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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6월 12일 (금)

“한의학 국제표준의 본문은 발음이 아니라 개념이어야 한다”

“한의학 국제표준의 본문은
발음이 아니라 개념이어야 한다”

왜 우리는 지금 이 문제를 논의해야 하는가?

정범길 대한한의사협회 보험정책 전문위원
·인구미래위원회-건강사회행복위원회 자문위원
·前 국민건강보험공단 지사장

[한의신문] 한의학의 국제표준을 둘러싼 논의가 다시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 최근 ISO/TC 249 SC1 WG5 회의를 앞두고 한의학 국제표준 용어 문서의 본문에 중국식 간체 한자와 병음(Pinyin)을 포함할 것인지가 주요 쟁점으로 제기됐다.

 

정범길 전문위원.jpg

 

얼핏 보면 단순한 표기 방식의 문제처럼 보일 수 있다. 한자를 간체로 쓸 것인지, 번체로 쓸 것인지, 병음을 본문에 넣을 것인지, 부록에 넣을 것인지의 문제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사안은 단순히 글자와 발음의 문제가 아니다. 한의학 국제표준의 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 나아가 한국 한의학의 개념과 정체성을 국제사회에서 어떻게 세울 것인가에 관한 중요한 문제다.

 

왜 지금 이 문제를 논의해야 하는가?

 

첫째, 국제표준은 미래의 언어 권력이다. 국제표준에 어떤 용어가 본문으로 들어가느냐는 단순한 편집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앞으로 교육, 연구, 임상, 산업, 정보시스템, 국제 교류에서 어떤 용어가 중심 개념으로 자리 잡을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지금은 ISO 회의 문서 속 표기 하나의 문제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국제 교과서, 연구논문, 데이터베이스, 의료기기, 디지털 헬스케어, 인공지능 학습자료 등에 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둘째, 표준은 한 번 정해지면 되돌리기 어렵다. 국제표준은 만들어질 때보다 고치는 것이 훨씬 어렵다. 한 번 본문에 포함된 표기는 권위를 갖게 되고, 점차 관행으로 자리 잡는다. 병음이 국제표준 본문에 포함될 경우, 다른 문서에서도 이미 ISO 문서 본문에서 사용된다는 이유로 반복되고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병음은 단순한 참고표기가 아니라 사실상의 표준 역할을 하게 될 위험이 있다.

 

셋째, 이 문제는 한국 한의학의 독자성과 직결된다. 한국 한의학은 중국 중의학과 역사적 뿌리를 공유하는 부분이 있지만, 결코 중의학의 하위범주가 아니다. 한국 한의학은 독자적인 역사, 교육제도, 면허체계, 임상체계, 건강보험제도, 연구기반을 통해 발전해온 독립적인 전통의학이다. 일본의 Kampo 역시 별도의 역사와 제도 속에서 발전해왔다. 따라서 국제표준은 특정 국가의 표기체계만을 중심에 놓기보다, 각국 전통의학 체계의 역사성과 독자성을 균형 있게 반영해야 한다.

 

병음을 국제표준 본문에 포함하는 것은 단순한 발음 병기가 아니라 특정 국가의 언어체계가 표준의 중심으로 들어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는 한국 한의학과 다른 전통의학 체계의 정체성을 약화시킬 수 있는 문제다.

 

넷째, 이 문제는 국제표준을 누가 주도할 것인가의 문제다. 국제표준은 단순한 기술문서가 아니다. 각국의 학문체계, 산업전략, 문화적 정체성이 조정되고 때로는 경쟁하는 장이다. 한국 한의계가 이 논의에 적극 참여하지 않고 침묵한다면, 결국 다른 나라의 체계와 용어가 국제표준의 중심이 될 것이다. 국제표준은 기다리는 자의 것이 아니라 준비하는 자의 것이다.

