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숙
국회사무처 부속한의원 원장
(前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
[편집자주]
『신미숙의 여의도 책방』은 각 회마다 1개의 키워드에 5권의 도서를 추천하는 형식으로 이어갑니다.
1920년생 김형석 교수님은 당신이 97세였던 2016년 『백년을 살아보니』라는 책을 출간하셨다. 이 책을 기점으로 오늘까지도 많은 미디어에 ‘100세 철학자’라는 별칭으로 불리우고 있다. 한 해를 떠나보내며 전국의 쉰살 친구들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쓰는 기분으로 “우리 이쯤에서 지난 오십년에 대한 이야기 좀 해보자”라는 글을 써볼까 생각하는 순간, 김 교수님의 명저(?) 앞에 한 글자를 덧붙인 『반백년을 살아보니』라는 제목이 먼저 떠올랐다.
아무리 백세시대라 해도 쉰을 전후한 자들은 결코 혹은 감히 젊은이 범주에 끼어들 수는 없다. 여자라면 폐경을, 남자라면 은퇴를 슬슬 준비해야 하는 가까운 미래는 암담한데 대학생이 된 자녀들에게 들어가는 돈단위는 이제 수십만원에서 수백만원은 기본이고, 유학이라면 수천도 너끈히 준비해 주어야 한다. 나와는 차원이 다른 능력에 화려한 부모 배경까지 갖춘 3040들이 즐비하고 8090에 접어드신 부모님들에 대한 근심의 강도 또한 정점을 향해간다. 문득 외롭고 가끔 버겁다. 결코 쉽지 않은 나이, 반백년을 살고나니 저만치서 환갑이 나를 향해 손짓이라도 하는 것 같다. “어서 와!! 50대는 처음이지? 60도 금방이다. 정신 차려, 이 친구야!!”
知天命, 좌표를 알게 됐다는 표현과 닮아있어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에서는 50세를 ‘지천명(知天命)’이라 하였다. 지난 12월12일 노벨상 일정을 마무리하며 스웨덴 외곽의 한 도서관에서 학생들을 만난 한강 작가는 “노벨문학상 수상은 내가 지금 어디쯤에 있는지 좌표를 알게 해 주었다”고 말했다. 좌표(座標)는 수학적 의미로 점의 위치를 나타내는 수나 수의 짝을 말한다. 한자로는 ‘앉아 있는 장소나 위치를 표시하는 것’이고 비유적으로 사물이 처해 있는 위치나 형편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좌표를 알게 되었다는 표현은 50을 이르는 지천명과 무척 닮아있다.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격언인 “너 자신을 알라(γνῶθι σεαυτόν 그노티 세아우톤)”도 자동으로 떠오른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제대로 알면 내가 있을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고 땅에 두 발 제대로 딛고서 그 곳에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게 분명해 보이는 천직(calling)을 건강하게 수행하고 있을 것이다. 좌표, 지천명, 너 자신을 알라! 이 세 가지가 제대로 갖춰지는 데에 태어나서 50여년의 시간이 걸리는 것은 아닐까? 멋진 말로 운명, 속된 말로 팔자를 받아들이게 되는 나이가 바로 오십인 것이다.
이 세월의 강을 건너고 있는 나에게 다가온 깨달음 한 대목은 다양한 주제에 관한 가치평가를 하는 경우 선악, 흑백, 좌우 등으로 이븐(even)하게 이분(二分)하는 성급함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정치 성향을 질문받았을 때 ‘중도’나 ‘잘 모르겠다’가 뚜렷한 정답지를 선택한 퍼센트만큼이나 많은 모양이다. 애매모호함이 아닌 신중함일 수도 있고 정치에 대한 논쟁은 그저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예고된 마상을 원천 차단하고픈 의도적인 회피전략일 수도 있다. 파랗거나 빨갛거나 원색적인 깃발만큼 선명한 대결구도를 유지 중인 정치의 현장에서 중립을 택한다는 것은 회색지대로 폄하되거나 ‘새정치’로 판갈이를 시도했다가 지금은 존재 자체가 ‘성대모사하기 가장 쉬운 정치인’으로 전락해버린 분이 유행시킨 극중주의처럼 끝도 없는 조롱과 풍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우리 편이냐 vs 저 쪽 편이냐’의 갈등이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는 선거철이건 그렇지 않건 정치에 대한 무관심한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위험하다. 동시에 정치과몰입한 시민으로 산다는 것 또한 여간 품이 많이 드는 삶인지라 뭐든 과하지 않게 그래도 해야 할 기본은 하면서 중요한 집회도 나가면서 일상도 챙기며 그렇게 걷다보니 올해도 12월이 와 버렸다.
