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해진 래소한의원장
<우리동네한의사> 저자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제철에 맞는 음식을 한의학적 관점으로 접근한 ‘텃밭에서 찾은 보약’을 소개합니다. 안전한 먹거리에 관심이 많은 권해진 원장은 9년째 텃밭을 가꾸고 있습니다.
비가 많이 온 여름을 지나고 잠시 가을을 즐기나 했더니 어느새 서리 걱정을 해야 합니다. 서리가 내리면 텃밭 작물 중 추위에 약한 식물은 시들어버립니다.
“올해는 여름비 때문에 영 농사 재미가 없는데, 물을 좋아하는 토란대는 너무 튼튼해졌다. 이거 봐라.” 어머니께서 당신 가슴까지 오는 토란대를 수확해서 집에 오셨습니다.
“중간에 한 번 자르고 오지, 큰 키 그대로 들고 왔노?”, “니 글 쓰는데 사진 찍으라고 그냥 들고 왔지!”
◇토란대, 겨울동안 나물 해먹기 딱 좋은 작물

토란대를 보니 오늘도 어머니께서 식품건조기를 돌리시겠구나 싶습니다. 토란대는 말려서 저장해두고 겨울 동안 나물 해먹기 딱 좋은 작물입니다. 물을 많이 머금고 있는 식물이라 말리면 1/20 정도로 무게가 줄어들고 부피도 많이 줄어듭니다. 그래서 키가 큰 토란대를 한아름 수확해 와도 다 말리고 나면 양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할머니 저는 이거 들깨 넣고 하는 걸로 요리해주세요. 그 다슬기 들어가는 거요. 육개장에 들어가면 매워서 많이 못 먹어요”하며 딸이 토란대를 만집니다.
“맨손으로 만지면 큰일 난다. 그냥 둬!” 토란대를 자른 부분이 몸에 닿으면 토란의 독성 때문인지 피부가 따끔거립니다. 그래서 꼭 장갑을 끼고 줄기를 깝니다. 줄기를 까고 오래 저장할 것은 건조기에 넣고, 오늘 먹을 것은 쌀뜨물에 넣어 끓입니다.
물에 오래 넣어두었다가 끓여도 독성이 완화되지만 저희 집은 항상 쌀뜨물에 한 시간 넘게 넣어서 독성을 빼고 끓입니다.
토란은 ‘우자(芋子)’라는 이름으로 한의학 서적에 등장합니다. 생것은 독성이 있어 익혀 먹어야 한다고 나옵니다. 토란잎도 ‘우엽(芋葉)’이라 불리며 답답한 증상을 없애는 데 쓰인다고 한의서에 나옵니다.
별도로 토란 줄기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우자, 우엽에 미루어 그 효능을 짐작 할 수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줄기는 섬유질이 풍부하니 장 건강에 도움이 됩니다.

◇다슬기, 토란대, 시래기 넣어 끓인 다슬기들깨탕
딸이 말한 다슬기들깨탕은 토란대가 나오는 이맘때 먹습니다. 토란대는 껍질을 까고 삶아서 준비해두고 배추시래기와 된장을 넣고 나물처럼 무쳐둡니다. 다슬기를 물에 넣고 끓인 뒤 다슬기는 따로 꺼내두고 다슬기 국물에다 된장에 무쳐둔 토란대와 시래기를 넣고 끓입니다.
들깨를 넣고 간장으로 간을 하고 마늘도 넣고 푹 끓입니다. 먹기 직전에 부추, 파, 썰어둔 고추를 조금 넣고 건져두었던 다슬기도 넣어 살짝 끓여서 먹으면 됩니다. 다슬기는 오래 끓이면 너무 단단해져서 식감이 좋아지지 않아 건져두었다가 마지막에 넣어서 먹는 것이 좋습니다.
10월 한 달 한의원도 바쁘고 주말마다 여행을 다녀서 텃밭에 나가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글 쓸 날은 다가와 걱정이었는데 어머니는 더 걱정이셨는지 사진 찍으라고 토란대도 가져 오시고 날이 춥다며 마늘을 심어야 된다고 하십니다. 자연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고 시간은 흘러갑니다. 잠시 한눈을 팔면 심을 시기를 놓치게 됩니다.

“시금치 심어야 되는데, 그래야 겨울하고 봄에 맛있는 걸로 먹지. 양파는 어떻게 하려고?” 저는 밭에 나가지도 못하면서 겨울 시금치는 먹고 싶어 애가 타서 어머니께 여쭈었습니다.
“올해는 양파 안 할라고, 알이 너무 작게 열리고 수확이 너무 적어! 달달한 맛을 생각하면 심어야 하지만 좀 고민이기는 하다.”
“할머니 양파가 어떻게 달아요. 저는 맵던데.” 딸이 어머니께 양파가 어떻게 달달하냐고 의아해하며 물었습니다. 저도 농사짓기 전 양파가 달다는 말이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직접 지어 먹는 양파여서일까요. 지난 번 양파가 작아서였을까요. 매운맛보다 단맛이 많이 났습니다.
◇약치지 않고 기르는 배추라 벌레, 달팽이와 경쟁

김장배추는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궁금하시죠. 약을 치지 않고 배추를 기르니 어린 배추 모종에 붙은 벌레와 달팽이를 매일매일 잡아야 합니다. 10월 새벽마다 어머니는 벌레를 잡으러 가셨습니다. 잡은 벌레를 죽이지는 않습니다. 먹고 살겠다고 배추에 붙은 달팽이를 죽이면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달팽이가 먼저 먹으려던 배추를 사람이 빼앗아 먹는 느낌도 들지요, 11월 서리가 내리면 벌레들이 줄어듭니다. 추워서 배춧속으로 숨는 벌레도 있지만 배추 겉면에는 보이지 않아 배추가 자라기에 좋은 시기가 옵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배추를 두고 벌레, 달팽이와 경쟁합니다.
속이 꽉 찬 배추로 키우고 싶지만 벌레가 먹고 간 자국 때문에 겉은 숭숭 구멍이 나고, 속에 숨어든 벌레 때문에 가끔 속빈 배추가 나오니 마음처럼 배추를 키우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다음 달 김장할 생각을 하면 얼마나 배추가 고소할까 지금부터 기대가 됩니다.
숭숭 구멍 난 배추 겉잎은 김치를 담그지는 않지만 겨울에 말리면 일년 내내 먹을 수 있는 멋진 시래기가 됩니다. 놀러 다니느라 밭에 자주 못 간 게으른 농부에게도 가을은 많은 것을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