 

다섯째, 디지털 전환 시대의 한의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오늘날의 국제표준은 단순한 문서 표기 체계가 아니다. 전자의무기록, 임상연구 데이터, 인공지능 학습자료, 의료기기 소프트웨어, 디지털 헬스케어 플랫폼의 데이터화와 상호 운용성을 위한 기반이다. 표준용어가 모호하면 데이터도 모호해진다. 데이터가 모호하면 연구와 산업화도 흔들린다. 따라서 국제표준의 본문은 무엇보다 개념을 정확히 식별할 수 있어야 한다.

 

병음의 본질은 용어가 아니라 발음표기에 해당한다

 

병음(Pinyin)은 알파벳으로 한자의 현대 중국식 발음을 표기한 체계다. 병음은 해당 글자를 어떻게 읽는지를 알려줄 수는 있지만, 그 용어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명확히 설명하지는 못한다. 국제표준의 용어는 개념을 대표해야 한다. 용어는 특정 개념을 명확하고 일관되게 지칭해야 하며, 다른 개념과 혼동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병음은 본질적으로 발음 정보다. 발음은 개념의 외피일 수는 있어도 개념 그 자체가 될 수 없다. 예를 들어 동일한 병음이라도 서로 다른 한자와 개념을 가리킬 수 있다. 병음만으로는 해당 용어가 어떤 한자어를 의미하는지, 어떤 전통의학적 개념을 지칭하는지 명확하게 구별하기 어렵다.

 

예컨대 병음‘Gan’은 맥락에 따라 간(肝, Liver)을 의미할 수도 있고, 건(乾, Dry)과 관련된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이처럼 병음은 발음상 동일하거나 유사한 여러 개념을 구별하는 데 한계가 있다. 이는 국제표준이 요구하는 명확성, 비모호성, 단순성의 원칙과 충돌한다.

 

국제표준은 발음을 통일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국제표준은 개념을 명확히 하고, 서로 다른 국가와 제도, 학문체계가 같은 개념을 동일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장치다. 따라서 한의학 국제표준의 본문은 발음표기가 아니라 개념 중심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병음을 국제표준 본문 포함할 경우 나타 날 수 있는 여러 가지의 문제를 예측해 보면 첫째, 교육과 임상현장에서 해석 차이를 증가시킬 수 있다. 같은 병음이라도 국가별 교육체계와 문헌 전통에 따라 다르게 이해될 가능성이 있다. 이는 국제표준이 오히려 현장의 혼란을 줄이기보다 새로운 혼란을 만들 수 있음을 의미한다.

 

둘째, 국가별 용어체계와 데이터 통합에 복잡성을 추가할 수 있다. 하나의 개념에 영어, 간체자, 병음 등 여러 표기가 본문에서 병렬적으로 사용되면 검색, 색인, 데이터 정규화, 시스템 간 호환성에 부담이 커진다. 특히 병음은 개념보다 발음에 가까운 체계이기 때문에 정보시스템에서 표준 개념을 식별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

 

셋째, 중국식 표기체계가 사실상 국제표준의 중심으로 자리 잡을 위험이 있다. 병음이 본문에 들어가는 순간, 국제표준은 영어 기반의 개념표준이라기보다 중국식 음역표기를 중심으로 한 문서처럼 인식될 수 있다. 이는 한국 한의학, 일본 Kampo 등 다른 전통의학 체계의 독자성을 위축시킬 수 있다.

 

물론 병음이 국제적으로 사용되는 현실을 완전히 부정할 필요는 없다. 일부 국가의 교육현장이나 문헌에서 병음이 활용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국제표준 본문의 용어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국제표준은 사용 빈도의 다수결로 결정돼서는 안 된다. 개념의 정확성, 절차적 합의, 문화적 균형, 정보 상호 운용성을 기준으로 수립돼야 한다.

