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간 베트남 의료봉사에서 가장 많이 말했던 단어다. 그저 리그오브레전드 게임 캐릭터로만 알았던 신짜오는, 알고 보니 존중의 의미를 담은 정중한 베트남 인사말이었다.
4월 24일 수요일, 철없는 4명의 원광대학교 본과 4학년(서지명, 김태연, 최지우, 권용한)은 호기롭게 베트남 의료봉사의 첫발을 내디딘다. 이들은 그저 본4 병원 실습의 일상에서 벗어나 난생처음 밟아보는 베트남에서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설렜다. 우리는 학생이었지만 원장님들의 진료 보조와 예진을 담당하기 위해 발탁돼 영광스러운 여정을 함께 하게 됐다. 다행히도 협회에서 학교에 공문을 보내주셔서 우리는 실습을 공결 처리할 수 있었고, 실습 조원들에게 미안함의 의미로 밥도 한 번씩 사준 뒤 들뜬 마음으로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4월 25일 아침, 호텔 밖을 나서자마자 정신을 잃을 뻔했다. 열대 사바나 기후의 푹푹 찌는 더위에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주룩 흘러내렸다. 비라도 시원하게 내리면 좋겠는데 4월은 아직 건기였다. 후에 알고 보니 이때가 베트남에서 가장 더운 시기이며 현지에서도 기록적인 폭염이었다고 한다. 출발할 때의 호방했던 기세는 보기 좋게 제압당했다. 땡볕 더위에 진료 준비로 짐을 나르다 보니 여차저차 빈즈엉성의 반푹(Van Phuc)병원에 한의진료소가 열렸다.
나는 오전에 예진을 담당하게 됐고, 첫 환자분은 60세 정도 돼 보이는 여성 환자셨다.
언어의 장벽을 넘어
“신 짜오! ...”
말문이 막혔다. 우선 성함, 나이부터 묻고, C.C를 적어 나가야 하는데 ‘your name?’과 같은 간단한 영어도 통하지 않는 베트남이었다. 미리 준비한 회화집에서 ‘이름이 뭐예요?’를 발견하고 “Anh ten la gi? (아잉 뗀 라지?)”라고 물어도 성조가 맞질 않으니,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했다. 구글 번역으로 힘겹게 의사소통을 이어나가고 있을 때 단비처럼 통역사님들이 도착했다. 순식간에 예진 보는 속도가 세 배 이상 빨라졌다. 참 언어장벽이 크다는 것을 느낀 순간이었다. 어느 지점부터는 통역사님이 내가 해야 할 질문을 다 외우신 듯, “이분은 허리 아픈 분인데 1년 전에 L4, L5 요추추간판탈출증 진단받고 하지정맥류도 있고 진통제 복용 중이다”며 내가 묻지 않아도 환자에게 필요한 정보만 쏙쏙 뽑아주셨다. 어느샌가 나는 받아쓰기 기계가 돼 있었다. 이와 유사하게 학교 병원에서 매주 치르는 CPX 시험이 떠올랐다. 이렇게 효과적인 학습법이었다니! 실전경험이 역시 중요한 것 같다.
오후엔 원장님들의 진료를 보조하며 한의치료의 효과를 다시금 경험할 수 있었다. 특히 이번 의료봉사에서는 원장님들이 직접 한국에서 초음파기기를 가져와 최신 한의술기를 선보이셨다. 전통적인 오수혈부터 추나치료, 초음파 유도하 약침치료 등 다양한 치료를 한데 모아 참관할 수 있었다. 김기병 원장님께서 능숙한 손길로 추나를 시전하자, 환자분 얼굴엔 한결 가볍고 시원한 미소가 생겼다. 엄지를 척 들어 올리고는 통역사님께 만족스럽다고 말씀하셨다. 김세종 원장님께서는 대전대학교에서 추나의학을 강의하는 교수님이시고, 감사하게도 나의 틀어진 횡돌기를 추나로 교정해 주셨는데 정말 시원했고 눈이 탁 트였다.
