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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4일 (일)

[시선나누기-34] 나의 배우

[시선나누기-34] 나의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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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저온 보리한의원장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공연 현장에서 느낀 바를 에세이 형태로 쓴 ‘시선나누기’ 연재를 싣습니다. 문저온 보리한의원장은 자신의 시집 ‘치병소요록’ (治病逍遙錄)을 연극으로 표현한 ‘생존신고요’, ‘모든 사람은 아프다’ 등의 공연에서 한의사가 자침하는 역할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맞아요, 넘어진다”


-‘모든 사람은 아프다’ 공연에서 무슨 담당이었죠?

-음향 담당이었어요. 

-어땠어요? 힘든 건 없었어요?

-타이밍을 잘 맞춰야 하고... 유진규 선생님이 워낙 꼼꼼하세요. 음향 편집을 직접 해오시거든요. 공연이 좀 어려웠지만 예술적인 느낌은 좋았죠.

-음향을 맡는다는 건 어때요?

-선곡을 오랜 시간 들여서 해요. 극의 분위기에 맞고 연출의 의도와도 맞아야 하고, 극을 파악하고 있어야 하죠. 음향을 맡다 보니 제가 연출하는 무대에서도 음악을 중요하게 쓰는 편이에요.

-지난번에 연출하신 무대 끝나고 제가 박스로 찾아가 질문했던 거 기억하세요?

-기억하죠. 대본에 어떻게 적혀 있냐고 물었죠.

-맞아요. 하하하. ‘그 장면’이 대본에 어떻게 적혀있냐 물었어요.

-‘넘어진다’고 적혀 있다고 했죠.

-맞아요. 넘어진다.

 

CHAD, 느닷없이 바닥에 폭삭 쓰러진다.

RANDY (도로 달려와 바닥에 쓰러진 CHAD를 본다.) 괜찮니?

CHAD 어…

RANDY 왜 그래ㅡ… 일어나… (CHAD를 도와준다.)

CHAD 고마워. 어…

RANDY 왜 그래? 괜찮아? 왜 그런 거야?

CHAD (무슨 일인지 모른다.) 어... 넘어졌어...

RANDY 좀 보자.

CHAD 아냐ㅡ... 난 그냥ㅡ… (잠깐 사이) 나 너를 사랑하는 거 같아. 

RANDY, 할 말이 없다. 

지금 CHAD가 뭐라는 거지?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CHAD, RANDY를 본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다시 폭삭 쓰러진다.

RAN/CHA 아!

CHAD (드러누워서) 그래, 그거야. (일어난다.) 널 사랑한다구. 

 

문저온님2.jpg

 

연극 ‘올모스트 메인’ 2막. 마침내 두 사람이 풀썩풀썩 쓰러지는데, 사랑을 고백하고 사랑이 겁나고 다시 사랑을 받아들이는 그들이 마주 선 채 풀썩풀썩 넘어지는데, 대본에 지시문은 어떻게 되어 있으며, 연출은 배우에게 어떻게 요구했을까, 나는 무척 궁금했다.

-‘사랑에 빠지다’가 ‘fall’인데, 그건 ‘넘어지다’라는 뜻도 되고요. 번역을 거치는 문제가 있지만. 그래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뒤에서 잡아당기듯이  넘어지기를 바랐어요. 자의적이지 않게, 의도하지 않게, 어떻게 움직이든 동작보다 그 호흡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저항을 칼처럼 가슴에 품고


조명이 켜지고 무대 뒤로 사라졌던 배우들이 다시 등장했다. 머쓱한 듯 옷깃을 당기고 머리를 긁적인다. 정방형의 마루로 된 돌출무대가 놓여있다. 극이 시작되자마자 배우들은 마루 위가 아닌 마룻바닥을, 무대 가장자리를 힘겹게 돌기 시작했다. 

붉고 탁한 조명. 몸에 지닌 것 없이 슬로우모션으로 어깨에 흙짐을 둘러멘 노역의 현장을 연기했다. 기역자로 구부러져 가까스로 걸음을 옮기는 몸에 내리꽂히는 일본어와 채찍 소리. 연극 ‘섬’. 탄광, 징용, 어느 날 끌려와 암흑천지인 곳에 갇혀 살아가는 사람들. 일본 천황의 항복 메시지가 울려 퍼지는 마지막까지, 드디어 파도 소리가 섬을 열어젖힐 듯 쏟아질 때까지 그들은 자유를 갈망한다. 꼭 한 가지 저항을 칼처럼 가슴에 품고. 그 저항이 일본군 앞에서 펼치는 연극이라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그는 천생 배우다


-저 때, 극이 끝나고 그대로 불이 켜진 건가요? 

-아뇨, 무대 뒤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온 거죠.

-조금 전까지는 배우로 무대에 서 있었는데, 마치고 나서 저렇게 관객 앞에 서면 기분이 어때요?

-개운하죠. 잡고 있던 긴장을 놓는 시원함이요. 철봉에 매달려 있다 놓게 되는 해방감. 

-연기와 연출은 어떻게 달라요?

-연출은 극의 전체 리듬을 잡아가는 게 중요하고, 연기는 아무래도 본인의 행위를 하면 부분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머리가 아니라 시점으로 말이죠. 

-취중진담 하시던 1인극도 굉장히 좋게 봤어요. 

-1인극은 내 이야기에서 끄집어내야 하죠. 심리적 근거를, 생성되는 걸, 제 안에 갖고 있던 걸 꺼내는 거죠. 

-힘든 작업이겠어요.

-아무래도 그렇죠. 있는 대본을 해석하고 분석하는 것과는 다르죠. 전체 플롯만 정한 다음 그때그때 떠오르는 말들이 흐름을 가지고 가는 상태예요. 

-말의 상태...

-말이 갖고 있는 상태를 중요하게 여겨요. 떠오른 말이 입 밖에 내어지는 과정. 그 각각의 말들이 흐름을 가지는 거. 이 다음을 나는 어떻게 하고 싶지? 고통스럽고 힘든데, 그걸 희석시켜 전달하는 거죠.

 

고통과 생성과 상태라는 말. 시점과 리듬과 행위라는 말. 호흡과 흐름과 전달이라는 말. 그는 천생 배우다. 진료 차트에 십 년 전 이름을 올린, 내가 성장을 지켜보는 나의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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