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 조선에 대한 제국주의의 식민화는 물질적 이득과 권력을 탐하는 覇道主義에서 나온 것이며 이로 인하여 민중들은 평화롭고 건강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같은 기고문의 말미에 漢醫學의 發展策을 제시하면서 儒醫制度의 부활을 주창한 것은 과거 전통으로 회귀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王道主義에 기반하여 민중들을 고단하고 아픈 삶으로부터 구제하는 의사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王道란 ‘王天下之道’의 준말로 모든 만민들을 고르게 아끼고 보살피는 방도를 말하는 것으로, 趙憲泳의 民衆醫術化와 맥락이 닿아 있다. 반대로 覇道主義란 위정자가 권력과 부를 독차지하기 위하여 민중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을 말한다.
비록 金永勳의 晴崗醫鑑에서 趙憲泳이 한의학에 투신한 이유 중 하나로 신간회 해산 후 일제의 탄압과 감시에서 벗어나기 위한 호신책을 들었으나, 단순히 자신의 어려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목표와 신념이 漢醫學의 특성과 일치함을 깨닫고 한의학을 통하여 民衆救濟를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400년 가까이 내려온 경북 영양의 대표적 전통 가문에서 어려서 수학한 儒學的 사회관과 도덕론이 그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1937년에 발표한 『物質文明은 어데로』에서도 인류의 역사를 물질문명 시대와 정신문명 시대로 양분하고 당시의 식민지 상황이 바로 현대 물질문명의 소산이라고 보았으며, 정치적으로는 다수합의에서 소수독재로, 文治에서 武治로 악화된 결과로 보았다.
왕도주의 구현 방법론은 보편적 과학주의 사용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다시 정신문명 시대로 전환되어야 함을 역설하면서도, 물질문명과 정신문명 간의 상호 전화 속에서 양자의 특색을 정확히 알아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정당하게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전반적으로 물질문명의 폐단으로 인하여 야기된 식민지 체제가 민중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고 본 것이다.
또한 趙憲泳은 왕도주의 구현의 방법론에 있어서 보편적 과학주의를 사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가 생각하였던 한의학의 과학화는 맹목적으로 과학을 신봉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으며, 신비주의적 요소나 한의학의 진정한 가치를 부정하는 편견들을 모두 불식시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한의계에서 한창 활동할 당시인 1935년에 趙憲泳은 조선어학회 표준어 사정위원도 담당하였으며, 이때 발표한 「小異를 버리고 한글 統一案을 支持하자」의 글에서는 한글 통일안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보수적 관념을 가진 자, 규칙을 싫어하는 자, 어렵다는 것, 자기 의견과 주장에 틀린다는 것, 자기의 주장을 무조건 고집하는 것, 남의 하는 일을 시기하는 자, 妄自尊大하는 無議漢, 자기의 존재를 표현하기 위하여 등의 여러 부류로 나누어 논박하고 있는데, 보편적이고 과학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趙憲泳이 추구한 民衆醫術化를 정치사회적 관점에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된 조선의 왕정체제에서 근대 시민 중심 사회로 순조롭게 전환되지 못한 채 강제적으로 일제의 식민지 체제로 넘어오게 된 상황에서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모든 사회 문화 경제적 발전의 중심에 민중이 자리 잡고 있다는 인식이 퍼지게 되었다.
유학 시절부터 학생운동과 신간회 활동 적극 참여
趙憲泳이 유학 시절부터 학생운동과 신간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이후 한의학계에 들어와 한의학 부흥에 힘쓴 것도 이러한 民衆 중심 사상의 확산에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직후 趙憲泳이 다시 정치 활동을 재개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상에 있으며, 민족주의에 기반 한 우익 성향의 韓國民主黨에 입당하였다가 곧바로 반민족, 반민주적인 정치 행태에 염증을 느끼고 탈당하여 반민족행위특별 조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이승만의 정치에 반대한 것도 패권에 대항하여 민중을 위하고자 하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王道主義에 반하는 霸道主義가 일반 민중을 저버리고 특정 개인과 집단의 이익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임을 생각해 볼 때, 앞으로 한의학과 한의사들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는 명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