책세상, 2014년 9월) 2012년 여름 프랑스의 국영 라디오 채널의 ‘몽테뉴와 함께하는 여름’이라는 방송 대본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이 대본을 쓰고 방송을 진행한 앙투안 콩파뇽은 프랑스의 대표 지성이다. 몽테뉴의 사상을 짧지만 밀도 높게 소개하고 있다. 직무를 수행한답시고 변하다 못해 새로운 존재, 새로운 얼굴로 완전히 탈바꿈하는 자들이 있다. 간과 창자 속까지 고관대작이 되어 화장실에 갈 때조차 직위를 끌고 가는 자들 말이다. 나로서는 그런 자들에게 자연인으로서의 그들에게 보내는 경례와 그들의 직무나 수행원들 혹은 허울에 보내는 경례를 구별하는 법을 가르칠 재간이 없다. 이들은 자신의 행운을 과신한 나머지 본질을 잊는다. 그런 자들은 영혼과 본연의 말투까지 관직의 높이에 따라 부풀리고 과장한다. 『쓴 맛이 사는 맛』 (채현국, 비아북, 2015년 2월) 채현국(1935∼2021)님이 구술하고 정운현님이 기록한 책. 효암학원(개운중학교와 효암고등학교, 경남 양산 소재)의 무급 이사장으로 <창작과 비평>의 영원한 후원인이었던 ‘시대의 어른’으로 불리웠던 채 선생님의 인생 이야기. 삶이란 끊임없이 묻고 배우고 깨우치는 과정이다. 처음엔 누구도 삶을 알 수 없다. 그저 그렇게 사는 것이 삶이다. 삶이란 삶을 사랑할 줄 알게 되는 과정이다. 다만 그저 아는 게 아니다. 수많은 갈등과 반복, 그 과정에서 피 터지게 싸운 결과, 우리는 삶을 사랑하게 된다. 삶이 때로 공허하고 저주스러운 것은 그만큼 사랑할 가치가 있다는 반증이 된다. 삶을 사랑할 줄 알게 되면 이제 운이 트인다. 단맛이든 쓴맛이든 삶은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실패를 연속하는 것이야말로 행복으로 가는 과정이다. 국문학자 구중서 선생은 친구 채현국의 일화에 대해 책 『면앙정에 올라서서』의 ‘서울의 뒤안길’ 챕터에서 “어떤 친구가 빙판에서 넘어져 팔꿈치에 물집이 생기고 쉽게 낫지 않으면 팔을 끌고 저 장위동 넘어가는 고갯마루 한의원에 가서 한약을 지어준다. 그 약을 달여 먹으면 이상하게 쾌유가 된다” 라고 기록했다. 『어른의 맛』 (히라마쓰 요코, 바다출판사, 2016년 9월) <취중만담>, <바쁜 날에도 배는 고프다>, <혼자서도 잘 먹었습니다>, <한밤중에 잼을 졸이다>, <손때 묻은 나의 부엌> 등 작가의 다른 책 제목들만 훑어보아도 작가의 주된 관심사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4시 정각. 일하러 가기 전에 가볍게 맥주 한 잔. 갑작스러운 노선 변경에 흥분한 나머지 찌는 듯한 더위가 단번에 물러간다. 아직 해가 높이 또 있는데 술을 마시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번듯하게 일하고 계시는데 이런 시간에 벌써부터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다. 헤헤. 이것 참 죄송하네. 딱히 어려워할 사람도 없는데 왠지 모르게 죄송스러운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것을 능가하는 감정은 우월감이다. 아무도 모르게 나만 사치를 부리고 있다는 특별함이다. 캬. 좋다. 기가 막힌 술맛에 자랑스러운 기분이 더해진다. 『나이 드는 맛』 (존 릴런드(John Leland), 웅진지식하우스, 2018년 11월) 기자 존 릴런드가 <New York Times>에 연재한 6부작 시리즈 <85 & Up>을 기반으로 쓰여진 책으로 85세 이상의 노인 여섯 명과 1년에 걸쳐 진행한 인터뷰를 통해 그 나이가 되어야만 깨달을 수 있는 삶의 지혜를 기록하고 있다(“가끔 나는 내가 아흔한 살이라 기뻐, 다 끝났쟎아.” 루스 윌리그 91세, “희망이 없는 일은 없어. 나는 희망이 없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요나스 92세). 초고령자들은 더 나은 뭔가를 찾아 애태우지 말고 할 수 있을 때 꼭 붙잡으라고 알려준다. 그들은 헛된 꿈을 꿀 시간이 없다. 아직 시간이 있다는 믿음도 헛된 꿈이다. 초고령자들은 모두 자신이 젊었던 시절을 동경하는 대신 스스로를 가장 자기자신답게 만드는 것에 집중했다. 다시 말해 자신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모든 순간은 행복할 수 있는 기회였다. 초고령자들은 자신을 할 수 없는 것이 많은 몸이 아니라 할 수 없는 몸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전략을 가진 몸으로 간주했다. 초고령자들과의 대화는 점점 죽어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가는 이야기에 관한 토론이 되어갔다. 『요즘 사는 맛』 (김겨울 외. 위즈덤하우스, 2022년 2월) 밥심으로 산다는 12명의 작가들의 최애 음식 이야기를 모은 에세이집. 끌리는 제목 덕분일까? 모두가 좋아하는 읽는 먹방이어서일까? 2023년에는 『요즘 사는 맛 2』 도 이어서 출간되었다. 가족과 이렇게 살다보니 가장 기본적인 존중은 식성의 존중이며 가장 멋진 공유는 식탁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강요받지 않음과 동시에 강요하지 않을 것. 그리고 다채로운 식탁을 인정하는 것. 요즘 시대, 우리가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중요한 첫걸음이 아닐까. 채식이 불편하지 않게, 눈치 보이지 않게, 내가 먹고 싶은 걸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는 환경 말이다. 우리에게는 먹을 권리와 먹지 않을 권리가 함께 있으니까. (소설가 천선란) 나는 늦은 만큼 열심히 하는 타입이라서 이제야 나를 너무나 좋아하기 시작했다. 살수록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너무 좋다. 구운 버섯을 씹으며 내일은 발사믹 비네거를 뿌려서 구워보자고 중얼거린다. 먹는 기쁨은 이렇게 아주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쌓여 간다(삽화가 임진아). 한의학적 접근법에는 가성비보다는 가심비를 충족시켜주는 치료들이 많다. 이렇게 환자들에게 정성스러운 대화와 맞춤과 배려와 사랑과 따뜻함과 보살핌과 애정과 시간을 들이는 치료는 없다. 그 어디에도 없다. 가성비, 갓성비에 이어 이젠 가심비까지 챙겨야 마케팅의 성공이라고 하니 의료를 포함한 모든 분야가 만만치 않은 시대인 것만은 분명하다. 한 후배는 “선배, 우린 너무 친절해. 그게 탈이야. 환자들이 얕보고 별거별거 다 요구하고, 의사들한테 못 다한 이야기 다 터놓고 물어보고 우릴 도대체 뭘로 보는걸까?”라고 푸념한다. “그게 한의사 역할일 수도 있지. 일차진료 아니면 양방에서 더 이상 해줄 게 없는 경우에 비로소 부여되는 뒤치다꺼리같은 역할이어도 골목골목에서 요소요소에서 한의사들은 분명 요긴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해.” 방콕에서 구입해 온 HOTTA 생강차와 말린 망고를 먹으며 우린 그후로도 긴 대화를 이어나갔다. -
신미숙 여의도 책방-52신미숙 국회사무처 부속한의원 원장 (前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 [편집자주] 향후 『신미숙의 여의도 책방』은 각 회마다 1개의 키워드에 5권의 도서를 추천하는 형식으로 이어갑니다 * ‘위험의 외주화’라는 말이 있다. 2023년 11월9일 민주당과 정의당 주도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노란봉투법.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법 제2·3조 개정안을 말하는 해당 법안은 2014년 법원이 쌍용차 파업 노동자들에게 47억원의 손해배상 판결을 내리자 시민들이 이를 돕기 위해 성금을 모아 노란봉투에 전달하면서 ‘노란봉투법’이라는 별칭이 붙었으며, 이 법은 하청노동자 노동 조건에 실질적 영향력을 지닌 원청으로 단체교섭 대상을 확대하고, 쟁의행위(파업)를 이유로 한 회사의 무분별한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소설가 김훈은 ‘생명안전 시민넷’의 공동대표를 맡으며 산재사고 사망자 문제에 무감한 정부와 사측을 비판하는 강연과 시위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매년 산업현장에서 2300명이 죽어나가는 이 사태를 해결하는 일보다 더 시급한 과제는 없다. 이 거듭되는 무수한 죽음을 계약의 자유나 경영의 합리화라는 이유로 정당화하는 논리는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야만으로 돌아가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노란봉투법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거부권’이라는 단어가 동시에 연상되었다면 2024년 5월, 이 법의 처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돌봄의 외주화’라는 표현도 최근 더 자주 들린다. 외국인 육아도우미 도입에 대해서 2022년 12월 현 서울시장이 그 필요성을 제기한 이래 최근까지도 그 실효성을 두고 각계각층의 갑론을박이 계속되고 있다. 『月 200만원에 ‘동남아 이모님’? 외국인 가사도우미 ‘뜨거운 감자’』(동아일보, 2023년 5월18일), 『간병·육아 ‘외국인 도우미’ 도입, 사회적 공론화 나서야』(연합뉴스, 2024년 3월5일) 돌봄의 순서와 중요도에 어찌 선후를 따지랴마는 나이 쉰을 앞두고 보니 육아 돌봄은 내게는 과거의 일이라 잠시 차치해두고 어르신들의 돌봄에 마음이 쏠린다. 이는 당장 내 앞에 닥칠 문제이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환경 속에 가족돌봄의 방향은? 경향신문 칼럼 <김택근의 묵언>에서 시인 김택근은 “다시 어버이날이 돌아왔다. 어머니는 지금 요양병원에 계신다. 설 쇠고 며칠 후 낙상하여 고관절이 골절되었다. 결국 며느리와 아들이 갈아주는 기저귀를 차야만 했다. 누구의 손길도 마다하고 혼자 죽을 힘을 다해 당신의 몸을 씼었건만 이제 움직일 수 없다. “왜 이리 안 죽냐, 무슨 죄가 많길래.. 참말로 이런 날이 올지는 몰랐다.” 마른 몸에도 욕창이 생겼다”라고 어머니의 투병기를 기록했다. 또 한겨레신문 칼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에서 한양대 의대 신영전 교수는 “그래도 힘들었던 것은 기저귀 수발보다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시는 어머니의 몸과 행동에서 얼마 후 내 모습이 겹쳐 보이는 순간이고, 하루에도 몇 번씩 화장실 밖에서 멍하니 기다려야 할 때였다. 그때 한 청년 간병인이 만든 “이 일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라는 주문을 반복해서 읊조렸는데, 도움이 되었다”라는 간병일지를 기고하기도 했다. 올해 어버이날에는 처음으로 친정 아버지께서 부재하신 가운데에서 가족 모임을 했다. 작년 9월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경미한 당뇨와 심박조율기 착용 중이라는 짧은 두 줄이면 아버지를 설명하는 병력으로는 충분했다. 멤버 대부분이 40, 50대였던 장가계 패키지 여행을 칠순 연세에도 거뜬히 소화하셨던 체력 짱짱한 어르신이셨다. 우리 아버지야말로 백세를 사실만한 분이라고 우리 가족들은 모두 확신했다. 그러던 아버지께서 두 번의 코로나와 원인불명의 고열을 몇 차례 겪으시더니 몸무게의 앞자리가 7에서 6으로 다시 6에서 5로 쪼그라들며 쇠약의 내리막길을 힘겹게 걸어가고 계셨다. 가장 가까이 사는 거기에 한의사 딸이라는 이유로 아버지는 내게 유독 큰 부담과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나는 지금 아버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출근을 하든 퇴근을 해서든 24시간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듯 했다. 아침 저녁으로 문안을 드리고 아버지 상태를 개선시키기 위한 내 차원에서의 한양방협진과 여러 치료법들의 콤비네이션을 쏟아부었다. 아버지 상태에 따라 나의 감정 또한 일희일비 되는 그러한 일상이 1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2023년 중순까지는 그래도 간단한 산책과 외식이 가능하셨던 아버지께서 2023년 7월 말 기침과 고열이 지속되셨다. 어쩔 수 없이 대학병원으로 모셨고 진단명은 흡인성 폐렴이었다. 2주 후 열은 잡혀서 퇴원 권고를 받았지만 엘튜브를 뺄 수 없는 상태라 폐렴 재발의 위험이 있었기에 집 근처 폐렴 관리가 가능하다는 요양병원으로 다시 입원을 하시게 되었다. 공동 간병인 제도를 운영하는 곳이라서 가족들은 주 1회만 면회가 가능했다. 어머니는 서운함과 미안함에 연신 눈물을 닦아내셨지만 어머니에게도 휴식이 필요했다. 다음 주 면회 순번을 정하는 어느 일요일의 가족 모임, 바로 그 다음 날은 아버지 입원이 5주차에 접어드는 월요일이었다. 