 

본문은 개념의 자리, 부록은 언어와 문화의 자리에 해당된다. 이 문제의 합리적 해법은 명확하다. 국제표준의 본문에는 개념을 명확히 전달할 수 있는 표준용어를 두고, 병음, 간체자, 번체자, 일본어, 한국어 등 각국의 언어와 표기는 부록에서 균형 있게 다루는 것이다.

 

정범길 전문위원님2.png

<AI 생성 이미지> 

 

본문은 국제적으로 합의된 개념을 담는 공간이어야 한다. 부록은 각국의 언어와 문화, 전통적 표기방식을 존중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본문과 부록의 역할을 분명히 구분해야 국제표준의 명확성과 문화적 다양성을 동시에 지킬 수 있다.

 

ISO의 공식 언어 원칙도 중요하다. ISO 기술 작업의 공식 언어는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다. 병음은 알파벳을 사용하지만 영어가 아니다. 알파벳으로 적혀 있다고 해서 영어 용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병음은 중국어 발음표기이며, 따라서 공식 언어 기반의 국제표준 본문에 당연히 들어갈 수 있는 용어로 보기 어렵다. 공식 언어 외 언어를 본문에 포함하려면 그에 합당한 절차와 근거, 회원국 간 합의가 선행돼야 한다.

 

우리 한국 한의계의 대응은 감정적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중국식 표기를 반대한다는 단순한 구호만으로는 국제표준 논의에서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국제표준의 논리는 원칙적이고 전문적이어야 한다.

 

첫째, 병음은 개념이 아니라 발음표기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 병음은 소리를 전달할 수는 있지만 개념을 대표하지 못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둘째, 국제표준의 본문은 개념 중심으로 구성돼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해야 한다. 한의학 국제표준은 특정 국가의 발음체계가 아니라 국제적으로 이해 가능한 개념체계를 중심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셋째, 병음과 간체자, 번체자, 한국어, 일본어 등은 본문이 아니라 부록에서 균형 있게 다뤄져야 한다. 이는 병음을 배제하자는 것이 아니라, 본문과 부록의 역할을 정확히 나누자는 것이다.

 

넷째, 공식 언어 외 표기를 본문에 포함하려면 ISO 절차에 따른 근거와 회원국의 합의가 필요하다는 원칙을 강조해야 한다. 국제표준은 절차적 정당성과 합의의 원칙 위에서 수립돼야 한다.

 

다섯째, 한국 한의학의 독자적인 영어 용어체계를 정비해야 한다. 한국어, 한자, 영어 대응표를 체계화하고, 교육·연구·임상·보험에서 사용하는 한의학 용어를 국제표준 논의에 맞게 정비해야 한다. 또한 ISO 회의에 지속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전문인력과 상시 대응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한의학의 국제화는 발음을 따라가는 일이 아니다

 

한의학 국제표준의 본문은 발음이 아니라 개념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 발음표기는 각국의 언어문화 속에서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국제표준의 본질적 기능은 개념을 명확히 규정하는 것이다.

 

한국 한의학의 국제화는 단순히 다른 국가의 표기체계를 따르는 일이 아니다. 한국 한의학의 독립적인 개념과 가치를 세계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방식으로 설명하고, 국제적 공존과 조화를 이루는 과정이다.

 

본문은 개념의 자리이고, 부록은 국가별 언어와 문화를 존중하는 자리다. 이 원칙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래야 한국 한의학은 특정 국가의 표기체계에 종속되지 않고, 세계 전통의학 속에서 독립적이고 균형 있는 학문체계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우리가 지금 이 문제를 논의해야 하는 이유는 병음 하나를 막기 위해서가 아니다. 한의학 국제표준의 중심을 특정 국가의 발음이 아니라 보편적 개념 위에 세우기 위해서다. 

 

한의학의 국제화는 중국식 발음을 따라가는 일이 아니다. 한국 한의학의 개념과 가치를 세계가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다. 국제표준의 본문은 그래서 발음이 아니라 개념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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