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신문]능지탑의 저녁노을을 보기 위해 낭산을 찾았다. 능지탑은 신라 30대 문무왕의 화장터로 추정된다. 본래 5층탑이었는데 2층만 복원해둔 상태다.
탑 한쪽에 모아둔 석재를 통해 1,000년전 웅장했던 탑의 위용을 짐작할 뿐이다. 12지신상이 새겨진 기단 위에 연화문 석재를 두르고 석재 위에 흙을 쌓고 그 위에 탑신을 쌓은 독특한 양식이다.
왕은 죽어서 동해의 용이 되겠다고 했다. 거대한 봉분을 세우는 대신 화장을 택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다. 『삼국사기』는 문무왕의 육성을 이렇게 전한다.

“옛날 만사를 아우르던 영웅도 끝내는 한 무더기 흙더미가 되고 말아 꼴베고 소먹이는 아이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가 그 옆에서 굴을 팔 것이니 분묘를 치장하는 것은 한갓 재물을 허비하고 사책에 비방만 남길 것이요, 공연히 인력을 수고롭게 하면서도 죽은 혼령을 구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마음이 쓰리고 아픈 것을 금치 못하겠으되 이와 같은 것들은 내가 즐겨하는 바가 아니다” 그리하여 동해 바다 해중릉에 묻혀 동해의 용이 되었다.
능지탑의 늦가을은 조락과 소멸의 처연함으로 가득하다. 낮은 언덕임에도 경주시가지가 한눈에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왼쪽으로는 동남산에서부터 경주박물관 반월성 충효동아파트단지와 선도산이 눈에 들어오고 오른쪽 끝으로 동천동이 펼쳐진다.
해는 서산마루에 걸려 있다. 첩첩이 늘어선 산들이 물결처럼 일렁이고 산 뒤로 숨은 해는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능지탑 기단의 사천왕상은 잠시 붉은 빛을 비추는가 하더니 형체를 알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 졌다. 탑 뒤에 시립해있는 세 그루 소나무 실루엣 위로 새들이 지나간다. 새들은 저녁 노을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옛어른들은 곱게 물든 저녁노을을 ‘낙하落霞’라고 불렀다. 양형·노조린·낙빈왕과 함께 ‘초당사걸’로 불리던 왕발王勃이 ‘등왕각서滕王閣序’에서 처음 읊은 뒤 중국은 물론 조선의 선비들이 저녁노을을 노래할 때 반드시 인용하는 단어다. ‘지는 노을은 한 마리 따오기와 나란히 날고 가을 강물은 긴 하늘과 한 빛이다 落霞如孤鶩齊飛 秋水共長天一色’.
재미있는 사실은 문무왕과 왕발이 같은 시대를 산 사람이라는 것이다. 문무왕은 626년에 왕위에 올라 삼국통일 5년 뒤인 681년 세상을 떴다. 왕발은 650년생으로 26세인 676년에 죽었다. 왕발이 죽던 해인 676년은 문무왕이 왕발의 조국인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실질적으로 이루던 때이다.

신기한 경험이다. 능지탑의 노을을 즐기다가 왕발의 ‘낙하’를 알게 됐고 문무왕과 왕발이 동시대를 살다간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두 사람이 1천400년이 지나 저녁노을 통해 내 안에서 만난 것이다. 다시 왕발의 ‘등왕각서’다. “관문과 산을 넘기 어려우니 누가 길 잃은 사람을 슬퍼해 주겠으며 물에 뜬 부평초가 서로 만나니 모두 타향의 나그네들이다”
“옛날 만사를 아우르던 영웅도 끝내는 한 무더기 흙더미가 되고 말아 꼴베고 소먹이는 아이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가 그 옆에서 굴을 팔 것”이라던 문무왕과 닮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