동년배들이 쓴 책을 반가움에 후원심에 덥썩덥썩 집어들 50대 독자층이 탄탄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인지 오십대를 위로하고 응원하는 책들이 유독 많다. <오십, 나는 재미있게 살기로 했다>, <오십의 기술>, <오십, 내 안의 데미안을 만나다>, <잠 못 드는 오십, 프로이트를 만나다>, <오십의 태도>, <오십부터 삶이 재미있어졌다>, <오십대는 무엇으로 사는가>, <50대 두 남자, 나를 찾아 떠나는 바르셀로나와 남프랑스 여행>, <오십 너머에도 천 개의 태양이 빛나고 있지> 등 이 많은 오십의 바다에서 내가 건져올린 오십서는 다음과 같다.
『오십의 발견』(이갑수, 민음사, 2013년 3월)
경향신문에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을 연재 중인 궁리출판 이갑수 대표의 수필집으로 맛깔스러운 제목과 그에 딱맞는 맛있는 글이 한 권 가득이다. 오십대 초입에 도달해서 다시 읽어보니 다 내 이야기인 것 같다.
- 유정물이나 무정물이나 다 같이 병들고 늙는다. 같은 배에 탄 운명이다.
- 이제 나는 인생의 저녁에 곧 도착하려고 한다.
- 그저 내 몸도 숭숭 뚫린 구멍들의 집적이다. 허공의 집합이다. 나란 그야말로 텅 비어 있는 존재!
- 모두가 얼기설기 조립된 이 기묘한 세계. 언젠가는 나 또한 부실한 이처럼 흔들릴 대로 흔들리다가, 치통을 앓을 대로 앓다가 이 세계에서 툭 떨어져 나갈 것이다.
- 마흔다섯은 귀신이 와 서는 것이 보이는 나이라 했다. 하지만 거기에 다섯을 더 얹어도 귀신은커녕 한숨만 늘었다.
- 이대로 잠들었다가 내일 아침 깨어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하면서 잠드는 시기가 있다. 모두들 그런 경험이 있다고들 한다. 죽음에 대한 어렴풋한 공포요 체험일 것이다.
- 몸의 아래쪽을 담당하면서 땅과 늘 접촉하고 있는 발바닥. 우리는 죽어서 흙으로 간다는데 그렇다면 이 발바닥은 늘 죽음의 입구를 경계하는 셈이 아닌가.
『인생은 왜 50부터 반등하는가』
(조너선 라우시, 부키, 2021년 8월)
저자는 브루킹스 연구소의 선임 연구원이자 미국의 대표적 시사주간지 <The Atlantic> 기고 작가로 주로 정치, 공공 정책, 문화, LGBT 인권에 관한 책과 기사를 쓴다.
- H=S+C+V+T (H:지속적인 행복의 수준, S:이미 설정된 행복의 범위, C:삶의 상황, V:자의로 다스릴 수 있는 요소, T:나이 듦)
- 시간은 절대적이지만 나이 듦은 상대적이다.
- 다행히 중년의 우울한 현실주의는 사실은 비현실적이다. 인생은 더 나아진다. 그것도 훨씬 더 나아진다.
- 50세 무렵부터 스트레스가 감소한다. 나이 들면서 정서 기후가 대체로 안정되는 이유 중 하나는 인생의 경험이 쌓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 시간의 지평이 바뀌면 우리가 세우는 목표와 우리가 하는 선택의 양상이 바뀐다.
