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태우 교수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한의원의 인류학 : 몸-마음-자연을 연결하는 사유와 치유> 저자
자동차 창문을 내리고 시동을 걸어본 적이 있으신가? 운전하면서 한 번씩 경험하는 그러한 상황은, 엔진이 돌아갈 때 나는 소리가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 공간이 실내주차장이라면 소리의 크기는 확연하다. 정지해 있던 순간의 고요에서, 진동과 함께 들리는 엔진 소리는, 시동 걸기라는 잠깐의 동작이 큰 차이를 초래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이러한 진동과 소리의 격차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폭발’이다. 휘발성이 강한 휘발유를 공기와 접촉시킨 상태에서 점화플러그에 불꽃을 튀겨 폭발하게 한다. 그 폭발력으로 엔진의 피스톤이 돌아가고 자동차가 움직인다. 엔진이 계속해서 돌아가는 것은 연속적 폭발로 가능하다.
도시화된 한국사회에서 엔진은 어디서든지 돌아가지만, 자동차 폭발음은 우리에게 잘 들리지 않는다. 머플러를 비롯한 소음 저감 부품들(커버, 밀폐제 등)이 차에 장착되어 있기 때문이다.(그만큼 차는 무거워지고, 차를 움직이기 위해 또 더 많은 휘발유와 폭발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인지하든, 하지 못하든 엔진은 돌아가고 폭발은 계속된다. 머플러를 개조해서 의도적으로 내는 스포츠카의 폭발음이, 내 차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자동차가 고속도로를 질주할 때도, 꽉 막힌 도로에서 빨간 미등이 끝을 모르고 이어질 때도, 폭발은 계속된다. 폭발로 마트에 가고, 회사에 출근하고, 캠핑 떠난다. 폭발의 일상이다.
석탄을 태워 증기기관을 돌릴 때부터, 원터치 시동의 지금 자동차 운행까지, 탄소(탄화수소)를 폭발시키고 태워서, 우리는 지금의 문명을 돌리고 있다. 비행기를 띄우고, 공장을 돌리고, 전기를 발전하는 것도, 대부분 폭발하고 불타는 탄소에 의지하고 있다. 가히 탄소문명의 시대다.
탄소문명은 탄소집착문명이다. 우리들의 자동차가 움직이기까지, 이어져 있는 연결선들을 돌아보면 그 집착적 증후가 드러난다. 땅을 파고, 바다 밑 해저를 뚫어서(이 땅과 바다는 대부분 중동에 있다), 해양오염을 무릅쓰고 유조선을 띄우고, 토양오염의 위험에도 송유관을 깔아, 기어이 석유를 가져온다. 석유를 구하기 위해 쇼크(오일쇼크)도 감내하고, 전쟁(걸프전)도1) 불사한다. 그 집착은, 원유를 뒤집어쓴 물새로 상징되는, 죽어가는 생명들을 못 본 체하게 한다.
무엇이 이렇게 탄소에 집착하게 하는가? 폭발하고, 태워서 나오는 에너지다. “효율적인” 에너지가 만드는 편리, 풍요, 성장이 잘 폭발하는, 잘 타는 탄소만 보게 했다(직면한 기후위기 상황에서 효율적이라는 말은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
탄소에 대한 집착은, 탄소를 저 멀리 우주에서 바라보는 것 같은 시선이 가능하게 했다. 최근 기후위기 문제에 학문적·사회적 실천을 집중하고 있는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는2) 17세기 즈음 이 시선의 등장을 이렇게 표현한다. “[자연]을 단순히 ‘생산 요소’로, 말하자면 우리의 행동에 완전히 무관하고 무심한 자원, 마치 지구와는 관계없는 목표를 추구하는 외부인이 멀리서 획득해도 되는 것처럼 받아들였다.”3)
자원으로 전용된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 자원만을 바라보게 하는, 또한 그와 연결된 존재들을 보지 못하게 하는 집착을 낳았다. 이것은 마치 멀리 시리우스와 같은 별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시선이라고 라투르는 말한다. 그는 그 시선에 대비하여, 가이아(Gaia)의 시선에 주목하자고 말한다.