그 날 새벽, 당직의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임종에 임박하신 것 같다는 연락이었다. 나는 곧바로 병원으로 내달렸고, 막내동생과 어머니가 이어서 도착했다. 임종의 순간은 나와 어머니가 지켰다. 9월4일 새벽 4시57분이었다. 아버지 없이 처음 보낸 어버이날 그렇게 아버지는 78세를 일기로 우리 곁을 떠나셨다. 지방 고등학교 교사의 얇은 월급봉투로 한 아내와 다섯 딸들을 지켜내신 나의 아버지. 점진적 쇠약의 기간은 1년이었으나 병원 생활은 딱 6주 하신 셈이었다. 몇 년 전, 불필요한 연명치료를 받지 않으시겠다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두셨고 장례식에 대해서도 딸들, 사위들, 손자손녀 이외의 다른 친척들을 포함한 일반 조문객들을 받지 말라는 당신 바람을 우리 모두에게 분명히 밝히신 바 있으셨다. 아버지 뜻에 따라 우리는 인근 장례식장의 가장 작은 방으로 아버지를 모셨고 “아빠의 다섯 딸”이라는 조화 화분 하나만 세워둔 채, 우리 가족들만의 조용한 장례를 치루었다. 덕분에 우리 가족들은 돌봄 노동으로 인한 고생 혹은 갈등, 그 맛도 보지 못했다. 아버지를 그리 보내드리고 나니 진료실에서 만나는 많은 환자들의 부모님 이야기가 그냥 지나쳐지지가 않는다. 15년째 요양병원에 계시는 아버지를 2주에 한 번씩 뵈어야 해서 격주로 영주에 다녀와야 한다는 직원분은 지방을 다녀온 다음 주의 월요일에는 요통이 도져서 꼭 진료실에 들르신다. 20년째 치매와 암으로 집에서 돌봄을 받고 계신다는 어머니를 둔 보좌관 한 분은 여동생이 직장을 그만두고 요양보호사와 교대로 어머니를 돌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간병비와 동생 수고를 줄이는 최선의 방법을 아직도 모르겠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끝까지 잘 모시고 싶은 마음 뿐이라며 자주 눈물을 흘리곤 한다. 『누구도 홀로 외롭게 병들지 않도록』(줄리안 아벨, 린지 클라크, 남해의 봄날, 2021년 7월) 영국 사회를 뒤흔든 프롬(Frome) 마을의 컴패션 프로젝트의 기록. 의사가 개입하지 않으면 환자가 죽는다는 신념은 의료진을 영웅, 곧 해결책을 아는 유일한 존재로 여기는 생각과도 연결된다. 하지만, 각종 연구 결과에 따르면 장수와 관련해서는 친밀한 관계가 건강에 미치는 유익이 의사가 처방하는 그 어떤 약보다 뛰어난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컴패션 공동체 의료 서비스 모델은 질병을 개인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독립적 사건으로 보지 않는다. 질병은 일련의 사건과 결과가 축적되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진료실에서 현재 하는 일을 더 많이 하는 것만으로는 여러 국가의 의료 서비스가 맞닥뜨린 조직적 남용과 과밀화, 급격한 비용 증가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노년 끌어안기』(로르 아들레르, 마음산책, 2022년 3월)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로르 아들레르의 저서로 “저자가 일흔에 써내려간 노화에 대한 우아하고 창조적인 탐구”이다. 부모의 죽음을 보는 건 자신의 종말을 전보다 훨씬 강도 높게 느끼는 일이다. 이제는 자신이 ‘맨 앞줄에’서는 것이다. 이 느낌은 이후 우리 경험의 일부가 될 것이다. 20세기의 큰 진척은 노화와 건강이 함께 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무한히 늙을 수는 없다. 왜 의학은 우리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지 않기를 바라도록 가르칠까? 물론 죽음을 멀리 물리치는 것이 의학의 의무이긴 하지만 그러면서 의학은 죽음이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고 본질적으로 삶의 끝이 아니라는 생각을 퍼뜨린다. 어떤 이들이 우리에게 약속하는 초인적 완벽이라는 유령을 멀리하고, 취약하고 상처 입은 존재들을 칭송하고, 우리의 감각과 감정을 훈련하고 삶의 한계를 내몰고 죽음을 실패로 내몬다고 믿는 일부 의학의 홀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고 우리의 유한성을 받아들이자. 『어머니를 돌보다』(린 틸먼, 돌베개, 2023년 10월) 미국 소설가 린 틸먼의 저서로 11년에 걸친 어머니의 투병과 간병에 대한 기록. 그것은 가혹한 의무이기도 했다. 그 11년은 좌절의 연속이었고 배움의 과정이었으며 이상하게도 깨달음의 시간, 일종의 병적인 깨달음의 시작이었다. 어머니는 계속 돌봄이 필요한 상태였으므로 의식적으로 불침번을 서야 했고, 어쩔 수 없이 무의식적으로도 불침번을 서고 있었다. 어머니는 시체만큼이나 무거운 짐이 되었다. 어머니의 곤경은 내게는 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짐이 되었다. 우리 자매들은 서로를 놓지 않았고 우리의 목표는 어머니를 가능한 한 오랫동안, 최대한 건강하게, 이 세상에 살아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생명력은 빠른 속도로 감소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존재하고 있었다. 겨우 존재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1년이라는 짐, 어머니라는 짐이 떠났다. 『돌봄, 동기화, 자유』(무라세 다카오, 다다서재, 2024년 3월) 자유를 빼앗지 않은 돌봄이 가능할까? 요양시설의 한 어르신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차라리 죽고 싶어. 하지만 스스로 죽는 건 못 해. 죽지 못하니까 밥은 먹어야 해. 하지만 밥을 먹는 것도 힘들어. 어차피 밥을 먹어야 한다면 맛있는 걸 먹고 싶어”라고 호소한다. 인지장애 고령자들의 자유와 인권을 우선하여 당사자가 본래의 생활 리듬대로 살다 평온하게 임종하도록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요리아이’노인 요양시설의 총괄소장 무라세 다카오의 돌봄 현장에 대한 속 깊은 사색의 생생한 기록. 돌봄에서 동기화는 ‘둘이 함께 지금 여기를 인식하는 것’이다. 모든 생명은 배설됩니다. 그 과정 속에 나는 살아 있습니다. 먹고 배설하는 것 만으로 존재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돌봄은 그 과정을 마지막까지 돕는 일입니다. 오늘날 돌봄은 직업으로서 인기가 없습니다. 힘든 일이라는 인상만이 두드러져 있습니다. 『OLD, 올드』(홍승우, 트로이목마, 2024년 5월) 한겨레 신문에 가족만화 『비빔툰』을 14년간 연재했던 만화가 홍승우의 작품으로 80대 노부모와 50대 아들의 동거를 다룬 네이버 웹툰이 단행본으로 나왔다. 지금 아버지의 노환은 끝을 향해 가고 있다. 어머니는 지금, 그런 초고령 노인을 먹이고 기저귀 가는 노인요양보호사 역할을 하고 계시다. “그 일을 자식한테 맡기면 내가 속이 편하겠니? 남편이 요양원에 있으면 내가 속이 편하겠니? 내가 여력이 되는 한 내가 할 거야.” 아버지가 60대 중반쯤 뇌경색으로 쓰러지셨을 때도 어머니는 끝까지 아버지 병수발을 감당하셨다. 뇌경색으로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아버지를 회복시키고 40년간 당뇨병을 앓아도 합병증 없이 살게 해 준 사람. “네 엄마 덕에 인생을 두 번 산다. 네 엄마 아니었으면 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야.” 평생 외로움과 전쟁과 실패로 점철된 인생을 사신 아버지. 그런 사람을 끝까지 한 가장으로 지켜 준 어머니. 나는 아버지도 이해되고 어머니도 이해된다. 단지 지독히도 힘들었던 인생의 막바지, 늙음과 서러움 사이에서 불안과 두려움이 우리 주위를 배회하고 있을 뿐이다. 2025년 대한민국은 인구 5명 중 1명이 만 65살 이상의 노인인 초고령사회로 진입한다. 현재 1인 가구 비율은 34%에 도달했다. 이들이 노년이 되었을 때 우리 사회의 돌봄 인력은 충분할까? 신규 한의사들을 반기는 곳은 요양병원이 유일하다고 한다. 최근에는 그 요양병원 봉직의 자리도 많지 않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들린다. 나를 고용해주는 곳이 없길래 그냥 좀 무리해서 병원을 차렸다는 후배도 있다. “요양병원이 꿀(?)이던 시대도 지나가고 있지만 뭐 어쩌겠어요? 그래도 한의원보다는 수익이 나을 것 같아요!”라며 곧 70대 중반의 내과 의사 한 분과의 인터뷰가 잡혀 있다고 서둘러 전화를 끊는다. 80대 후반의 건강한 어르신도 봉직의 면접에 나타나는 게 요즈음이라 연봉 협상만 잘 되면 그래도 70대라면 완전 땡큐인 입장이라고 한다. 환자 1명이 1년에 첩약 건강보험을 적용받을 수 있는 범위는 2개 질환, 각 질환별로 20일까지(기존 10일)로 늘었다는 『오늘부터 알레르기 비염 한약도 건보 적용』(한겨레, 2024년 4월 29일) 소식에 한의계에 숨구멍 좀 트이나 싶다. 그러다가 애플 비전프로의 수술 적용(『‘애플 비전프로’ 쓰고 실제 척추 수술 진행한 英 의료진』, AI포스트, 2024년 3월13일)과 일론 머스크의 뉴럴링크 임상실험(『“한번 써보면 멈출 수 없어” 사지마비 환자 뇌에 칩 이식‥결과는?』, MBC, 2024년 5월18일) 같은 뉴스를 동시에 읽고나니 호흡이 빨라진다. 한의계의 오밀조밀한 현안들이 시대를 그리고 세계를 뒤흔들 획기적인 기술의 발자국에 밟혀 사라지기 일보직전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위기의 칼날 위에서 화끈한 존재감은 아닐지라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어찌어찌 버텨오고 있기는 하다. 1993년 한의대에 갓 입학했을 때부터 2024년 오늘날까지 한의계는 늘 위기였다. 이 위기의 칼날 끝에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게 되는 5월을 보내며 아버지의 부존재의 날들을 지나치며 놀라운 속도로 끝을 향해가는 모든 존재들의 흥망성쇠를 떠올려본다. -
신미숙 여의도 책방-51신미숙 국회사무처 부속한의원 원장 (前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 [편집자주] 향후 『신미숙의 여의도 책방』은 각 회마다 1개의 키워드에 5권의 도서를 추천하는 형식으로 이어갑니다 * 총선이 끝났다. 각 지역의 벚꽃축제 절정기와 거의 정확하게 스케쥴이 겹쳐서일까? 2024년 총선의 선거운동(election campaign)은 유난히 짧고 굵게 끝나버린 느낌이다. 최종 성적표를 받아든 당사자들은 승리에 잠깐 도취되어 있거나 혹은 패배로 인한 좌절감으로 괴로우시겠지만 이 굳건한 희비의 쌍곡선 또한 어느 시점에서는 반드시 교차되기 마련이므로 교만도, 절망도 그 농도를 빨리 희석시키는 분들에게만 향후 4년간의 심신 건강이 보장될 것이다. 주요 신문의 서너페이지에 실린 300명의 당선자들을 한분 한분 들여다본다. 나도 모르게 의사 출신 의원들의 숫자를 세어보고 있다. 총선 직전, 의대정원 2000명 증원에 따른 의정갈등 사태에 대한 반향 덕분일까? 22대 국회의원 중 의사 출신은 8명으로 20대 4명, 21대 3명에 비하더라도 역대급이다. 간호사 출신도 두 명이다(치과의사 1명, 약사 1명, 한의사 0명, 수의사 0명). 지지 정당을 떠나 사심을 듬뿍 담아 응원했던 몇 분이 아쉽게도 낙선하셨다. 대신, 수년간 얼굴을 봐 와서 많이 익숙해진 주요 정당의 당직자 몇 분들과 잠시 국회 파견을 나왔다가 진료실에 서너번 들르신 인연으로 인사는 하고 지냈었던 행정부 공무원 몇 분을 명단에서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이제는 국장님, 실장님, 부원장님이 아닌 ‘의원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한다. 아직은 호칭이 입에 찰싹 달라붙지 않지만 이내 익숙해질 것이다. 스포츠 손상으로 인한 급만성 통증환자 ‘급증’ 이 바쁜 선거운동 기간에도 큰 이벤트가 없는 평온한 시기에도 한의사들을 찾는 주요한 환자층은 뭐니뭐니해도 스포츠 손상으로 인한 급만성 통증 환자들이다. 일주일에 2∼3가지 종목을 번갈아 연습을 하고 하루라도 운동을 하지 않으면 스트레스가 풀리지 않아서 잠을 못 이룰 정도로 운동에 열심인 분들이 많다. 밖에서는 세상 편해보이는 정년 보장 땡보직 공무원일지 모르겠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충 없는 직급 없고 급여든 연금이든 공무원들의 기를 죽이는 여건은 차고 넘친다. 상대적 박탈감 혹은 지속적인 야근 때문인지 공무원들도 신체정신적 양방향으로 피곤한 직업이다. 그래서일까? 다양한 스포츠 동아리들이 낮밤을 가리지 않고 엄청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출근 전, 퇴근 후 운동을 통해 진정한 스트레스의 치유 효과를 느끼신다고들 고백해 온다. 물론, 운동 부상도 잦다. 