대전자생한방병원 홍정수 원장님, 호치민에서 진료하시는 최성주 원장님께 약침을 쉴 새 없이 만들어드렸다. 학교 병원에서의 실습보다 그 2시간 동안 훨씬 집중적으로 훈련받은 느낌이다. 홍정수, 최성주 원장님의 친절한 미소와 신속정확한 진단, 술기를 보며 나도 언젠가 저렇게 임상적 퍼포먼스가 탁월한 한의사가 되고 싶어졌다. 박정호 원장님께서는 환자의 체형을 보시면서 어디가 문제인지 한눈에 파악하시고는 약침 치료의 포인트까지 우리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주셨다. 대한한의약해외의료봉사단 KOMSTA 이승언 단장님께서도 이번 봉사에 협력을 위해 선뜻 와주셨고, 직접 진료도 참관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열정과 치유의 공간
4월 26일 둘째 날 봉사한 곳은 빈즈엉성 전통의학병원이었다. 덥고 푹푹 찌는 듯한 날씨에도 환자분들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래도 어제 하루 봉사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척척 역할을 나누어 진료를 시작할 수 있었다. 나는 용한이 형과 함께 오전 예진 담당이었다.
예진을 보며 빈증성과 호치민 지역 환자군의 특징을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첫 번째 특징은 관절질환이 많다는 것이다. 꼭 이곳 환자군의 특징이라기보다 우리가 한의진료소를 열었기 때문에 관련 환자군이 자연스럽게 모인 것일 수도 있겠다. 요통, 경항통, 견비통 등 근골격계 환자가 많았는데, 아무래도 습한 기후환경의 영향인 것 같다. 베트남 도로 위엔 오토바이가 가득하다. 많은 환자분은 “오토바이를 타면” 손이 저리다, 어깨가 아프다 등 관련해서 증상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았다. 두 번째 특징은 뇌출혈, 뇌경색 후유장애 환자가 많았다는 점이다. 기름기 많은 음식이 이유가 될 수 있을지? 더운 날씨가 이유가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또한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나이에 비해 노화가 더 진행돼 보였다. 강한 자외선에 피부가 노출되고, 덥고 습한 기후 속에서 생활하고 노동하며 인체에 가해지는 스트레스가 더 크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베트남에서나 한국에서나 인간이 질환으로 고통받는 현장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이틀간 진료소의 문전을 지키며 500명이 넘는 베트남 환자분들을 예진하고 표정을 살피고 목소리를 하나하나 들어보았다. 들어오실 땐 근심 가득한 표정이었는데 치료받고 한약도 받아 가시는 빈증성 주민분들의 환한 미소를 보니 힘든 것이 싹 날아갔다. 봉사는 베푼다기보다 오히려 자기 내면이 행복으로 가득 차는 소중한 경험이다. 이번을 계기로 의료가 열악한 지역에 한의학이라는 도구로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뿌듯한 일인지 알게 됐다. 의료봉사에서 가장 탁월한 분야는 역시 한의학이다. 봉사를 준비하는 의료진의 부담은 적고, 수용할 수 있는 질환의 범위가 넓을뿐더러, 환자 만족도 또한 높기 때문이다. 머나먼 베트남 땅에도 한국의 한의 의료기술이 이만큼 효과적이고, 멋있다는 것을 알리는 데 동참하게 돼 기뻤다. 한편으론 직접 진료를 보지 못해 아쉽기도 했다. 지식과 술기를 갈고닦아 실력 있는 한의사로 성장해 세상 사람들에게 건강과 기쁨,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무엇보다도 대전의 어벤져스 히어로같은 원장님들, 인생의 롤모델로 삼고 싶은 존경스러운 분들을 뵙게 돼 큰 영광이었다. 어디에서도 얻지 못할 소중한 추억과 가르침을 주신 이번 의료봉사의 모든 관계자분께 깊이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