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의신문] 한국학중앙연구원 AI사회연구소(소장 한도현)가 한국포스트휴먼학회·경남대 교양교육연구소와 공동으로 ‘한국소버린AI포럼’을 창립, 지난달 18일부터 총 5회의 걸친 콜로키움을 진행하고 있는 가운데 지난달 24일에는 전종욱 전북대 교수(한의사)가 ‘동의보감과 AI의 융합: 한국형 AI 혁신의 사회적 가치’를 주제로 발표를 진행, 전통 한의학과 AI 기술과의 융합을 통한 신약 개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해 눈길을 끌었다.
이날 전종욱 교수는 “현재 AI는 모든 분야의 전문지식을 다 갖추고 있으면서, 한 사람의 인간을 도와줄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도래했다”면서 “이처럼 인간이 AI를 부리고 있는 시대에서, 과연 우리가 이젠 어떤 주인이 되어야 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라고 운을 뗐다.
전 교수는 이어 “‘동의보감’에서 보듯 우주와 인체를 전일적으로 보는 방식이 한의학에 깊이 스며있는 것처럼, 전통시대 지식인들의 학문은 애초에 통합적이었고, 또 세상 모든 지식을 섭렵하기즐 주저하지 않는 ‘전지박학(全知博學)’의 강렬한 전통이 있어왔다”고 역설하면서, 일례로 조선후기 실학자 서유구가 편찬한 ‘임원경제지’ 중 특히 의학편 ‘인제지’가 갖고 있는 가치에 대해 중점적으로 설명했다(유튜브 전종욱의 4통8달 참조).
전 교수는 “‘인제지’는 조선후기 가장 방대한 종합의서로서 사실상 동의보감의 모든 내용을 포괄하고 있으며, △내인 △외인 △내외 겸인 △부과 △유과 △외과 △비급(구급상황) △부여(附餘·침구수혈, 수채시령, 탕액운휘, 구황 등 포함) 등 총 28편으로 구성돼 있다”며 “이중 ‘탕액운휘’는 매우 독특한 방식의 ‘처방 색인’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는 아울러 “탕액운휘에는 본문의 4799개 처방이 다 색인화 되어 있고, 분량만 해도 A4 용지로 200페이지 가까운데 직접 검증해 보니 오류가 하나도 없다”면서 놀라워하면서, “이를 통해 통합과 박학뿐만 아니라, 지식 데이터를 치밀하게 정비하는 전통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이는 AI시대에 무엇보다 요청되는 덕목”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전종욱 교수는 조선 지식인의 이러한 지적 전통에 촉발받기도 하고 KAIST 의과학대학원에서의 특별한 협력연구를 발판으로 하여, 전통의약 지식기반 신약 개발 플랫품을 구축한 이야기와 더불어 그것을 활용해 유방암에 대한 항암화합물질 ‘루틴’을 발견한 과정을 담은 연구논문을 소개했다.
전 교수가 지난 2023년 SCI급 학술저널 ‘BMB’에 발표한 이 논문은, ‘인제지’와 ‘동의보감’에 수록된 수천 가지 처방을 기본 자료로 삼아 암(적취, 적괴, 혈괴 등을 포함)의 치료와 관련된다고 여겨지는 약재를 추출한 후 그 속의 식물성 화학물질(phytochemical)의 작동 양상을 미리 3D 가상 도킹 방식으로 스크리닝했으며, 그렇게 해서 뽑아낸 유력한 후보물질이 ‘루틴(rutin)’이었다. 루틴은 유방암 세포의 EGFR 수용체 신호를 차단할 수 있다고 스크리닝을 통해 예측했고, 그에 따라 암세포주와 마우스 실험을 수행해 실제 항암 효과를 입증한 것이다.
이와 함께 전통의약 지식기반 신약 개발 플랫품에 대한 2개의 특허 등록을 마쳤다고 밝힌 전 교수는 “이 두 가지가 한의약 기반 신약 개발의 두 방향을 상호보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특허를 받은 △한의학 고전을 기반으로 유력한 활성물질을 추적하는 방법(intra-herb approach) △최적의 약재궁합을 추적하는 방법(inter-herb approach)을 소개했다.
이어 전 교수는 누구나 이같은 정보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공용 플랫폼 ‘메디플랜트(MediPlant)’를 시연하면서 전통의약지식을 활용한 신약 개발의 가능성에 대해 눈에 보이는 비전을 제시했다.
이와 관련 전 교수는 “이미 전통의약지식의 DB화가 상당한 시간 동안 진행되어 왔지만, 앞으로 AI 기술과 결합으로 지식을 참조하고 보존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과학적 가설을 발견하고 국가의 미래 연구패러다임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간다면서, 이것은 수백년 전 조선 문명, 아니 1만년 전 인류 문명의 과거로부터 미래를 새롭게 발굴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세종대 의서 의방유취(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번역책임자이기도 한 전 교수는 “고문헌에서 신약 개발까지 연결하는 방대한 플랫폼 구축 연구는 한·중·일 3국의 전통의학이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목표이기도 하다”면서 “마치 동아시아 한자문명권처럼 ‘한의문명권’의 실체를 확인하여 세계의학에 기여하는 방안에 대해 한국에서 이니셔티브를 가지고 추진해 나간다면 국제적 차원의 대형 연구사업도 실행 가능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