아픈 부위를 설명할 때도 근육명은 물론이고 정형외과 의사들에게서 들은 진단명을 술술 읊으며 이미 유투브나 블로그를 통해 본인의 통증에 대한 주요 병리에 재활방법까지 깔끔하게 공부를 마치고 진료실로 입장한다. 누가 공무원들 아니랄까봐 정리왕에 이론왕들이다. 그렇게 알잘딱깔쎈(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쎈스있게) 스타일의 환자들이 나에게까지 온 이유를 초진시 가장 집요하게 묻는다. 많이 아는 환자들을 제대로 치료해내야 한의학에 대한 의심의 여지를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치료과정과 종료시 만족도를 높일 수 있는 비결은 꼼꼼한 초진에 있다. 물론, 운동을 너무 많이 하는 환자들만 오는 것은 아니다. 주로 숨쉬기 운동만 한다거나 차가 있는데 굳이 왜 걸어야 하냐고 반문하시는 운동 무관심파에 속해있는 분들도 진료실을 자주 찾는다. 이분들은 대개 아침에 일어나서 세면대에 고개를 숙이다가 목을 삐끗 했다거나 드라이어로 머리 말리려고 목을 뒤로 젖혔는데 갑자기 등에서 뻑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을 좌우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며 오시는데, 이들은 아무리 바빠도 절대 뛰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시는 분들로, 운동 욕구가 없으셔서인지 목소리도 발걸음도 조용하다. 운동 손상 관련 한의학에 관한 자료를 찾으면 대한스포츠한의학회의 다양한 뉴스들이 많이 검색된다. 한의 관련 소식들 중에 가장 반가운 분야가 바로 이 학회의 활동이다. 존경하는 후배 안산명의(이는 내가 붙여놓은 별명이고 실제 그의 실력은 안산을 뛰어넘어 이미 글로벌이다) 박 원장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학회이기도 하고 그는 실제로 아마추어 복싱선수이자 여자프로배구팀의 팀닥터이다. 운동선수급의 기량을 갖춘 운동 잘 하는 한의사의 스포츠 손상 질환에 대한 식견과 치료내용은 탁월하지 않기가 어렵다. 운동이 무엇인지를 알고 본인이 직접 아파봤고 스스로 재활을 통해 회복을 해 보았기 때문에 관련 질환의 A to Z를 갖춘 박 원장이 나는 늘 자랑스럽고 부럽다. 압도적인 피지컬을 가진 박 원장에 비하여 체형적으로든 체험적으로든 절대적으로 열세인 내가 가지고 있는 건 50세라는 나이 대비 아직 꺾이지 않고 있는 체력 뿐인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운동 관련해서 환자들과 기본 이상의 대화는 나눠야 하기에 나 역시 ‘한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종목에 도전하기’가 새해의 단골 결심이다. 새로운 운동을 시작할 때마다 느끼는 각기 다른 부위에의 숱한 근육통은 당연히 겪어야 하는 과정이기에 “야, 기분 좋다!!”라는 함성과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극복 중이다. 『롤모델(The Roll Model)』(질 밀러, 2018년 1월, 대성의학사, 원저는 2014년 11월 출판) 원저의 제목이 Role Model이 아니라 Roll Model이다. 해부학 및 운동 분야 연구를 통해 피트니스, 요가, 마사지, 통증 관리 분야 간의 연결고리를 구축해낸 질 밀러(Jill Miller)는 자신의 테라피볼에 피트니스 접근법을 통합했다. 자세와 통증, 근막과 고유수용감각, 필수적인 볼 테크닉, 호흡리셋, 부위별 신체리셋을 위한 구체적인 시퀀스, 휴식의 역할과 소울 롤링이 주요 내용이고 특히 볼운동을 통한 통증 개선과 질병 극복의 구체적인 증례들은 수술과 재활을 통해서도 해결되지 않은 만성적인 불편감으로 한의사들을 찾아오는 많은 환자들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한의학적 치료방법을 병행하는 데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줄 것이다. 『평생 써먹는 기적의 운동 20』(카르스텐 레쿠타트, 2023년 5월, FIKA) 독일의 가정의학과 의사이자 스포츠 의학 전문의인 Carsten Lekutat의 저서로 “의사의 관점에서 볼 때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게 핵심일 때는 특히 더 복잡하다”, “일상생활 속 우리의 삶의 방식들이 얼마나 많은 질병과 직결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면서도 의사인 나조차 건강한 행동 방식으로 내 삶을 꾸준히 채워나가고 무엇보다 이를 유지하는 게 참 힘들다”, “우리의 삶은 위기와 기회로 마구 뒤섞여 있다” 등 공감 가는 내용이 많은 에세이다. 글 중간중간에 기적의 운동법으로 벽 운동(월 푸쉬업·다이아몬드 푸쉬업·월싯·월 사이드 플랭크), 의자운동(의자 스쿼트·의자 크런치·의자 삼두근 딥·의자 플랭크), 짧은 순간의 풀파워(점핑 잭·푸시업·크런치·의자 스텝업·스쿼트·플랭크·무릎 높여 달리기·런지·사이드 푸시업·사이드 플랭크) 등이 간단한 도해와 함께 운동방법과 운동효과가 요약되어 있다. 『등 한번 쫙 펴고 삽시다』(타카히라 나오노부, 2023년 6월, 리스컴) 굽은 등은 노화와 만병의 원인이다. 굽은 등의 3가지 유형 판별법(목-등-허리 굽음의 3유형)과 어떤 유형의 굽은 등도 고칠 수 있는 근막 라인 스트레칭(목-등-허리로 나눠서 소개), 굽은 등의 예방 수칙과 피할 수 없는 척추골절의 경우에도 예방이 가능하다는 사실, 식사와 보조약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수술에 있어서의 주의할 점 등이 잘 정리되어 있다. 진료실에서 흔히 만나는 등통증 환자들을 위해 보여주고 싶은 책이다. 『상체 밸런스 리셋』(네고로 히데유키, 2023년 9월, 포레스트 북스) 올바른 어깨뼈 운동과 호흡법을 개발하여 두통이나 오십견 등 근본 원인을 찾지 못해 각종 질환과 통증이 만성으로 이어진 케이스 또는 고혈압, 고지혈증, 당뇨를 포함한 대표적 성인병을 앓는 전 세계 수많은 환자들의 고통을 해결해 준 것으로 알려진 일본 의사가 저자이다. “전체 혈관의 99%를 차지하는 모세혈관을 상하게 만드는 주된 요인이 뻣뻣해진 어깨뼈이다. 모세혈관의 중요한 역할중 하나는 노폐물의 회수이다. 어깨가 굳으면 림프계 기능까지 악화되므로 피로가 좀처럼 풀리지 않는 몸, 잘 붓는 몸이 된다. 어깨가 굳으면 당뇨 가능성이 높아진다. 어깨뼈가 무너지면 뇌도 위험해진다.” 이 책을 읽은 후, 진료실에서 흔하게 만나는 오십견 환자들이 달리 보인다. 그들에게 주의당부 시켜야 하는 몇 가지를 당장 추가했으며 당뇨를 가진 오십견 환자들이 일반 환자들보다 치료 시간이 오래 걸린 이유도 다시 한 번 설명해 드렸다. 『세상에서 가장 알기 쉬운 근육연결도감』(키마타 료, 2024년 3월, 중앙북스) 일본의 스트레칭 트레이너가 쓴 책으로 그야말로 근육과 연결 두 단어가 키워드이다. 근육끼리의 신체의 지탱을 위한 연결, 자세를 위한 연결, 동작을 위한 연결을 설명하고 있고 이 연결을 어떻게 자극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이 심플한 도해와 함께 요약되어 있다. 전방연결, 후방연결, 외측연결, 나선연결, 심층연결, 운동연결의 큰 덩어리와 팔의 연결, 골반고관절의 연결, 배의 연결, 엉덩이의 연결, 발의 연결, 어깨팔의 연결, 체간의 연결 등 부위별 연결의 설명과 특정 연결의 개선에 중요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다양한 스포츠 손상으로 내원한 환자들의 영상진단 기반 위에 비수술적 치료를 하는 한의사로서 손상 경위와 회복 경위를 설명할 수 있는 도해들이 잘 되어 있다. 무리한 운동의 복합 손상에 대한 환자 교육용으로 최적이다. 보건행정직 관료로 30년 이상을 근무하시고 퇴직을 하신 의사 선배 한 분과 20년째 친분을 이어오고 있다. 최근 암요양 한방병원에 취직을 하셔서 근무를 시작하셨다고 근황을 전해오신다. 대학병원 암센터를 오가는 지방 암환자들을 위한 정거장 병원으로 수술받은 병원을 오가는 셔틀 서비스, 숙박 그리고 항암식사, 거기에 암 관련 몇 가지 치료를 제공하는데 이 모든 비용이 실비보험에서 처리되니 지방 환자들이 몰려들더라며 본인이 행정직에 있을 때는 이런 류의 병원이 문제가 많아보였는데 막상 봉직의로 이 병원의 멤버가 되고보니 과도한 허위 청구만 아니라면 이보다 더 좋은 암환자 맞춤형 서비스는 없을 것 같다고 덧붙이신다. 위 선배님의 개인적인 소견에도 불구하고 실비 보험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언론보도는 지속되고 있다. “보험사가 백내장 보험금을 통원치료 기준으로 지급하자 최대 보험금 지급 한도가 2000만∼3000만원에서 20만∼30만원으로 줄었다. 보험금 지급액이 줄자 백내장 수술이 90% 넘게 급감한 것이다.” <『백내장 수술 90% 이상 급감, 무슨 일 있었기에?』(경향신문, 2023년 6월 6일), 『보험금 줄자 백내장 수술 90% 급감, 관련 분쟁은 늘어』(YTN, 2023년 6월 19일)> “금감원 자료를 보면, 지난해 7월 보건복지부 고시를 통해 신의료기술로 승인된 무릎 주사의 보험금 청구 건수는 같은 달 38건에서 올해 1월 1800건으로 보험금 지급액은 같은 기간 1억2000만원에서 63억4000만원으로 급증했다. 보험금 청구 병원도 정형외과 및 재활의학과에서 안과, 한방병원으로 늘어나고 있다. 영양주사 등 비급여 주사제의 실손보험금 지급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실손 있죠?” 병원·환자 도수치료 1조 야합…건보까지 휘청인다』(중앙일보, 2024년 2월 7일), 『병원 갔더니 “실손 있으세요?”... 다른 병원 갈지 고민해야』(경향신문, 2024년 3월 24일)> 일차의료 전담의로서 한의사의 역할은? 비수술적 통증 치료 혹은 자세 재활 맞춤 운동 등의 특별한 이름으로 광고 되었지만 결국은 다 도수치료였고 이 명목으로 보험금을 챙겨가기 바쁜 병의원들의 과욕은 현재 진행형이다. 환자와 의사와 보험회사의 이해가 척척 맞아들어가며 형성되었던 이 실손보험의 생태계가 마지막에는 어떤 모습일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아름답지 않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는 예상은 누구나 하고 있다. 실비 보험으로 도수치료를 너무 과하게 받은 환자군과 보험료를 꼬박꼬박 납부하고도 단 한 번도 도수치료 근처에도 가지 않은 환자군 사이에는 그들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있다. 과하거나 담 쌓거나, 뭐든 둘 중 하나이다. 최근 국회도서관에서 발간된 『THE현안』(4월15일)의 “주요국의 가치 기반 의료제도”에 대한 자료를 읽게 되었다. 의사의 진료행위 하나하나에 가격을 책정하는 현행 ‘행위별 의료수가제’를 개선한 대안적 모델로서의 ‘가치 기반 의료제도’에 대한 것으로 양보다 질적인 가치에 중점을 둔 의료시스템에 대한 모색에 관한 내용이다. 프랑스와 영미권 국가에서의 적용사례를 보면 환자의 건강이라는 성과목표를 달성할 경우 인센티브를 제공하여 의사, 환자, 보험자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제도로 인식되고 있다. ‘가치 기반의 의료제도에서 정신건강까지 챙길 수 있는 가족 주치의를 필수 의료기관으로 선정한다면 한의원이 최적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차의료 전담의로서 한의사들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다면 실비보험 타먹기 경쟁에 불나방처럼 뛰어들고 있는 저 많은 개원가들의 삶이 보다 건전해질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개봉한 영화 『쿵푸팬더 4』에서 영적 지도자가 되어 비로소 내적 평화(inner peace)를 찾은 포(寶;Po)는 새로운 성장보다 지금 상태에 머무르고 싶으나 그의 스승은 그를 대신할 후계자를 찾으라고 명령한다. 그 앞에 여태까지의 모든 쿵푸 마스터들의 능력을 그대로 복제하는 강력한 빌런 ‘카멜레온’이 나타나고 이를 막기 위해 포(Po)는 쿵푸 고수 젠(陳;Zhen)과 힘을 합쳐 결국 카멜레온을 제거한다. 모든 미션을 마무리한 젠(Zhen)이 “핫한 침술원(acupuncture clinic)이나 차릴까?”라고 말하자 포(Po)가 그러지 말고 본인 후계자가 되어보는 건 어떠냐며 영적 스승(spiritual leader)으로의 길을 제안하면서 영화는 마무리된다. 핫한 침술원(한의원, 통증관리)에 영적 스승(정신건강 도모)의 역할까지를 해낼 수 있는 의료직은 한의사들이 유일무이하다는 과도한 해석을 덧붙이며 영화관을 나섰다. 총선 때문에 지난 몇 주 동안에는 정치에 과몰입 했었다. 잠시 휴지기를 가져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당분간 내 유투브 키워드는 온통 운동과 관련된 용어들이다. 과하거나 담 쌓거나 운동의 양극단을 흐르는 환자분들과 더 잘 소통하기 위해서는 공부해야 한다. 아니 운동해야 한다. -