- 횡적으로, 점진적으로, 건설적으로, 논리적으로 움직이자. 그러면 충동적으로 실수를 범할 확률이 낮아지고 불리한 상황을 더 잘 관리할 수 있게 된다.
- 큰 도약이 필요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뛰어오르는 대신 달성 가능한 목표를 향해 작은 걸음을 내딛는 것이 더 성취하기 쉬울 뿐 아니라 보통은 더 큰 만족감을 준다.
- “지나면 더 좋아진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지혜다. 그리고 가장 사용하기 어려운 지혜다.
- 우리 삶에서 무엇이 정상인지 결정하는 건 과학이 아니라 사회다. 이래서 사회적 물길이 중요하다.
『50이후, 건강을 결정하는 7가지 습관』
(프랭크 리프먼, 대니얼 클라로, 더퀘스트, 2022년 5월)
MD 프랭크 리프먼은 통합의료 및 기능의학 분야의 개척자이다. 편집자인 대니얼 클라로는 프랭크 리프먼과 함께 <뉴욕타임스>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활동 중이다.
- 나는 30년 넘게 뉴욕시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하면서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을 접목해서 진료를 했다. 효과가 좋은 처방 중에는 동양의학의 원리를 응용한 것이 많다.
- 면역체계의 70퍼센트는 배 속에 있다.
- 중년 이후의 건강한 삶을 위해 가장 중요한 변화가 바로 소식이다.
- 만성적 염증은 처음부터 증상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여러 질병의 숨은 원인이 된다.
- 한 가지 운동을 하는 동안에도 음양의 원리를 적용해보자. 음양의 조화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 부상을 당했는데 잘 낫지 않는다면 개입이 필요하다. 침 치료든 물리치료든 지압 마사지든 간에 조치를 빨리 취할수록, 그리고 당신의 나이가 어릴수록 효과가 좋다. 가장 약한 개입부터 시도하고 필요하다면 강한 개입으로 전환하라.
- 태극권은 부상의 위험이 거의 없으면서도 몸을 강하게 만들어준다. 태극권은 다리와 코어의 힘을 키워주고, 균형감각을 길러주고, 몸 어디에 긴장이 축적되는지 알아내서 그 긴장을 풀도록 해주고, 몸이 땅에 확고하게 뿌리 내리도록 해준다.
- 침술은 근육통, 스트레스 완화, 불면증, 두통, 호르몬 문제 등에 효과적이다. 침술은 기가 막힌 곳을 뚫어서 기의 흐름을 회복한다. 많은 사람이 침술로 이완 효과를 톡톡히 본다.
『오십,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제임스 홀리스, 북아지트, 2022년 8월)
스위스 취리히의 융 연구소에서 정신분석을 공부한 저자는 현재 미국에서 융학파 정신분석가로 활동 중이다. 그는 우리가 인생의 중반쯤에 겪는 실존적 위기를 ‘중간항로’라 정의하며, 융 철학을 바탕으로 이 시기를 현명하게 건너기 위한 지혜를 가르쳐준다.
-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해야 할’일에 매달려 살았는가? 그런 삶이 잘 풀리긴 했는가?
- 심리학과 신경학을 넘어 동서양 철학도 인간이 그 어떤 현상도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는 데 동의한다.
- 일상적인 기분 전환이 그 소통을 되살리는 데 효과가 없을 때 우리는 갖가지 진통제와 이데올로기적 최면제에 빠지고 만다.
- 과학주의는 새로운 신화로서 어마어마한 신뢰와 투자를 받지만 이에 따르는 결과는 깊이 고려되지 않는다.
- 외로움의 해독제는 타자와의 애착이 자신의 생존에 꼭 필요하다는 환상을 버리는 것이다. 궁극적인 해독제가 없어도 괜찮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자체가 해독제다.
