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우 박사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사업단
연초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우한폐렴이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코로나 감염병으로 규정되더니 한해의 절반이 지나도록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필자도 역시 대외활동이 여의치 못해 올해 연구 사업이 몇 달째 진척이 더디고 공전을 거듭하고 있어 답답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다. 예전에 비해 생각지도 않게 많은 시간을 연구실에 갇혀 지내거나 책상 앞에 머무르다 보니 평소 눈길이 가지 않던 이런 저런 책들을 찾아보면서 울적한 심사를 달래곤 한다.
우연히 들춘 『손암집(損菴集)』은 1749년(영조 25)에 처음 간행된 고본인데, 오랜 세월에 책장은 습기를 머금어 들러붙어 있고 원형이정으로 꾸며진 4책 가운데, 마지막 1책만이 겨우 생존해 초췌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책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조근(趙根, 1631, 인조 9∼1690, 숙종 16)의 문집으로 그는 효종대 삼전도에서 후금(後金)에게 당한 치욕을 설욕하고자 북벌을 주장하며 정국을 이끌었던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기도 하다.
이미 발표한 바 있듯이 우암 송시열은 장암 정호, 주촌 신만 등의 제자와 함께 비밀리에 군사를 양성할 계책을 세우는 한편, 팔도의 명의들을 모아 전쟁과 기근에 대비한 『삼방(三方)』을 편찬하게 하였다. 다행히 이 책의 요체를 뽑아 만든『삼방촬요(三方撮要)』가 발견되어 2017년 연구원에서 국역본을 발행한 바 있다.
「풍계쇄언」, 전염병과 대기근 처참한 광경 기록
이런 연유로 우암과 문하 제자들의 기록을 범상하게 넘겨보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 문집 『손암집』의 마지막 권 잡록(雜錄)에는 여러 유사(遺事)와 일화를 적어놓은「풍계쇄언楓溪瑣言」이란 필기가 들어 있었다. 내용의 대부분은 신해년(辛亥 1671, 현종12)을 앞뒤로 경향각지에서 발생한 여역(厲疫), 즉 전염병의 유행과 대기근으로 인한 처참한 광경을 경험하고 기록한 것이었다.
“신해년 봄 도성의 백성들이 크게 굶주려 한성부와 훈련원에 동서소(東西所, 동서진휼소)를 설치하고 죽을 나눠주었다(진휼청 당상 민정중이 주관하였다). 또 선혜청에 한 곳을 더 두어 상평청 당상 김만기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였다.” 여기까진 역사시대에 흔히 볼 수 있었을 풍경으로 보이고 그다지 긴급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어지는 다음 글을 읽다보면 어느덧 절박하기 그지없던 당시 정황에 전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 뒤로 굶주린 백성[饑民]들이 날로 늘어나고 역병에 서로 감염되어[熏染成癘] 죽게 된 자가 날마다 수백 명을 헤아려 수레에 시체를 실어 성 밖으로 나르느라 길목이 막힐 지경이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경술년에 시작된 역병과 기근, 인명 피해 부지기수
이에 상황이 악화되자 서쪽으로 진휼소를 홍제원(弘濟院)으로 옮기고 동쪽으로는 흥인문(지금의 동대문) 밖으로 옮겼다(아마도 지금의 한약상가 인근의 보제원 진제장일 것으로 보인다). 또 강도(江都, 강화부)에서 쌀 1만여 석을 날라 오고 호남과 관서 지방 창곡(倉穀)을 배로 옮겨 용산에 쌓아두고 도성의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었다. 이때 조근은 비국(備局, 비변사) 낭청(郎廳, 비변사·선혜청·준천사·오군영 등의 실무담당 종6품 관직)으로서 이 일을 겸직하게 되었다고 술회하였으니 직접 이 참상을 목도하고 겪은 바를 기록한 것이 분명하다.
이때 성안의 사람들을 가구별로 대중소로 구분해서 진휼미를 지급하였는데, 훈련도감과 어영청(御營廳)의 군병들로 하여금 각각 담당 관서에서 명부를 작성하여 일일이 집집마다 보내주고 한군데도 빠짐이 없도록 하였다. 이에 도성 안 오부(五部)의 방민(坊民)을 조사해 보니 294호 3만251명이었으며, 재상과 궁가(宮家, 왕실과 종친), 부유한 자들은 대상에 넣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 해의 기근은 조선팔도가 모두 같았으나 경기지방과 경상, 전라 양남지방이 더욱 심했다고 한다. 도성에선 3개소에서 만여 사람에게 지급했고 호남에선 22만1800여 명, 영남에선 19만9천여 명을 구했지만 그 와중에 죽은 자도 부지기수이고 살아남은 자도 역시 겨우 목숨만 이어갈 정도였다. 심한 경우, 지방에선 이것마저도 원활치 않았던 듯 염병에 걸려 죽은 자식을 삶아먹거나 실성하여 자식을 죽이는 경우가 있었다고 하니 얼마나 끔찍한 상황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왕조실록』을 비롯한 역사기록을 참고해 보면, 이때의 기근과 역병의 참혹함은 전 해인 경술년(1670)에 이미 시작하여 각도마다 전염된 자가 1000여 명에 달했으며, 죽은 자도 수백 명을 헤아렸다. 또 해를 넘기자 우역(牛疫)이 병발하였고 폭설과 사발만한 우박이 쏟아져 동사자가 수백 명이요, 소와 말을 비롯해 개, 돼지에 이르기까지 모두 감염되어 쓰러졌다고 기록하였다. 결국 도마다 병에 걸려 죽은 자가 만여 명씩이요, 굶주려 죽을 받아먹은 자가 각도에 20만여 명을 헤아렸다고 하니 지금 현시대에 봉착한 코로나 감염사태는 비관할 정도로 최악의 상황은 아닌 셈이다.
역병의 유행과 기근, 그 어떤 재해보다 훨씬 참혹
그해 겨울, 한해를 거의 다 보낸 섣달 20일에 영의정 허적(許積)이 병을 이유로 파직을 간청했으며, 임금은 “짐이 (사방을 둘러보니) 마을마다 집집마다 황량하기 그지없어 의약이 미비된 것이 심히 염려되니 안심할 수 있게 들여오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이듬해 여름철까지 3년간에 걸쳐 끈질기게 조선 사람들을 괴롭혔던 역질이 주춤해 질 때까지 염병에 걸려 고생하고 죽은 자가 부지기수일 것이며, 굶주리고 유리걸식하게 된 양민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과거 역사를 돌이켜 보건대, 역병의 유행과 기근, 그것은 오히려 전쟁이나 그 어떤 재해보다 훨씬 더 참혹한 것이었다. 또 돌림병의 유행에 의약을 구비하여 생명을 구제하고 생업을 잃고서 침식을 걱정해야 하는 백성들의 민생을 염려하여 부세를 감면해주고 재난을 넘겨줄 구호책을 마련하는 것은 위정자와 목민관들에게 맡겨진 당연한 책무이자 도리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