신미숙 여의도 책방-50신미숙 국회사무처 부속한의원 원장 (前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 2020년 1월 개시한 이 칼럼이 벌써 50번째를 맞이하였다. 100회를 쓰기로 약속했으니 이제 반환점을 돈 셈이다. “한의학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책들을 한 두 권 추천하면서 시사성을 첨가하고 한의학에 대한 비평을 하면서도 한의사들이 스스로의 역할에 자부심을 부여할 수 있게 한다.” 연재를 시작하며 세운 나만의 작은 원칙이다. 그러나 글재주는 빈약하고 식견은 깊지 않아 매번 고충이 많다. 주제는 고만고만 했으며 한의학과 직간접적으로 관련 있는 책들을 골라내기 역시 쉽지가 않아 그저 그런 책들을 어쩔 수 없이 추천하는 경우도 많았다. 명언집에서 보았던 “Believe you can and you’re halfway there(by Theodore Roosevelt)”라는 문장처럼 할 수 있었다고 믿었기에 그래도 50번째 글을 쓰고 있는 것일까? 주 1회, 한의신문의 발행 빈도이다. 매주 한의신문을 차곡차곡 받아보며 고스란히 우편함에 쌓아 두었다가 봉투도 뜯지 않은 채 원내 종이쓰레기 박스에 바로 내버리는 한의사들도 많을 것이다. 신문 관계자들은 서운하겠지만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조중동도 아니 보는 이 시대에 인쇄물로 배송된 한의신문까지 차분하게 챙겨보는 회원들은 의외로 많지 않다. 온라인 뉴스레터로 읽어도 충분하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수도 있다. 이러한 사실을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가끔 제자들 중에, “앗! 교수님!!”이라는 짧은 감탄사와 함께 내 글의 한 귀퉁이의 사진을 증거물로 찍어서 카톡으로 송부해오는 자들이 있다. 캠핑 와서 고기 구워 먹으려고 기름 튐 방지용으로 챙겨온 한의신문을 펼치다가 내 얼굴을 발견하고 차마 바닥에는 깔지 못하고 내 페이지만 고이 따로 접어두었다면서 “교수님, 바쁘실 텐데 어찌 이런 업무까지 하시나이까?”라고 묻길래 “4년 넘게 쓰고 있었소만!!”이라고 대답했다. “에고고.. 죄송합니다. 한의신문까지 챙겨 볼 시간이 없네요.” “그래 그래, 돈 버느라 바쁘지, 뭐. 다 이해하네. 식기 전에 마저 고기부터 드시게나!!”라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 반가운 대화 속에서 한의신문의 다양한 용도를 깨닫게 되기도 한다. 또 다시 다가온 총선의 모습 정치의 현장 한 복판에 있다보니 이 기간 동안 총선 1회, 대선 1회, 지방선거 1회가 지나갔고 환자로 내원한 많은 관계자들을 통해 이 큰 선거들을 아주 가까이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다시 총선을 1개월도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 도달했다. 이번에도 공천을 확정받은 정치 신인들의 직업란은 늘 그랬듯이 의사와 변호사들이 즐비하다. 거대 양당은 아니지만 한의사 몇 분도 소수 정당의 비례에 이름을 올린 듯하여 내심 반가움이 앞선다. 힘 없는 비례의원으로라도 한의사 출신 국회의원이 오랜만에 탄생한다면 사적인 삶은 잠시 멈춰두고 공익을 위한 공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고단한 의원 생활을 잘 해낼 수 있기를 바라며 진심으로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10년 넘게 경향신문에 칼럼을 쓴 모 대학 의대의 기초학 교실의 한 교수님. 소재 탐색에 열을 올리고 생각의 열매가 익어가는 즐거운 과정을 머리 속으로 즐기다가 신들린 듯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그 수많은 주옥 같은 글들을 월 2회, 10년씩이나 썼는 데도 가족들을 포함한 지인들, 학교 교직원들은 물론이고 학생들 그 어느 누구도 공감과 지지 혹은 존경을 표현하지 않음은 물론 칼럼을 쓰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더란다. ‘이런 무식한 인간들 같으니라고.. 지성인들이라면 마땅히 읽어야 하는 이토록 수준 높은 비판과 유머를 겸비한 놀라운 칼럼을 안 읽다니!’와 같은 서운한 감정이 가시질 않았었다가 정작 본인이 그 코너를 종료하고 나니 본인의 이름이 더 이상 실리지 않는 그 신문은 물론이고 후임자 칼럼에 대한 관심 역시 생겨나지 않더라는 경험을 한 이후, ‘내가 쓰는 글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나와 편집자 뿐이구나...’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나 역시 한의신문의 내 글을 읽는 자들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결코(!!) 서운해하지 않을 것이며, 이 칼럼을 종료한 이후라 하더라도 한의신문의 다양한 소식에 눈과 귀를 주 1회 정도는 집중해볼 생각이다. 한 달에 1회씩, 월말고사를 치루는 기분으로 마주하는 이 즐거운 긴장을 유지한 결과 전반전을 무사히 마쳤으니 남은 후반전도 100회에 이르는 그 날까지 외로워도 슬퍼도 절대 울지 않는 캔디 정신으로 버텨낼 것이다. 곧 천만관객을 달성할 것으로 예상되는 장재현 감독의 최신작 『파묘』를 보며 나는 PAUSE 버튼을 누른 채 메모를 하고 싶은 두 개의 장면이 있었다. 첫번째는 영화 도입부에 나온다. 밑도 끝도 없이 부자인 사람들은 그 집안에 갓 태어난 아이의 울음이 멈추지 않자 현대의학의 모든 조치를 동원했고 의사들을 통한 진단과 치료가 불가능하자 용하다는 무당 화림을 부르게 된다. 화림(김고은)은 본인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사람들은 빛에 비쳐 보이는 것만 믿지만, 사실 어둠 속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귀신, 악마, 요괴, 도깨비 여러 가지로 불리는 그것들은 어둠 속에서 빛으로 나오고 싶어하지만 나올 수 없다. 하지만 아주 가끔씩 편법을 써서 빛의 세상에 나오기도 하는데, 그 때는 빛과 어둠, 과학과 미신 그 사이에 있는 나를 찾는다. 나는 무당 이화림이다.” 두번째 장면은 영화의 거의 마지막에 나온다. 영화는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제1장은 음양오행(陰陽五行), 제6장은 쇠말뚝(鐵針)이다. 6장에서 일본 귀신 오니에게서 공격을 받은 상덕(최민식)은 피를 토하면서 도굴꾼들의 책에 그려져 있던 오행 상극도를 떠올리며 “물과 불은 상극이다. 쇠의 상극은 나무다. 그러니 불타는 칼의 상극은 물에 젖은 나무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이 대사와 동시에 피에 젖은 나무 자루를 오니의 왼쪽 어깨를 반복해서 내려치니 결국 오니의 상체는 날아가고 마침내 오니는 소멸한다. 뭘 저리 구질구질하게 한줄한줄 다 설명하고 있냐는 불평불만의 감상평도 많았지만 자극적인 화면에 덧입혀진 최민식 배우의 목소리, 특히 그 오행상극을 설명하는 대목은 내게는 너무도 극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2024년 한의학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화림은 과학과 미신 사이에 있는 자가 무당이라 설명하며 자신을 소개한다. 한의사를 의미하는 용어로 ‘한무당’이라는 멸칭이 의사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통용된 지는 꽤 되었다. 의사들 보기에 한의사라는 집단은 과학과 비과학 사이에서 본인들도 의사라고 주장하는 자들 정도로 정의되는 듯하다. 의사들이 진단도 치료도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얼마나 자주 발생하는지는 정확한 통계가 없어서 모르겠지만 빅파이브 대학병원을 거치고 와서도 별다른 진단 치료가 없는 경우, 대부분의 의료진들은 ‘let it be’와 ‘wait and see’ 원칙을 환자들에게 하달하고 이 때부터 보호자들은 한의사부터 무당까지 용하다는 곳이라면 아무리 험한 곳이라도 찾게 마련인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음양오행 비웃으며 한의사들을 한무당이라 조롱하는 의사들의 댓글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한의사들이 무당이 아니듯, 의사 너희들도 모두 과학자는 아니쟎아?!”라는 반문이 들기도 했다. 2000년 2월 인턴 시절, 인터넷이 지금보다는 조악했었던 그리고 스마트폰 따위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시절 한무당이나 한까 혹은 한방사라는 단어는 없었다. 한의사들이 한무당 소리 들을 때까지 한의협이나 한의학회는 뭘 했냐고 물을 수도 없다. 이 현상은 우리 모두가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한의계에도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몇 번의 터닝포인트가 있었다고 본다. 한약분쟁 당시 잠시 제기되었던 의료일원화 논의가 그랬고 약사의 한조시 실시, 한약학과 설치, 국립대학교 한의학전문대학원 건립 등의 시기가 지금 와서 생각하니 한의계에는 중요한 모멘텀이었다. 한의대 인기가 최고였다고 평가되는 2004년 전후에 그 때 미래를 내다보고 준비할 수 있는 혜안을 가진 자들이 한의계 지도부에 소수라도 있었더라면 2024년 한의학은 달라졌을까? 한의계에 희망의 봄날을 가져 올 터닝포인트는 아직 가능한가? 지난해 12월27일 대한치과의사협회는 “신속한 치대 정원 감축 정책이 필요하며, 치과대학 신설 정책에 반대한다!”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에 의하면 현재 우리나라 치과의사는 심각한 과잉공급 상태임이 정부 연구 결과에 의해 증명된 상태로 치과의사의 과잉공급으로 치과 병의원의 폐업률 증가, 과다경쟁으로 인한 네트워크, 기업화 등 영리만을 추구하는 쪽으로 변질되면서 과잉진료와 불법의료광고 등 환자 유인, 알선 행위가 증가하는 등 각종 부작용이 심각한 상황임을 지적하고 있다. 경영악화로 인한 불시폐업, 먹튀치과 현상으로 인한 환자 피해가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고 있으며 저수가를 앞세운 허위 과장 광고 및 과잉 진료로 인한 국민들의 피해가 날로 증가하는 추세라며 신규개업대비 폐업률은 2021년 61%(개업 833, 폐업 506)에서 2022년 67%(개업 800, 폐업 536)로 1년간 6% 증가한 폐업률을 인용하고 있다. 치협의 성명서에서 ‘치과의사’를 ‘한의사’로 바꾸더라도 의미가 크게 훼손되지는 않는다. 폐업률이나 과잉진료, 과다경쟁, 경영악화, 국민피해 등의 원인과 결과 역시 비슷하여 한의협의 것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성명서이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한의협은 어떤 성명서를 준비해야 할까? 마지막까지 등록금 장사를 해먹겠다는 재단의 절박함과 12개 한의대, 한의학전문대학원의 교육현장에 종사하고 있는 교수, 교직원들의 생존권 때문에 졸업만할 뿐 대량 실업과 개업직후 폐업을 마주해야 하는 해마다 양산될 800명 전후의 예비 한의사들에 대한 대책은 있는가? 정원 축소 규모를 구체적인 숫자로 제시하며 다같이 생존하자는 방안을 제시할 줄 아는 대한치과의사협회의 성명서가 부럽기만 하다. 부러운 건 치협 이외에도 또 있다. “태어나서 한의사 처음 보는데 우리들처럼 사람처럼 생겼군요”라는 막말을 내 면전에 시전하는 자들이 다름 아닌 부산대 의전 교수진에 소속되어 있다. 이토록 고결한(?) 인격자들이 유난히 득실대는 곳이 한국 의사들이다. 일본에는 한의사가 없어서인지, 임상가로서 한의학을 적극 응용하고 그 경험을 공유하고자 실용서를 내는 의사들의 책이 지속적으로 출간되고 있다. 물론 주류 의사들의 트렌드는 아닐 것이다. 비주류 소수지만 이러한 의사들이 일본에라도 존재한다는 사실이 부러울 뿐이다. 현역 의사가 생각하는 한의학의 특징은? 『나는 101세, 현역 의사입니다』(다나카 요시오, 한국경제 신문, 2021년 8월, 원저는 2019년 12월 출간)라는 책의 “4부, 저는 병을 통해 오히려 건강해졌습니다” 챕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을 함께 사용합니다(서양의학은 병을 치료하는 게 목적이고, 동양의학은 환자를 치료하는 게 목적이다. 병에 따라 정해진 치료와 투약을 수동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병이라도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맞는 맞춤치료를 하고 싶다) / 자연 치유력을 활용합니다(침과 뜸 치료가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경혈을 자극함으로써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자연 치유력이 눈을 뜨기 때문이다. 