‘가이아’는 지구의 생물과 무생물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것이 전체적으로 하나의 생명체와 같다는 것을 지시한다. 그 관계를 통해 지구는 생명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왔다. 탄소문명의 탄소에 대한 집착은 지구의 자기조절을 흩트리는 지경에 이르게 하고 있다.
가이아의 논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가이아의 시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투르가 지적하고 있듯이 가이아로의 전환은 우주의 다른 별에서 지구를 바라보듯 하는 시선을 재고하는 것이다. 기후위기의 시대는 지구 안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시선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다.
가이아는 사시(四時)와 시선의 방향성을 공유한다. 탄소집착문명을 떠받치던 시선과 다른, 가이아의 시선이 기후위기 시대에 주목받고 있듯이, 사시와 같은 비서구의 시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라투르도, 비서구의 방식이 “미래의 생존법을 배우기 위한 소중한 모델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4) 가이아와 사시는 모두 연결성의 관점을 강조한다. 가이아 이론을 주창한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은 대기학의 내용, 해양학 자료, 지질학적 내용을 조사하여 생물들과 환경의 밀접한 상호관계를 보였다. 그럼으로써, 수동적 ‘자원’이 아닌, 능동적 자연을 말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사유방식을 드러내는 사시는, 일관되게 흐르는 테마에서부터 시작한다. 세계의 현상을, 하늘에서부터 만물의 존재들(인간, 비인간 공히)까지, 꿰뚫는 논리를 찾으려고 했다. 그 중심 테마를 취해서 그것의 현현인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생명 현상에 관한 핵심적 테마가 사시다. 존재들이 공유하는 생명운동의 방식을 생장수장(生長收藏)이라고 보았다. 자라나고, 펼치고, 수렴하고, 모으는 운동이 모든 존재에, 즉 인간, 비인간, 만물 모두에, 공유되어 있다는 것이다. 천지라는 생명들의 터전에도 그 생장수장의 흐름이 있어서 생명을 살리고 지지한다. 천지를 자연이라고, 혹은 환경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므로 천지는, 자연과 환경은, 하늘과 땅 사이의 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생명들과 사시의 흐름을 공유하며 연결되어 있다. “동양에서는 일찍이 생명과 무생명이라는 자연의 이분화가 그렇듯 확연하게 이루어지지 아니 했다. 우주 자체가 그대로 하나의 생명체로서 파악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이 우주는 생명으로 꽉 차 있다고 할 수 있다”는 원로 철학자의 통찰은,5) 사시의 시선으로 바라본 천지(자연)와 만물의 관계에서 자명하다. 환경과 사람은 “하나의 생명체”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결성 속에서 (앞으로의 연재 글에서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동아시아에서는 기후(氣候)를 사람 몸의 현상에 대해서도 사용하였다. 자연의 기후와 사람 몸의 기후가 유사한 현상이고, 연결되어 있는 현상인 것이다. 이와 같이 가이아와 사시는 연결성의 시선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생장수장 사시의 순조로운 흐름은, 생명이 그 기운을 생명답게 펼칠 수 있도록 지지한다. 지금 기후위기의 상황에서 그 순조로운 흐름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일상적 폭발, 태움의 문명이 지핀 자욱한 탄소(이산화탄소)가 생명들의 펼침을 가리려 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의 와중에도, 2020년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최고치를 경신했다는 최근 기사는, 상황이 더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어느 때보다도, ‘전환’이 요구되는 시기다. 전환(turning)은 시선을 돌리는(turn to) 데서부터 시작 가능하다. 일상화된 우리의 폭발과 태우기를 어느 날 모두 멈출 수는 없을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200년 이상 지속되어 온 탄소집착, 탄소의지 문명을 갑자기 가동 중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집착의 시선을 돌리는 일에서부터 시작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작지 않은 전환이 될 것이다. 가이아와 함께, 사시의 연결성의 시선을 따라가보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다.
1) 중동 석유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미국과 영국의 의지가 2003년 이라크 침공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예시를 제공한다.
2) 현재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의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는 브뤼노 라투르는 철학, 사회학, 인류학, 과학기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주목받는 논문과 저서를 발표하였다.
3) 라투르(2021)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p.109.
4) 같은 책. p.110.
5) 이완재(1997) <동양철학을 하는 방법> p.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