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원 원장
대구광역시
비엠한방내과한의원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한방내과 전문의인 이제원 비엠한방내과한의원장으로부터 한의사가 전공하는 내과학에 대해 들어본다. 이 원장은 내과학이란 단순히 몸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질환의 내면을 탐구하는 분야이며, 한의학의 근간이 곧 내과학이라면서, 한방내과적으로 환자를 어떻게 진료할 것인가의 해답을 제시해 나갈 예정이다.
한의학은 인체와 자연, 몸과 마음이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고 있다고 인식한다. 이러한 한의학의 정체관념은 의사로서 갖추어야 할 전문직 윤리에도 반영돼 있다. 그 예로 조선 전기 세조의 『醫藥論』에서는 의사를 심의(心醫), 식의(食醫), 약의(藥醫) 등 여덟 부류로 나누었는데, 그중에서 심의를 최고의 의사로, 살의(殺醫)를 최악의 의사로 일컫고 있다.
“뇌내출혈이 있는데요, 인터넷 검색으로 내원했습니다.” 50대 남성 환자가 약간 잠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나의 세부 전공은 순환신경내과(cardiology & neurology)이고, 뇌내출혈은 순환신경내과에서 주로 담당하는 질환이다. 환자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이러한 내용을 보고 내원한 것이다.
환자의 종합병원 의무기록사본을 살펴보았다. 뇌 자기공명영상(brain MRI) 및 뇌 전산화 단층촬영(brain CT)상 우측 조가비핵(putamen)에서 혈종이 관찰됐다(그림 1).
그런데 첫 brain CT 검사를 시행한 날짜를 보니 불과 내원 16일 전이었다. 내원 9일 전 시행한 두 번째 brain CT상 혈종이 약간 감소하기는 하였으나 상당량이 남아있었고, 혈종 주위 부종이 계속 관찰되는 상태였다(그림 2).
내원 시 환자의 혈압은 150/90 mmHg에 이르렀다.
병원 주치의가 퇴원을 지시한 것인지 물었다. 그러자 환자는 도망치듯 겨우 퇴원했다면서, 다시는 입원하지 않겠다고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답했다.
환자의 말에 따르면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내원 20일 전 해외여행 중 갑자기 왼손에 힘이 빠지면서 말을 듣지 않는 증상이 발생했다. 그리고 증상은 다음날 완전히 회복됐다. 3일 후 귀국했으나 일요일이었고, 다음날 검사나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병원을 찾았다. 검사 후 병원에서는 입원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입원했는데 그 후 5일 동안 왜 입원했는지, 현재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 설명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그동안 주치의를 한 번도 못 만난 것이다. 간호사에게 부탁해 겨우 주치의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주치의는 한숨만 쉬며, 자세한 설명을 해 주지 않았다고 했다. 주치의에게 다시 검사해 보고 싶다고 부탁했지만, 주치의는 그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입원 7일째가 되어 두 번째 brain CT 검사를 시행했고, 환자는 검사를 마치자마자 도망치듯 병원을 나왔다고 했다. 어떠한 상황이었는지 대충 짐작이 되었다.
진료실 모니터에 환자의 brain CT 영상을 띄우고 상태에 관해 설명했다. 지금은 뇌내출혈 급성기로서 절대 안정과 함께 적극적인 혈압 조절이 요구되며, 이를 위해서는 입원 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무엇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이 경미하다고 결코 병이 가벼운 상태가 아님을 강조했다. 환자는 자신의 영상을 제대로 보는 것이 처음이라고 했다. 하지만 입원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했다. 환자의 뜻은 완고했다.
퇴원 시 처방받은 암로디핀, 히드로클로로티아지드, 올메사르탄, 카르베딜롤의 고혈압 관련 약물이 오늘 아침까지 복용하고 다 소진된 상태라고 했다. 그래도 약을 처방받기 위해 그 병원에 다시 가지는 않겠다고 했다. 이 같은 양약 복용 후 빈뇨, 무기력, 근육 경련이 너무 심해서 가능하면 한약을 사용하고 싶다고 했다.
신경학적 검사에서 좌측 안면의 중추성 마비와 좌측 상하지 원위부 근력의 경미한 저하(mMRC grade 4+)가 관찰됐고, 수정바델지수(MBI)는 완전 독립 상태였다. 일단, 주 3회 내원과 침구 치료, 매일 2회 이상의 혈압 측정 및 기록, 첩약과 함께 처방될 식단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것을 조건으로 통원 치료를 시도해 보자했다.
자발성 뇌내출혈 및 고혈압 외에 본원의 추가 검사에서 BMI 28.0 ㎏/㎡의 전비만단계, Cholesterol, total 287 ㎎/dL, Triglyceride 300 ㎎/dL의 이상지질혈증이 관찰됐다. 이들 소견과 함께 榮•紅한 舌質, 白•厚•潤•粘한 舌苔, 沈•虛•滑•洪•無力한 脈象을 통해 濕熱證으로 진단 후 中風熱證에 사용하는 防風通聖散을 기본으로 처방을 구성했다.
다행히 환자는 계획된 치료를 잘 따라 주었다. 그 결과 좌측 안면 마비와 상하지 근력 저하가 서서히 회복되고, 화학합성약물 복용 없이 혈압이 안정적으로 잘 유지됐다. 발병 약 3개월 후 시행한 brain CT 검사에서 혈종 및 부종이 모두 호전된 것으로 관찰됐다(그림 3). 치료 5개월 후 BMI 22.5 ㎏/㎡, Cholesterol, total 259 ㎎/dL, Triglyceride 103 ㎎/dL 등 다른 검사 결과도 크게 회복됐다. 환자는 ‘편안한, 건강한 병원 방문이었습니다’라는 말로 치료 과정을 요약했다.
세조가 가장 좋은 의사로 평가한 심의는 환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그 마음이 동하지 않게 하는 의사이다. 한의학은 병을 치료하는 데 환자의 정신 상태를 중요시하고 있으며, 이러한 이론이 전문직 윤리에도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이처럼 한의학 이론은 항상 사람을 향하고 있으며, 한의사는 검사 자체가 아닌 사람을 먼저 생각한다. 도구는 도구일 뿐, 그 도구를 누가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사람을 중심에 두는 한의학 이론을 바탕으로 한, 한의사의 현대 과학 도구 및 진단기기 사용은 국민 건강 증진에 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전 세계 보건의료인에게 큰 귀감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