내 경험상 침 치료는 안면신경통 등의 신경계 질병과 최근 늘고 있는 우울증, 불면증에 특히 효과가 좋다) / 꼭 필요한 약만 처방합니다(약은 자연 치유력을 크게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처방되어야 하고, 환자도 그 점을 의식해 약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 몸을 최종적으로 지키는 것은 본인이 갖고 있는 자연 치유력이니 그 힘을 믿고 어떻게 하면 자연 치유력을 강화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치료를 받거나 건강관리를 하는 것이 좋다) / 질병의 경미한 신호에 주의를 기울입니다(몸이 약해 늘 여기저기 아픈 사람이 의외로 오래 사는 것은 건강에 자신이 없어 미세한 변화에도 민감하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민감해도 좋지 않지만, 나이가 들수록 몸이 보내는 신호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부제가 “갱년기 여성의 무너진 호르몬 밸런스, 한의학으로 치료하다”인 『마흔 아홉, 한의원에 갑니다』(타카하시 히로코, 군자 출판사, 2022년 11월, 원저는 2016년 2월)라는 또 다른 책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의학이 갱년기의 증상에 딱 들어맞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이다. 미병을 치료한다. 하나의 한약으로 여러 가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몸과 마음, 환경을 하나로써 생각한다. 원재료의 모습이 보인다. 서양의학에서 갱년기 증상의 일반적인 치료법으로는 호르몬 보충요법 및 저용량 경구피임제가 있지만 호르몬 보충요법은 불안 및 우울 상태 등 갱년기 세대의 마음의 증상에는 그다지 효과가 없다. 나이를 먹어가고 있는 몸을 부자연스럽게 젊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스럽게 그 연령에 맞는 건강으로 나이 들어가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이 한의학의 생각법이다. 책의 제7장에서는 저자의 진료실을 내원하는 여성 환자분들 대다수가 지니고 있는 두통, 변비, 피부건조의 3대 증상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서양의학에서는 유전자 수준에서 병태의 해석이 진전되고 신약이 점점 개발되고 있지만 이 3가지의 아주 흔한 증상은 치료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주소이며 이 3가지에도 한약이 좋은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의학의 위기…우리의 결말은 무엇일까? 어떤 현상이 처음에는 아주 미미하게 진행되다 어느 순간 균형을 깨고 예기치 못한 일들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그 시점을 티핑포인트(tipping point)라고 한다. 말콤 글래드웰(Malcolm Gladwell)의 동명의 저서(The Tipping Point, Hachette Book, 2001년 5월)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유명해졌다. 책의 부제는 “How little things can make a big difference”이고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왜 어떤 것을 뜨고 어떤 것은 사라지는가? 유행의 출현, 범죄의 증감, 알려지지 않았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극적인 전환, 그 외 매일의 삶에서 일어나는 신기한 한 순간의 변화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사회적 전염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한의대는 한 때 왜 유행이었고 한의사라는 직군은 지금 왜 극한의 위기인가? 이 균열적인 현상의 그 시작은 처음에는 아주 미미하게 진행되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눈치를 못 챘을 뿐! 그러다가 어느 순간 더 이상 감내할 수 없는 폭발 직전의 상황이 그 순간이 우리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용도폐기 혹은 기사회생? 한의계의 터닝포인트와 티핑포인트는 과연 우리 모두를 어떤 결말로 데려다 놓을 것인가? -
신미숙 여의도 책방-49신미숙 국회사무처 부속한의원 원장 (前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 “최근 의료계의 한약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여전히 한약을 선호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설문조사 결과가 나왔다. 강북삼성병원이 최근 60세 이상 남녀 235명을 대상으로 어버이날 가장 받고 싶은 선물에 대해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남(30%), 여(29%) 모두 보약이나 영양제 등의 건강 강화를 위한 약제를 받고 싶어했다.” 이 기사의 출처는 『노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선물은 보약』(메디칼타임즈, 2005.05.02.)이다. 국민들이 한약을 선호한다는 기사는 반갑게 느껴지지만 이는 19년 전의 이야기다. 『허준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유용상, 군자출판사, 2005년 3월)에 이어 『미안하다 한의학, 보약이 있다구요! 그게 뭔데요!!』(남복동, 아이올리브, 2007년 9월) 류의 한의학 비판서적이 연달아 출간되던 그 시기, 한약과 한의학에 대한 의료계의 부정적인 입장이 기사나 서적으로 본격적으로 표출되었었고 2024년 오늘날까지도 한의계에 대한 그들의 평가는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설이 지나고 국회 직원들로부터 한약 관련 여러 문의들이 있었다. “이번에 가족에게 선물받았는데 모 한방병원에서 직접 만들었다는 이 제품, 나도 먹어도 되는거냐?”, “부모님 댁 냉장고에서 작년 추석 무렵부터 있었던 공진단을 이번에 발견했는데 지금 먹어도 되냐? 유통기한이 안 적혀 있더라”, “한약방하는 친구가 우슬모과 잔뜩 넣고 무릎탕이라는 걸 만들었는데 동네 노인들 이거 먹고 다 수술 안 했다며 한 제 다려줬는데 먹자마자 두드러기가 올라와서 다 버리고 친구한테는 안 전했다. 그런 처방이 진짜 있기는 하냐?” 대부분 큰 무리가 없는 선에서 가족과 지인간의 평화를 도모할 수 있도록 성실하게 답변을 드렸다. 명절 직후의 당근마켓에는 홍삼을 포함한 다양한 건강기능식품들을 현금화하려는 사람들이 제법 몰려든다. 현행법상 건기식 판매자는 영업 신고를 해야 하며 개인 간 거래도 신고가 필요하고 무료 나눔도 영업 행위에 포함돼 거래가 불가하기 때문에 이를 위반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집에 쌓여있는 홍삼을 어쩌란 말이냐 하는 다수의 민원이 얼마나 많았는지 건강기능식품의 개인 간 소규모 재판매가 4월부터 허용될 모양이다. 건기식은 대부분 상온 보관·유통이 가능하고 소비기한도 1∼3년으로 일반 식품보다 길며, 전체 판매량 중 온라인 구매가 68%에 이르는 점 등을 고려하면 개인 간 재판매로 인한 건강 위해 우려가 크지 않을 것이라고 본 것 같다(『홍삼·비타민도 ‘당근 거래’ 가능해진다』,한겨레, 2024. 01. 16.). 홍삼의 대중화 이후 늘어나는 산삼 건기식 광고 “흔해지면 천해지는 법이다. 거기에 1980년대 말 대중소비시대가 열리면서 온갖 종류의 ‘기능성 건강식품’들이 각 가정에 침투했다. 그러자 홍삼을 향한 대중적 열망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오늘날 홍삼은 한국인이 가장 애용하는 건강식품이기는 하나, 신비의 영약이라고 할 수 없는 물질이다.” 전우용 교수는 그의 최신 저서 『잡동산이 현대사 1, 일상·생활』(돌베개, 2023년 12월)에서 홍삼에 대해 위와 같이 기술했다. 애용되기는 하나 흔해졌고 흔해졌기에 신비롭다라고 하기엔 애매한 그저 긴 역사 덕분에 명맥을 유지하는 건강식품으로서의 홍삼일 뿐이다. 그래서 홍삼 선물은 무난할 뿐 별다른 감동을 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안 먹는 홍삼류는 당근에서 현금화할 수 있으면 충분한 딱 그 정도인 것이다. 흔해빠진 홍삼이 지겨워진건지 업계는 언젠가부터 산삼 제품을 엄청 광고한다. 팟빵이나 유투브의 많은 채널들에 0순위로 소개되는 제품들이 바로 산삼이 주재료이다. “여러분들, 어디가서 이 가격에 산삼 못 드십니다. 이 산삼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후략)”의 광고 문구는 기존의 홍삼 광고와 토씨 하나 다를 게 없지만 암튼 본인이 들고 있는 귀하디 귀한 산삼 제품은 특별하니 일단 하나 잡숴보시고 가족들에게 선물하시고 면역도 챙기고 독감, 코로나도 예방하라고 소리친다. ‘저런 건기식을 챙겨 먹어야 면역이 강화되고 건강을 회복하며 기력이 솟구쳐서 수명이 연장된다는 말인가?’라는 강력한 의심이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이미 벌컥벌컥 치솟는다. 이런 마음은 의사들이 가지고 있는 한약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과 거의 비슷한 강도의 거부감일 것이다. 갑자기 의사들의 적개심이 확 이해된다. 우리 모두는 결국 잘 먹고 덜 늙고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희망한다.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고 질병이 발견되면 필수적인 치료와 그에 따른 투약을 하며 그 과정에서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건기식도 가끔은 먹고 필요한 경우 한의쪽의 치료도 병행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한참 하면서 국회도서관 신간소개 코너의 책들을 들여다보는데 『가장 큰 걱정: 먹고 늙는 것의 과학』(도서출판 이음, 2023년 4월)이라는 단순하면서도 매력적인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뉴욕대 의대 세포생물학과 류형돈 교수는 칼로리 제한의 효과, 젊음이란 무엇인가, 지중해 식단이 장수의 비결인가 혹은 줄기세포로 노화를 막을 수 있을까 등의 귀와 마음이 솔깃해지는 제목 아래 최신연구 경향을 포함한 다양한 내용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노화의 종말』(도서출판 부키, 2020년 7월)의 저자 데이비드 싱클레어(David Sinclair)에 대한 동료들의 비판과 학계의 논란을 정리해둔 대목이었다. 2019년에는 노화를 막을 수 있다는 책을 출판했는데 일주일 만에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리스트 11위에 올랐고,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출간됐다. 그 책에서도 과장되거나 정확하지 않은 주장을 많이 했다고 과학자들의 힐난을 받았다. 매거진 <보스톤>에서 동료 하버드 의대 교수를 인용한 것이 그 예이다. “그 사람이 연구하고 그 내용을 논문으로 발표하는 것까지만 한다면 좋아요.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몸을 젊게 만드는 비법이 있다고 떠들고 다니는 걸 보면 정상적인 과학자의 행동이라고 보기 힘들죠. 그가 최근에 쓴 책을 읽어보면 ‘이 사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하는 생각이 들어요. 자기에 대해 젊음의 비법을 발견한 인류의 구세주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과장은 이제 그만 하고 데이터로 승부했으면 좋겠어요.” 싱클레어를 취재한 기자에 의하면 싱클레어는 자신이 밀고 있는 NMN같은 약을 매일 스스로 복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검증되지 않은 약을 왜 복용하느냐고 기자가 묻자 싱클레어는 “나는 과학자니까”라고 대답했단다. 그리고 조금 머뭇거리더니 한마디 더 덧붙였다고 한다. “그리고요.. 나를 공격하는 내 과학적 적수들보다 오래 살려고.” 과학자들은 그 약에 대해 부정적이지만 우리가 사는 사회는 자본주의의 원리가 작동한다. 실제로 효과가 없더라도 설득력만 있으면 투자자들이 몰리고 그 중간에 회사를 팔거나 주식을 상장해서 떼돈을 벌 수 있는 구조이다. 궁극적으로 개발에 실패하더라도 이렇게 돈을 버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죄가 되지 않는다. 