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02 (월)
한다윤
동국대학교 한의학과 본과 4학년
지난 3월26일, 서울 한 소극장에서 ‘바다 한 가운데서’라는 연극을 올렸다. 본과 4학년이 갑자기 연극이라고? 그것도 외부에서? 혹자는 ‘전공과 관련 있지도 않은데 굳이…’라는 생각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신기하다며 관심 있어 하는 시선도 있었기에, 지면을 통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예과생 시절 만난 연극동아리 ‘애오라지’
코로나19로 인해 동아리 활동을 비롯한 정상적인 대학생활이 중단됐다. 필자는 다행스럽게도 예과 시절 동안 활발한 학교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대학생이 되면 공연을 꼭 올리고 싶다고 다짐했었는데, 동국한의 연극동아리 ‘애오라지’ 선배님들을 뵈었을 때 이끌리듯 이곳에 들어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전문가라고는 없는 8명의 한의대생이지만, 우리끼리 일당백으로 똘똘 뭉쳐 시간을 쪼개가며 연습하고, 포스터와 소품도 만들고 못질과 톱질을 하며 무대를 세웠다. 한의대생 관객이 많이 오는 만큼, 공감할 만한 에피소드를 섞으며 대본을 각색하기도 했다.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 만나다 보니 서로가 이해되지 않을 때도 많았지만, 극이 시작되면 무대엔 우리밖에 남지 않고 서로의 눈빛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짙은 유대가 형성된다. 그렇게 우리만의 ‘수상한 흥신소’를 만들었다. 조명이 켜지면 관객들은 어둠 속에 있어 잘 보이지 않아야 하는데, 왜 그 눈빛들이 느껴지는지. 에너지를 받았던 걸 잊을 수가 없다. 그게 필자의 첫 연극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두 번째, 세 번째 공연이 이어져야 했지만 코로나 등으로 인해 무산됐다. 만약 캐스트로 무대에 한 번 더 오르고, 연출마저 경험했더라면 더 이상 연극에는 발 담그지 않으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고 첫 연극의 경험은 미련으로 남았다.
코로나19와 리딩클럽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더 이상의 동아리 활동을 비롯한 모든 대면 활동이 어려워졌다. 그러나 비대면 플랫폼을 이용한 프로그램들이 생겨났고, 그 중엔 리딩클럽도 있었다. 이름도 직업도 모르는 사람들이 ZOOM에서 모여 영화의 캐릭터나 스토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공유하고, 몇 개 씬에 대한 대본 리딩을 해 보는 경험이었다. 원데이클래스로 단 3∼4시간만 진행되는 것이었지만 일상의 스트레스가 치유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 역시도 일회성으로 그치고, 지속적인 교류가 이뤄지지 않는 게 항상 아쉬움을 남겼던 것 같다. 그래서 엔데믹이 되자마자 더 장기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워크숍을 찾았다.
앤데믹과 연극 워크숍
펜데믹과 앤데믹의 경계에서 본과 3학년을 보냈다. 길면 하루 12시간을 같은 강의실, 같은 자리에서 보내야 하는 생활을 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비대면 생활 때문에 2∼3년을 잃어버리고 대면 생활로 복귀했는데, 더 이상 학생 신분으로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느껴졌다. 엔데믹이 온 만큼 하고 싶은 일을 가장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붙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방학이 되자마자 연극 워크숍을 다니기 시작했다.
사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전공 공부도 해야 하는 시기라서 방학 때는 자습을, 개강 후에는 병원 실습을 병행하면서 연습을 다녀야 했다. 하지만 항상 연습을 갈 때면 마음이 설레고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엔 행복했다. 다른 더 좋은 의미가 담긴 단어를 붙이고 싶지만 꽉 차게 재밌는 것만큼 좋은 것도 없는 것 같다. 취미의 특혜이지 않을까. 뭘 해도 신기하고 재밌고, 못해도 그만이니 조금만 잘 해도 칭찬받는. 그래서 즐거웠을지도 모르겠다.
필자가 속한 팀은 배우님의 연출과, 비전문가 배우들로 구성됐다. 작가, 감독, 상담가라는 본업이 있는 우리 팀은 ‘알잘(알아서 잘하자)’이라는 팀명답게 다들 유난도, 생색도 떨지 않으면서 각자 몫을 해오는 팀이었다. 주어진 짧은 연습시간 동안 질척대지 않으면서 오롯이 집중하는 모습들로 미루어 보아 본업도 존잘인 사람들일거란 사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삶을 열심히 사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는다. 이렇게 멋진 사람들과 함께여서 행복했고 영광이었다.
극 ‘바다 한 가운데서’
세 명의 조난자가 있는 뗏목에서 이들이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일들을 소재로 한 연극 ‘바다 한 가운데서’. 필자는 ‘홀쭉이’ 역을 맡았다. 희생자로 세뇌되어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홀쭉이의 감정 변화는 처음 대본을 읽을 때부터 정말 표현하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홀쭉이 캐릭터는 나의 내면들 중 어떤 자아와 맞닿아 있었다. 매번 의미를 찾는 습관과 소심한 성격, 말을 늘어놓는 모양새가 그러했다. 그래서 조금은 부담스러운 역할임에도 이끌려 맡았다. 조명이 켜지고 관객들이 집중하면 다른 생각이 나지 않고 원래부터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된 것만 같다. 몸이 저절로 움직이고 말이 나온다.
극은 관객이 있을 때 성립된다. 감동이나 눈물을 유발하는 요소가 전혀 없는 작품인데도 다들 마지막 홀쭉이 모습에 이상하게 슬프고 눈물이 났다는 평을 해 주셨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었는데, 그만큼 캐릭터에 이입해주고 공감해주는 게 아닐까.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이 얼마나 탐욕적이고 비열하게 되는지 보여주면서도 사실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도 다르지 않았던 뗏목에서의 한 시간. 모두가 충분히 몰입했던 것 같다.
마치며
사실 한의대는 폐쇄적인 집단 중 하나여서 계속 만나는 사람들만 만나고 하던 것만 하면서 매몰되기 쉽다. 이를 경계하며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고, 다른 집단 사람들과 교류를 하고자 하는 마음은 항상 있었던 것 같다. 또 한의학도로서 좋은 의사가 되고자 하는 꿈도 있지만, 만들고 싶은 삶의 모양이 뚜렷하다.
즉 가진 걸 표현하며 삶을 사는 것이다. 표현하고자 하는 건 생각일 수도, 감정일 수도 있다. 표현 방법으로는 음악, 글 그림 등 다양하겠지만 필자는 그 중에서도 극을 택한 것 같다. 캐릭터를 통해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생각을 하고, 말을 내뱉다 보면 사람에 대한 이해가 생기는 것 같다. 한의사는 사람을 이해해야 하는 직업이라고들 말한다. 다양한 경험만큼 그것에 도움되는 일이 있을까. 혹시라도 새로운 선택에 주저하고 있는 한의대생들이 있다면, 용기 내어 도전하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