- 우리는 날마다 내면에서 거대한 투쟁을 치른다. 두려움의 위협과 무기력의 유혹 사이에서 자아가 치이다 보면 진정한 삶이 생겨날 틈이 전혀 없다.
- 우리는 의미를 추구하고 의미를 만들어내는 피조물이다. 융이 지적했듯 “삶에서는 무의미한 최대보다 의미 있는 최소가 항상 더 가치가 있다.”
『인생의 절반을 지나면 누구나 철학자가 된다』
(바르바라 블라이슈, 웅진지식하우스, 2024년 12월)
철학자이자 언론인인 저자는 현재 대학에서 응용윤리, 경영철학 그리고 의철학을 강의하고 있다. 변화하는 중년의 정의와 사회적 역할을 넘어 중년의 철학을 모색한 이 책은 부제처럼 흔들리는 오십을 위한 철학의 지도가 되어줄 것이다.
- 노화와 노쇠, 다가오는 죽음을 현명하게 다루는 법은 고대부터 이어진 철학의 관심사였으며 여전히 인기 주제다.
- 생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실존적 의문과 새로운 질문에 맞닥뜨리며 근본적인 위기의 시기를 맞이한다. 중년이 철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 어떤 순간은 너무 소중해서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만으로 서글퍼진다.
- 아직 먼 곳에 있기는 하지만 확실한 인생의 종착점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그 끝을 맞이하기 전에 중년을 겪는다는 것이다.
- 쉰 살 무렵에 이르면 유한성에 대한 깨달음은 점점 커진다.
- 자신의 유한성을 떠올릴 때 우리는 ‘본질에 집중’하고, ‘불필요한 것을 비우고 과도한 것을 흘려보내’는 정도의 주체성을 얻게 된다.
- 인생의 중요한 이정표가 자신의 신념이나 욕망과 일치하지 않으면 최악의 경우 마르틴 하이데거의 말대로 ‘비본래적’ 삶을 살게 된다.
- 인생은 이성을 갈고닦아 완성할 때 비로소 좋은 삶이 되며, 이는 곧 덕이 있는 삶이다.
- 진정한 어른이란 나이를 먹은 사람이 아니라 나이게 맞게 행동하는 사람이다.
2025년, 을사년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은?
12월 초 그 엄청난 사건을 아주 가까이에서 목격하고 관찰했던 나는 ‘무릇 정치는 공기와 같은 것이어야 한다’는 문장을 반복해서 되새기며 쿵쾅대던 가슴을 진정시킨 채 근무했다. 2024년 대한민국에 계엄? 비상계엄? 1980년 5월 여섯 살이던 나는 광주에 살고 있었다. 튼튼하지 않게 지어진 한옥집이라 그랬는지 시도 때도 없이 들리던 총성 소리가 집 전체를 흔들었고 그 혼란한 틈에 휴교령으로 학교를 안 갔던 언니랑 인형놀이 했던 기억도 있다. 통장 아줌마가 오시면 스뎅 찬합에 만들어놓은 주먹밥 십여개를 내어주시던 어머니, 고등학생이 죽었다는데 우리학교 학생 같더라며 성급히 집을 나서시던 아버지의 음성까지 너무도 또렷했던 5·18 광주의 기억은 오십이 된 지금까지도 나에게 계엄 혹은 계엄군이라는 단어와 함께 단단히 밀봉되어 있다.
사람의 기억이란 묘해서 어떤 날은 분명히 좋은 느낌이었는데도 금세 망각의 골짜기로 숨어버리고 또 어떤 나빴던 날들은 아무리 잊으려해도 미간에 붙여놓은 부적처럼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외면하기가 어렵기도 하다.
어른이 되면 내 마음대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어른이 되고 싶은 청소년기도 있었는데 막상 쉰살 어른이 되고보니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여전히 많지 않고 이제는 좋은 노인이 되어야 한다는 그 다음의 목표가 먼저 보인다. 2025년이 오고 있다. 을사년이 우리를 기다린다. 어두운 밤은 가고 새 날이 올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