이제 싱클레어에게 투자하겠다는 자본가들이 다시 줄을 섰으니 그 돈으로 싱클레어는 계속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실제로 그의 약들이 사람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지는 시간만이 알 일이다. 하버드 의대 유전학과 교수인 데이비드 싱클레어의 저서 『노화의 종말』은 ‘하버드 의대 수명 혁명 프로젝트’라는 부제를 달고 2020년 7월 국내에 출간되면서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고 그의 책과 강의를 편집하고 정리한 여러 동영상은 최근까지도 지속적으로 업로드되고 있다. 싱클레어가 날마다 복용 중이라는 제조사 ROKIT AMERICA의 항노화영양제는 1개월분에 19만원에 팔리고 있으며 해외직배송으로 주문 후 3∼4일이면 국내에서 받아볼 수 있다. 싱클레어 박사님만 믿고 언젠가는 효과가 나겠지 기대하며 복용 중이라는 댓글과 일단 뭔가 다르다는 보다 적극적인 긍정 반응을 표현하는 댓글들이 쇼핑몰의 복용후기란을 가득 채운다. 하버드 의대 교수가 본인도 날마다 먹고 있는 영양제이니 효과가 없을 수 없다라는 믿음의 힘이 어떤 결과를 맺을는지 끝까지 주시해 볼 일이다. 내 시선으로는 자본주의에 올라탄 또 한 명의 장사꾼 의사인데 역시 국내에서 하버드의 이름값은 강력하고 미제 좋아하는 심리 또한 본능적이라 이 쇼핑몰의 활황은 싱클레어가 동안과 명성을 유지하는 그 순간까지 당분간은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건기식의 범람…그 피해는 누구에게? 한국건강기능식품협회에 따르면 건기식의 시장 규모는 2019년 2조9508억원에서 2023년 6조2022억원으로 2배 이상 확대된 것으로 추산된다. ‘2020 한의약산업실태조사’에서 2019년도 국내 한의약 산업 매출액이 10조3630억원으로 추산되었으니 2023년까지의 자연 증가분을 추산해 보면 건기식과 한의약 산업의 시장 규모를 대강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해외직구를 통해 전 세계의 기능성 의약품들까지 손쉽게 구입하는 시대가 열렸으니 국내 한의약 업계가 왜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지 쉽게 짐작이 된다. 싱클레어 박사가 자체 회사를 만들어 아직 검증이 완료되지는 않았으나 노화라는 질병을 치료하고 영원불멸의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알약이 있다고 선전하는 과정에서 투자자를 얻고 추종자들의 구매력으로 엄청난 부를 유지하듯 국내에서는 의사도 유산균을 팔고 한의사도 도라지청을 팔고 흑염소즙도 팔고 몸에 좋은 가루는 다 모았다는 당뇨선식도 팔고 값비싼 보약을 재해석한 한방종합영양제도 파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대에 그들을 뭐라고 손가락질 하겠는가?! 그렇게 못 나서는 나를 포함한 구경꾼들이 바보인거다. 그러나, 국내외의 건기식의 범람 속에 지나친 과장광고로 식약처 과장에게 고소를 당하는 유산균 파는 소수의 의사는 욕을 먹어도 위중한 질환으로 대학병원에 생명줄을 맡기고 있는 수많은 환자들 눈에 대부분의 의사는 의느님일 뿐이다. 장사하는 의사군과 진료하는 의사군이 구별된다는 말이다. 이에 반하여 한의학계의 건기식은 데이비드 싱클레어나 의사들의 건기식 시장과 달리 치료의학으로서의 한의학의 이미지를 떨어뜨리는 쪽으로의 끈질기고 지속적인 부정적 효과를 안겨주는 것 같다. 본인들은 돈 많이 벌어서 좋겠지만 박수를 쳐주고 싶지는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박카스로 유명한 제약회사에서 최근 경옥고를 출시하며 신문기사 하단에 주의사항이라고 작게 첨부한 글이 “부작용이 있을 수 있으니 첨부된 사용상의 주의사항을 잘 읽고 의사, 약사와 상의하십시오”이다. 자양강장, 병중병후, 허약체질, 육체피로, 갱년기장애, 권태에 경옥고를 권하고 있다. 이 배너광고판을 세워놓은 약국이어서 였을까? “약사는 근거 중심으로 편견없는 건강상담을 합니다”라는 입구의 광고판 글귀는 “근거 중심 의학에 기반하여 본 약국에서는 한약도 열심히 판매하겠다”는 말로 해석되었다. 경옥고도 제법 잘 나가는지 내용물을 뺀 빈 박스가 높게 쌓여있다. “365일 하루도 안 쉽니다”라는 약국의 간판글귀는 근면성실함으로 다가온다. 이제는 경옥고도 의사, 약사와 상의하고 365일 문을 여는 약국에서 구입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산삼유감에 이어 경옥고유감이다. 확실한 치료효과만이 한의약이 살아남는 길 최근 개봉한 일본 영화 하야카와 치에 감독의 <플랜75>(2022년 작품)는 75세 이상의 노인에게 국가가 안락사 지원 정책을 시행하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명퇴 후 플랜 75 신청을 고민하는 78세 여성, 플랜 75 담당 공무원, 콜센터 직원 그리고 이용자의 유품을 정리하는 이주 노동자 각각의 시선과 서로간의 대화를 통해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2022년 6월, 국회의원 안규백은 조력존엄사법을 발의했다. 말기 환자로서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는 환자들의 경우에는 본인이 희망하는 경우 담당 의사의 조력을 받아 자신이 스스로 삶을 종결할 수 있도록 하는 조력존엄사법을 도입함으로써 삶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증진하자는 취지다. 한국리서치가 2022년 7월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82%가 조력존엄사 입법화에 찬성했다. 영화를 보며 내게 떠오른 질문은 이런 것들이었다. “노인은 쓸모가 있는가?” “쓸모없는 인간은 사라져야 하는가?” “쓸모있는 것들만 남겨두는 것이 효율적인가?” 온 세상이 의대의대 합창을 부르는 듯한 이 혼란한 시대에 고요히 “한의사의 쓸모”를 끄적거려본다. “왜 세 달이나 체외충격파에 주사를 맞았는데도 팔꿈치 통증이 그대로일까요?” “불편하고 높은 사람이 동석하는 어려운 회의나 식사자리 이후 며칠 동안은 두들겨 맞은 것처럼 등이 결리고 밥이 안 넘어갈까요? 이거 혹시 섭식장애 같은 거 아닐까.. 걱정이 되어서 너무 힘들더라고요” “횡단보도 걷다가 과속하는 SUV에 바로 옆에서 걷던 사람이 차에 치이는 장면을 목격한 후 물만 먹어도 구역감이 몰려와요.” 최우선의 방법으로든 대안적 혹은 최후의 모색으로든 한의사인 나를 찾아와준 이 많은 다양한 불편함을 지닌 환자분들에게 적확하고 시의적절한 치료를 통해 호전을 보여주는 것만이 “나의 쓸모”를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믿는다. 그리고 이 쓸모의 미션은 계속 수행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시인 양광모는 그의 시 『2월 예찬』에서 “2월은 시치미 뚝 떼고 방긋이 웃으며 말하네, 겨울이 끝나야 봄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봄이 시작되어야 겨울이 물러가는 거란다”라고 2월을 노래하였다. 한의계의 긴 겨울은 언제가 되어야 봄을 맞이하게 될까? 한의계의 봄이 시작되어야 그제서야 겨울이 물러나는 것이라면 그 봄은 28일 밤 윤곽을 드러낼 제45대 대한한의사협회 집행진이 가져와줄 수 있으려나?! 과연 그럴 수 있으려나?! -
신미숙 여의도 책방-48신미숙 국회사무처 부속한의원 원장 (前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 시작은 설레임의 동의어나 다름 없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으로 뒤덮힌 집 앞 산책로에 첫 발자국을 남길 때의 그 조심스러움과 신중함 그리고 결국은 가슴 속으로부터 터져나오는 외마디 감탄사 ‘오늘도 감사합니다!’ 이는 내가 1월을 하루를 아침을 대하는 자세이다. 이렇게 2024년이 시작되었다. 소설의 첫 문장은 그 소설을 관통하는 모든 것을 미리 내밀어 보이는 것이기에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할까를 두고 소설가들은 수일 수개월을 날밤을 새며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다고 들었다.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첫 문장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가 탄생하기까지의 고통스런 과정을 작가의 어느 인터뷰 기사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훌륭함을 추구하는 뜨거운 마음』은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이준웅 교수가 2023년 11월5일자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의 제목이다. “해외에서 자수성가했다는 인물도 다시 돌아와 한국에 정착하려면 한국식 저열함을 새로 배워야 한다.” “세계 수준의 훌륭함을 추구하는 뜨거운 마음들이 모여야 한다. 좁아터진 국내에서 상대방을 제쳐야 비로소 이기는 경쟁에 열중하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세계의 훌륭한 성과를 내밀고 초심을 잃지 말자고 독려하는 동아리가 필요하다”는 내용도 좋았고 그 흔한 단어들의 조합이지만 뭔가 뭉클해지는 글의 제목도 마음에 쏙 든다. 국내에서 생존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한국식 저열함이라! 그건 뭘까? 모든 분야가 레드오션인 좁아터진 국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질이 낮고 변변치 못한 방법이라도 일단은 모든 수단을 몰빵해서 어떻게든 일단 경쟁자들을 꺾고 기세를 몰아 승자가 되어 기득권을 선점하면 돈과 성공이 한꺼번에 몰려든다. 이 길만이 생존의 비결임을 우리 모두는 암묵적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이런 방식은 옳지 않다는 데에 동의하는 척 한다. 그 결과 배짱 있는 배팅러들은 그 지위에 올라서고 뒤편에서 뒷짐지고 있던 불편러들은 이제 그 위치를 차지한 자들을 시기질투하며 손가락질을 준비한다. 성공에도 실패에도 각각의 서사가 있는 셈이다. 정치판도 의료계도 모두가 윈윈하는 길이 분명히 존재할 텐데 최근 발생한 많은 사건들을 떠올리면 정해진 질서나 상생의 악수 혹은 흉금을 터놓는 대화 따위는 애초에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오직 반대편을 끝장내고야 말겠다는 혐오가 온라인에서의 조롱을 넘어 오프라인에서의 실질적 폭력으로 그 끈질긴 생명력을 사방에 발산하고 있고 우리는 분명히 목격했다. “의사·한의사는 어디서 치료받나 보자”며 의사와 한의사가 각각 의료기관과 한의의료기관을 얼마나 이용하는지 살펴보자는 정면승부 요청이 의료계로부터 제기되었다는 기사를 읽었다(『첩약에 난임까지 한의계 활보에…의료계, ‘이것’ 공개 요청』 의협신문, 2024.01.10). 면허가 등록된 의사와 한의사들이 2018년 1월부터 2022년 12월까지 5년간 의료기관을 이용한 이용자 수를 의사·한의사 직역별로, 1년 단위로 자료 공개를 요청했다고 하는데 내심은 “한의사들아!! 한의학이 그토록 우수하다면 병원 근처는 얼씬도 하지 말고 너네끼리 치료하고 치료받고 다 해라. 우리 의사들이 한의원 따위에 들를 일은 죽어도 없을 테니, 너네들한테서 치료받는 의사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어디 한 번 증거를 대 보아라!”였을 것이다. 한의사가 환자로서 의사들을 찾아가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은 분명히 존재한다. 반대로 의사가 환자로서 한의사를 찾아가는 경우는 가족관계인 경우를 빼고는 많지 않을 것이다. 현대의학에서 해결불가라면 딱 거기까지, 한의학에까지 노크를 할 범주의 질환이 아닐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의사를 만나야만 하는 필수적인 상황(1년 1회 정기검진으로 무표정의 달인인게 분명한 가정의학과 의사 면담, 코로나 확진으로 직장 제출용 진단서를 위한 이비인후과 의사 면담)을 제외하고는 최대한 의사를 만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한의사라서가 아니다. 살면서 의사, 경찰, 법조인들 만날 일이 없으면 없는대로 좋은 인생 아닌가? 환자가 되어 의사 앞에 앉아본 한의사들이라면 한두번 쯤은 속으로 떠올렸을 것이다. ‘이 분야는 한의학이 해낼 수 없는 분야쟎아. 내가 여기 앉아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인거고, 암튼 얼른 끝났으면 좋겠다. 환자 역할도 엄청 뻘쭘하구나! 의사들은 하나같이 참 불친절하단 말이야!’ 언론을 장식하는 의사들의 범죄 기사들 보험공단 이사장에게 정보 공개를 요청한 이 포럼의 대표는 동일한 질병이라도 현대의료와 한의약 영역에서의 진단과 치료 방식이 상이해서 국민이 혼란을 겪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그러나, 하루종일 내 진료실에서 만나는 환자들과의 많은 대화 속에서 동일 질병에 대한 의사들의 코멘트와 나의 의견은 거의 일치하는 편이다. 2개월 동안 외부 병원에서 치료를 했는데도 여전한 발목 통증 환자에 대해서도 오십견이나 극상근 부분파열, 아킬레스 건염이나 족저근막염의 경우에도 진단이나 주의사항에 대한 의견에 별다른 차이가 없다. 대부분 병원들은 관절 불안정성과 만성 통증으로의 이행, 외상성 관절염의 발병 가능성을 경고했고 약물치료, 주사치료, 체외충격파와 도수치료를 반드시 권했다. 병원 치료와 한의 치료를 동시에 받고자 하는 환자들이 많았었고 병행 치료의 결과, 회복 속도의 빠름과 제반 증상의 완화에 대부분의 환자들은 늘 만족했었다. 현대의학은 위대하다. 아무리 내적으로 수많은 문제들이 내포되어 있다고 해도 끊임없는 양적·질적 성장의 속도와 성과는 눈부시기만 하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의학은 어찌 해볼 도리가 없이 끝도 없이 고꾸라지고 있다. 한의학적 치료나 상담이 개입될 수 있는 영역은 지극히 제한적이며 그 영역마저 어디까지 축소될런지는 상상하기 두렵다. 내가 한의사로 활동할 때까지는 그래도 무사해야 할텐데.. 하는 이기심을 숨기지는 않겠다. 이는 현직 한의사들이라면 모두가 느끼는 불안감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의사들의 의료행위가 무결점, 무오류의 과학에 기반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의협은 늘 “과학적 검증이 되지 않은 행위는 국민들에게 행해져선 안된다”며 의사나 의협의 위상을 최상으로 유지하기를 원하지만 연말연초에 언론을 장식하는 의사들의 범죄 기사들의 내용은 하나같이 처참한 수준들이다. 병원이 아닌 일반 집이나 요양원 등 장소에서 사람이 숨지면 의사가 타살 혐의점 등을 확인하기 위해 사체를 직접 확인하고 검안서를 발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장례식장 측과 결탁해 사체를 직접 보지 않고 허위 검안서를 발급하고 발급비용을 장례식장과 의사가 반띵한 사건이 있었다(『‘확인 않고 사체검안서 허위발급 의혹’ 현직 의사 입건』 연합뉴스, 2023.12.15.). 명문대 출신 의사들 중심으로 구성된 큰 규모의 정형외과 전문병원에서는 TV에도 출연한 박사 출신의 유명 의사가 왼발이 아파 수술을 하러 들어간 환자의 멀쩡한 오른발 뼈를 절단하고 철심을 박아 불구로 만드는 일도 발생했다(『왼발 아픈데 멀쩡한 오른발 수술…환자는 영구 장애』 연합뉴스, 2023.12.16). 마약처방을 대놓고 하는 것도 모자라 마취 상태의 여성 환자들을 대상으로 성폭행을 저지르고 동영상을 촬영한 행위(『마취된 여성 10명 성폭행 몰카…‘롤스로이스 마약’ 의사의 민낯』 중앙일보, 2023.12.26)는 의사라는 직종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또한 면허정지 수준에서 음주운전을 감행하고 배달기사를 사망에 이르게 해놓고도 별도의 조처 없이 현장을 떠난 뺑소니 의사(『배달기사 숨지게 한 ‘음주 뺑소니’ 의사 집행유예』 한겨레, 2024.01.13)는 징역 6년의 원심이 파기되고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피해자의 유족들과 원만히 합의한 점과 피고인이 초범인 점, 그 밖에 97장의 반성문도 한 몫 했겠지만 의사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원심을 깨고 극적으로 감형을 받을 수 있었을까? 서양에서 바라보는 대체의학의 수준은? ‘나 자신이 이내 하나의 바코드로 환원되어 버리는 기분’. 이는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뤼방 오지앙(Ruwen Ogien·1949∼2017)이 췌장암으로 병원 생활을 하며 느낀 환자 역할에 대한 한줄 감상평이다. 그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계 폴란드인 집안에서 태어나 철학과 사회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유럽 최고의 연구 기관인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CNRS)의 연구 국장을 지냈다. 『나의 길고 아픈 밤―죽음을 미루며 아픈 몸을 생각하다』(원제는『Mes Mille et Une Nuits; 천일야화, 부제: 비극이자 희극인 질병』)는 췌장암과 투병하면서 쓴 마지막 에세이로 저자는 이 책이 출간되고 몇 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다. 대학병원의 거대한 로비에 환자가 되어 앉아있어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느꼈을 것이다. 그 커다란 외로움과 살 떨리는 소외감을!! 친절한 의사 한 명 만나기 어려운 차가운 공간에서 여기저기 찍히는 바코드 사운드로만 가득 찬 그 텅 빈 높은 층고의 썰렁함을 !! 뤼방의 2015년 10월19일 일기에는 “오늘 만난 정골요법사는 친절한 편이었다. 하지만 나는 정골요법사에게 복통의 원인이 배꼽 탈장이라는 말을 듣고 좀 불안해졌다. 그 말이 맞는지 확인하고 무슨 조치를 취할 수 있을지 알아보려고 외과의들을 다시 찾아갔다. 의사들은 정골요법사의 진단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눈치였다. 그들은 내가 돌팔이를 찾아갔다고 생각하는 듯했다”라는 대목이 있다. 또한, 2015년 11월2일 일기에는 “어처구니없던 기(氣)치료의 여파에서 헤어나기가 힘들다. 자칭 ‘기치료선생’은 내가 화를 속으로 삭이는 바람에 췌장이 손상됐다는 식으로 떠들기 시작했다. 췌장의 경우는 화라는 감정에 해당한단다. 근거도 없는 주장을 천연덕스럽게 늘어놓는 모습에 나는 당연히 화가 치밀었다. 그녀가 무당처럼 번잡스럽게 움직이는 동안, 그녀의 배에서 꾸르륵 소리가 나는 게 아닌가. 기치료선생은 적잖게 당황했는지 나의 복통을 자신의 배로 옮기는 중이라고 둘러댔다! 도를 넘는 멍청한 짓거리”라는 기록도 있다. 프랑스에서도 정골요법사나 기치료선생이라는 분들이 활동 중이고 당연히 의사들로부터는 돌팔이, 환자들에게는 무당 취급을 받고 있으며 치료의 본류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의 한의사의 위치와 등치시킬 수는 없겠지만 서양의 대체의학 종사자들의 수준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었다. - 지금 내가 복용하는 약들은 대부분 치료 효과가 없다. 그저 상태를 유지하게만 해 줄 뿐이다. 게다가 통증을 가라앉게 하지도 않는다. 외려 통증을 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저 달콤한 모르핀을 제외하면, 이 약들은 언제나 병 그 자체보다 더 나쁜 것 같다. - 내 삶이 상당 부분 의사의 결정에 달려 있다는 이 현실이 가장 끔찍하다. 치료를 연장하거나 혹은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결정이 내가 알지도 못하는 기준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기준이 순전히 비용 문제가 되는 날이 언젠가 올 수도 있다. -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도 병원의 관료주의를 상대해야 한다. - 의학은 현 상태에서도 이미 광대한 지식의 보고이지만 나에게 삶을 연장해주는 것 이상은 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내가 치료를 받지 않을 경우 통계적으로 예측되는 사망 시기를 뒤로 미루어주는 것이 현 의학의 최선이다. 의사 출신 국회의원들이 치료차 진료실에 들르시는 날이면 그 어떤 유력 정치인들이 내원했을 때보다도 긴장을 많이 했었다. 국회 근무 초창기 시절 오십견으로 내원하신 의사 출신 의원님 한 분께 치료 과정을 자세히 설명드리려 했더니 의원님께서 “원장님, 저는 한방 좋아합니다. 효과 없으면 진즉 사라졌겠죠. 저한테 일일이 설명 안 하셔도 되니 치료만 잘 해 주세요. 우리 보좌관이 원장님 잘 하신다고 해서 왔어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통증에는 진통제보다 침이 훨씬 빠르쟎아요. 동료 의사들 만나면 침은 웬만하니 인정해주자.. 라고 저도 추천하고 다니는데 그래도 욕을 먹어요. 아니, 갈 데가 없어서 한의사한테 가냐고 놀리기도 하고요. 진통제 몇 알 먹으면 될 걸, 침까지 맞냐고 하길래 안 맞아봐서 그렇다. 일단 맞아봐라. 다르다!! 라고 이야기합니다”라고 하셨다. 모든 두려움 극복해내는 2024년 ‘기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2004년 3월18일자 『주간조선』의 특집 기사의 제목은 『인기 상한가 한의대, 한의대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였다. 저 기사 전후에 한의대에 입학하여 2024년의 오늘을 목격하고 있는 후배 한의사들 중에는 최근 여권을 탈당하며 제3지대로 자리를 옮긴 한 중진 의원의 고백처럼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의 다른 버전으로 “부모님도 속고 나도 속았다”라며 ‘그 때 한의대가 아닌 의대를 갔었어야 했는데, 의대를 가고도 남을 점수였는데 미쳤다고 한의대를 좋다고 다녔구나’라며 때늦은 후회에 가슴을 부여잡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20년 전에는 우리 모두 예측하지 못했었다. 2024년 한의사와 한의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이렇게까지 급변할 줄은!! 인생은 예측불허이고 삶은 늘 느닷없다!!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Paul Valéry)의 탁월한 문장들 중 “우리는 뒷걸음질로 미래에 들어선다”는 글귀에 오늘의 시선을 고정해본다. 지난 20년간 나는 혹은 한의계는 시대적 변화에 올라타지 못한 채 뒤로 밀리고 옆으로 넘어지고 뒷걸음질치며 2024년이라는 오늘에 떠밀려 들어와 버린 건 아닐까? 지금부터라도 이전의 20년과 차원이 다른 노력과 도전을 한다면 앞으로 20년 후는 오늘과는 조금 다른 나은 미래를 만날 수 있을까? 스스로를 글감옥에 가두고 하루 16시간씩 집필에만 몰두하셨던 조정래 선생님이 2023년 11월 신간 『황금종이』의 출간기념 기자간담회에서 향후 계획에 대한 질문에 2030년에 등단 60주년에 맞춰 아마도 당신 살아서 쓰시는 마지막 소설이 나올 예정이라고 답을 하셨다. 80세를 넘기고도 창작을 멈추지 않으시는 생의 마지막 작품을 준비하시는 그 징글징글한 꾸준함을 이길 자 과연 있으랴? 정치인의 노욕은 추악하기만 한데 예술가의 노욕은 이토록 숭고하다. 정치는 짧고 예술은 길다. 일상이 모여 일생이 되고 내가 반복하는 것이 결국 나 자신이 된다. 영국의 현대예술가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는 “무엇이든 예술이 되는 순간 두려움은 극복되는 것 같다”라고 말한 바 있다. 예술하는 마음으로 2024년의 모든 두려움을 극복해 나가자. -
신미숙 여의도 책방-47신미숙 국회사무처 부속한의원 원장 (前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 2023년 1월에 쓴 칼럼을 다시 꺼내 읽어본다. 마감일 닥쳐 겨우 써낸 내 글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상당히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래도 ‘무슨 생각으로 올해를 시작했던가?’ 회상을 제대로 해내려면 근거가 필요하다. 제목은 『그 나이에는 그 나이가 흐른다』였고 장자크 루소의 주치의인 티소의 책 『읽고 쓰는 사람의 건강』의 서평이 글의 주된 내용이다. 글 말미에는 그 달 설연휴 이틀에 걸쳐 MBC에서 방송된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의 주인공이신 김 선생님께서 등산에 임하는 자세로 소개하신 “사부작 사부작 꼼지락 꼼지락”처럼 나 역시 그런 자세로 한 해를 살아가겠다고 소박하게 다짐을 하고 있었다. 2023년 1월20일 금요일자 한겨레신문에는 『평생 처음 한 인터뷰 얼마나 베푸셨나 물으니 입 꾹 다문 참어른』이라는 제목으로 김장하 선생님을 다룬 전면 기사가 실렸었다. 이 기사를 통째로 진료실 책상 앞 파티션에 붙여둔 채 올해를 시작했다. 1년 가까운 시간을 입은 신문지의 색깔은 누런 갱지처럼 약간 탈색이 되어가고 있다. 진료실과 치료실을 수없이 오가며 PC 모니터로부터 눈을 약간 들어올리면 기사 속 인자하신 김 선생님의 얼굴이 바로 보인다. 선생님 얼굴을 꽤 자주 들여다 보았고 그 기사를 반복해서 읽었다. 2023년 한 해를 버티도록 힘을 주셨던 선생님의 2부작 다큐는 올해 4월 백상예술대상에서 지역방송사(경남MBC) 최초로 TV 부문 교양 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러닝타임 105분으로 편집되어 영화로 재탄생한 이 작품은 현재 넷플릭스에서도 볼 수 있으며 지난 11월16일 국회의원회관 2층 대회의실에서는 영화상영회와 함께 제작진이 참석한 GV(관객과의 만남)가 개최되기도 했다. 놀라운 사실은 김장하 선생님께서는 다큐든 영화든 당신이 주인공으로 출연하신 이 영상을 아직도 보지 않으셨고 앞으로도 볼 생각이 없으시다는 것이다. ‘사부작 사부작 꼼지락 꼼지락’하는 한 해 였을까? 선생님의 이 한결같은 묵직함과 겸손함은 훌륭하다 혹은 대단하다 등의 그 어떤 감탄사로도 표현이 되지 않는다. 올해 초 선생님께 배운 주문 “사부작 사부작 꼼지락 꼼지락”을 읊다보면 ‘하던 일 계속 하고, 가던 길 쉬지 않고 걸어가는 것, 그것이 삶이구나’ 싶은 작은 깨달음에 도달한다. 그렇게 일년 이년 살다 보면 밥은 먹고 살 수 있을 것이고 운이 더 따라준다면 김 선생님께서 하셨던 일의 1000분의 1 정도의 크기로라도 이 사회에 좋은 일을 할 여유를 가지게 될 지도 모른다. 여러 종교를 넘나들며 영성과 마음 공부에 관한 유명한 혹은 초야에 묻혀 지내시는 수많은 구루(guru)들과의 대담 영상을 주로 올리시는 조현 기자의 『조현TV 휴심정』이라는 유투브 채널을 자주 보고 듣는다. 죽음학의 대가로 알려진 종교학자 최준식 교수님이나 『불교정신치료 강의』의 저자인 정신과 전문의 전현수 박사님을 알게된 것도 이 채널을 통해서였다. 부적 팔고 사주관상 봐주는 승려가 무당과 무슨 차이냐며 불교가 가야 하는 바른 길을 주창하시는 향봉 스님 말씀이 반가워서 국회도서관에서 스님책을 찾으니 2023년 5월과 8월에 출간된 신간 『산골 노승의 화려한 점심』과 『산골 노승의 푸른 목소리』가 검색되어 서둘러 대출을 신청해본다. 종교가 없는 나로서는 여러 종교 지도자들의 말씀을 접하며 종교를 가질 필요성을 느꼈다기보다는 죽음과 영성에 대한 일정한 경지에 오르신 분들의 깊은 고뇌와 그 고뇌에 이르기까지의 삶의 굴곡진 사연들을 통해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끝’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볼 계기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잘 살다가도 가끔 두려운 순간을 마주했을 때, 여러 대담 속 오가는 대화에 집중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너무도 자연스럽게 눈을 감고 깊은 호흡을 반복하게 된다. 바쁘고 정신 없는 일상 속에서 숨구멍이 되어 주셨던 『조현TV』의 많은 대가들 중에 유독 마음이 끌리고 그래서 귀를 쫑긋 기울이게 되었던 분이 고등학교 시절 조각가를 꿈꾸었다가 치대에 진학하여 치과의사로 임상을 14년 하신 후 불교학도로 진로를 변경하셔서 2000년부터는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과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하신 김성철 교수님이셨다. “질병을 불교적 관점으로 보면 달라지는 것들”, “윤회가 있다는 것들 증명할 수 있을까”, “불교수행의 목표” 등의 강의들은 듣고 또 들어도 좋았다. 불교 공부를 길고 끈질기게 하신 결과물로 들려주시는 여러 말씀들을 통해 어렵게만 느껴졌던 불교에 관련된 몇 가지 의문들에 대해서는 아주 명쾌한 답을 얻을 수도 있었다. 치과의사 출신 불교학자 김성철 교수의 가르침 잊어버릴만하면 조 기자님 채널에 가끔 들어가 새로 올라온 영상을 한번씩 보곤 했었는데 지난 11월23일에는 김 교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다. 향년 67세. 생전 『치의신보』와의 인터뷰에서 “치과의사 시절 하루에 내가 최선을 다해 진료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환자만을 보고 불교 공부를 했다. 생각해 보면 치과의사란 직업만큼 정직한 직업도 없는 것 같다. 우리가 한 치료내용이 환자들에게 그대로 남으니 말이다. 치과의사들이 조금만 덜 가지려 한다면 더 편안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하셨던 말씀도 떠오른다(2016년 7월). 『불교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다른 인문학과 달리 삶과 죽음을 추구하는 학문이 불교학이기 때문에 희망이 있다. 불교학은 보다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면서 삶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한다”라고도 하셨다(2019년 1월). 대승불교의 아버지이자 ‘제2의 붓다’로 불리는 용수(나가르주나)의 중관학으로 석박사를 취득하신 김 교수님은 10여 권의 저서(역서)와 70여 편의 논문을 남기셨다.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된 몇 저서들은 어려워서 감히 읽을 엄두가 안 나고 기존의 글 모음으로 작년 11월에 출간된 『불교적 심신의학과 생명윤리』의 일부는 그래도 접근 가능한 것들이라 아래와 같이 옮겨 본다. - 뇌과학의 최신 연구성과에 비추어 보면 인간은 물론이고 생명체의 모든 체험이 다 그럴 것이다. 우리들이 체험하는 세상만사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듯이 우리들 각자 하나씩 갖고서 혼자만 보는 ‘상자 속의 딱정벌레’와 같다. 모든 것이 나의 주관적 체험이다. - 주관! 내가 보기에는 분명히 실재하는데, 체험되는 것은 나의 주관 뿐이다. 남의 주관은 그 존재를 추측할 수는 있어도 체험할 수는 없다. 우리의 마음 또는 의식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일까? - 무의식이 의식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지만, 마음의 정체를 구명하고자 할 때 그 중심에 있는 것은 명백한 의식이다. 라이프니츠(Leibniz, 1646∼1716)는 “도대체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 존재하는가?”라는 ‘존재의 근본 의문’을 토로했지만 이는 “도대체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의식이란 게 있는가?”라는 ‘마음의 기원에 대한 의문’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 객관 세계의 모든 것들은 언제나 주관인 의식에 의해 그 존재가 확인되기 때문이다. 도대체 의식이란 무엇인가? 마음이란 무엇인가? - 불교의 경우는 내담자의 고통이 무엇이든, 명상을 통해서 사성제의 진리를 철견(徹見)할 때 모든 심리적 고통이 해결된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그 방식이 독특하다. 혹 상담자가 개입한다면 상담자는 내담자로 하여금 사성제를 철견할 수 있도록 지도해 줄 뿐이다. 이와 달리 정신분석에서는 상담자가 내담자의 무의식을 드러냄으로써 심리적 고통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 생명공학을 포함한 의료기술에는 인류의 질병 치료라는 밝은 측면이 있지만, 그 이면에는 이를 위해 실험실에서 살해당하는 무수한 실험동물들의 고통이 수반되어야 한다. 오늘 이 순간에도 수많은 실험동물들이 인류의 복지와 안락을 위해 희생당하고 있다. 인류라는 생명군이 누리고 있는 지금이 이 풍요는 다른 생명군의 처참한 희생을 딛고 이룩된 것이다. 김 교수님은 생전에 “남을 내 몸과 같이 여기는 ‘이타의 감정’인 자비와 ‘절묘한 분별’을 하는 지혜가 없다면 깨달은 게 아니다”는 말씀으로 자비와 지혜를 갖춘 인지적 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하셨고 감성적 정서적 정화가 이뤄지지 않은 가운데 머리로만 이성적인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의 위험함을 경고하셨다. 고통과 죽음이 왜 있냐는 질문에 애초에 생성과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불교학에서의 가장 근본적인 법칙을 떠올리면 유독 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모여있는 동네가 있는데 이는 동네 노인정이 아닌 국회다. “이러다 다 죽어!!”가 아닌 “나, 다시 돌아갈래!!”라는 영화 대사가 훨씬 어울리는 2023년 연말의 국회는 벌써부터 복작거린다. ‘아름다운 퇴장’이라는 내리막길을 걸어가다가 유권자들로부터 완벽하게 잊혀지는 존재가 되어야 마땅할 72세의 김모, 정모 전 의원님과 75세의 이 모 전의원님도 모자라 팔순을 넘긴 박 모 전 의원님까지 내년 4월 총선을 준비하고 있다는 뉴스가 들려온다. 참담함을 넘어 공포 그 자체이다. 자비와 지혜 갖춘 인지적 수행의 중요성 강조 지역소멸과 그에 따른 지방국립대의 위상 추락, 흑사병 창궐 수준에 비유되는 역대 최저를 기록한 저출생과 인구감소 거기에 우울증과 외로움에 잠식당한 것도 모자라 저렴한 중국산 마약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우리의 10∼20대들 문제들은 논외로 쳐박아 둔 채, 몇몇 정치인들에게는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초고령 시대만 보이는 모양이다. 청년 비례니 젊은 당대표니 온갖 미사 여구에 정치판으로 모여드는 젊은층들을 띄워주는 모양새는 완벽한 연기였다. 그 초고령 시대의 파도 위에 “우리는 그래도 이렇게 버텨냈다!”라고 소리치는 꼴이라니 볼썽사납다. 3선, 4선도 모자라 5선, 6선에 도전하며 출판기념회에 몰려든 인파 사진을 페이스북에 게시하며 ‘여기 모인 노인들 중에 내가 젤 잘 나가는군’ 생각하며 뿌듯하셨을 것이다. 내년에 이분들이 모조리 국회에 입성이라도 하신다면 그리 멀지 않은 날, 22대 국회는 강시국회 혹은 좀비국회 아니 백세 시대를 반영하는 ‘노인이 최고당’ 국회로 조리돌림 당할 것이다. 늙었다고 모두 낡은 사람들은 아닐테지만 70∼80대 어르신 의원들이 바글대는 국회가 과연 이 나라의 미래를 논할 수 있을까? 조용히 뒷방에 찌그러져 있는 것이 노인의 미덕이나 의무는 아니더라도 박수칠 때 떠나야 하고 또한 떠날 때는 말없이 사라져야 한다. 쇠퇴의 길은 누구에게나 닥치기 마련이기에 고인물들이 증발되어야 그 자리에 새 싹도 나는 법이다. 버텨내야 존재하는 미미한 존재들은 이토록 삶이 만만치 않은데, 맨 꼭대기에서 단물만 쪽쪽 빨며 다 누려온 자들이 끝까지 삶의 절정만을 맛보며 죽는 그 날까지 현역으로 살겠다고 덤벼드니 그 맹렬한 투지는 아름답다기보다는 추악하다. 많은 도전과 변화 있었던 2023년 ‘아듀’ 『버텨내고 존재하기』는 음악인 최고은이 바라본 광주스러움을 나누고자 초대한 일곱 뮤지션이 광주극장에 방문하여 각자의 ‘버텨내고 존재하기’에 대해 말하고 노래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로 올해 11월1일 개봉했다. 광주극장은 1933년 설립된 호남지역 최초의 극장으로 1935년 개관하여 현재까지 같은 자리에서 영화를 상영 중인 단관극장이다. 이 극장에는 1990년대부터 오늘까지도 상영 중인 영화의 대형 간판을 손으로 직접 그리는 화백님이 여전히 근무 중이시다. 1935년부터의 역사도 단관극장으로서의 일관성도 아날로그식 간판의 고집도 버텨냈기에 존재하고 있고 존재하고 있기에 2023년 영화의 소재도 될 수 있었다. 20년간의 봉직의 생활을 마치고 53세에 처음으로 암사역 근처에 한의원을 개원한 성실왕 선배님이 계신다. 30대 중반에 첫 번째 한의원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고 이제는 지역도 규모도 월세도 역대급인 곳에서 두 번째 도전을 준비 중인 능력짱 제자도 있다. 광주광역시에서 첫 번째 한의원을 잘 해내고 이번에는 대구광역시로 지역을 옮겨서 두 번째 도전을 준비 중인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중인 또 다른 제자도 있다. 5년간 프랜차이즈 한의원 운영을 잘 해낸 후 입시준비를 본격적으로 해야 하는 딸냄을 위해 잠시 개원가를 떠난 후배도 있다. 올 한 해 한의계의 수많은 동지들도 많은 도전과 변화를 마주했을 것이다. 버텨내기 위해 용을 썼고 그 결과 이 순간 우리는 존재하고 있다. 내년에는 너무 애만 쓰는 버티기 말고 각자의 존재감을 색다른 방식으로 뽐내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래본다. “미리 메리 해피뉴이어”
많이본뉴스
많이 본 뉴스
- 1 “비전문가적 편견으로 허위 보고한 보건복지부 장관은 각성하라!”
- 2 대한한의진단학회, 23일 동계학술대회 온라인 개최
- 3 국회 ‘AI헬스케어포럼’ 출범…“AI헬스는 의료 생존 전략”
- 4 “한의난임사업 확대하고 한의학 연구 지원하라”
- 5 초고령사회에서 노인 우울증의 임상적 중요성과 한의학적 접근
- 6 심평원 서울본부, 하반기 ‘워킹챌린지’ 우승…지속적 ESG 나눔 실천
- 7 보건복지부, 한의약정책관 공개모집
- 8 식약처-부산대 '천연물안전관리연구원' 개소
- 9 여드름 흉터, 왜 성인에게 더 잘 남을까?
- 10 울산광역시한의사회, 이주노동자 한의의료봉사단 해단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