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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4일 (일)

김태우 교수

김태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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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한의학’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선생도 학생으로부터 배우고 부모도 자식으로부터 배우듯, 일방적인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는 없다. 하물며 각각의 문화가 역사 속에서 담금질 해온 지식의 체계 사이에, 상호 주고받을 배움의 내용이 없을 수 없다. 하지만, 서구적인 것과 비서구적인 것의 상하관계를 강요하는 근대 이후의 역사적 경험 속에서, 과학과 한의학 사이에는, “한의학은 과학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한 방향의 질문만 강조되어 왔다.



융합이 화두인 시대를 맞이하여, 이제 “과학은 한의학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볼 때가 되었다. 본 발표는 한의학이 과학으로부터 배울게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본 발표가 의문시하는 것은, 왜 과학과 한의학은 쌍방향의 배움의 관계를 설정하지 못하였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문 위에서 과학이 한의학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하여 논해보고자 한다.



한의학은 질병의 물질적 토대에 집착이 없다



인류학은 문화들간에 서로 배울 수 있는 관계라는 것을 전제로 한 학문이다. 바로 인류학이 견지하고 있는 비교문화의 관점이다. 예를 들면, 다양한 문화에 대한 인류학적 현지연구의 결과물들은, 지금 우리의 문화를 조망할 수 있는 비교문화의 관점을 제공한다. 내부에 매몰되어 있어서 고찰의 거리가 주어지지 않는 우리 문화를 비춰보기 위해 인류학적 보고서[ethnography]들을 거울로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거울에 의해 너무나 당연시되어 있는 관념과 행위들에 대한 낯설게 보기가 가능해 진다. 예를 들면, 화폐 경제의 출현이 물물교환의 불편함에서 비롯되었다는, 당연시되는 관념은 근대 경제학의 상상력 속에서만 존재했을 뿐 인류학적 근거가 없다는 것을,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는 밝히고 있다(『부채 그 첫 5,000년: 인류학자가 다시 쓴 경제의 역사』).



본 발표는 당대 인류학의 비평방식의 하나인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를 통해서 과학, 특히, 생의과학(biomedical science)을 비춰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필자가 2007년부터 진행해 오고 있는 한의학에 대한 인류학적 현지조사를 바탕으로, 당연시되어 있는 생의과학이라는 지식체계의 몸과 질병에 대한 관점을 비춰보고자 한다. 비교연구의 관점을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 필자는 서양의학 현장에서도, 또한 인류학적 현지조사를 진행하였다. 한의학이라는 거울을 통한 비춰보기를 통해서 목도하게 되는 것은 생의과학에 내재해 있는 ‘과학주의(scientism)’이다.



생의과학을 비춰보기 위해서 한의학과 생의과학의 진단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최근 서양의학 진단은 장기의 병변을 시각화하는 CT, MRI, PET 등의 영상의학 검사와, 인체내 생화학 물질을 수치화하여 보여주는 생화학 검사가 주를 이룬다.



반면 한의학은 망문문절(望聞問切)의 사진(四診)을 통해 형, 색, 음성, 맥 등을 진단의 대상으로 한다. 서양의학은 물질적인 토대를 가진 인체의 부분을 주로 들여다보는 반면, 한의학은 환자의 몸이 드러내는 질병현상을 주시하는 경향이 있다. 서양의학과는 대조적으로 한의학은 질병의 물질적 토대에 대한 집착이 없다. 지금 생의과학의 근간이 되는 근대서양의학은 확실성에 대한 요구가 어느 시대보다도 팽배해 있던 19세기, 과학주의 시대에 탄생하였다. 그 시대는 확실성을 담보할 수 있는 보다 고정된 원인에 대한 집착이 어느 시대보다 강력한 시대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발전한 근대서양의학은 근간이 확실한, 그리고 통제 가능한, 병인(病因)에 집착하는 의학이다. 그래서 통제 가능한 신체의 물질적 일부에 대한 대상화를 고집한다. 근대서양의학은 과학기술과 결합하면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통제 가능한 물질적 토대의 대상화에 대한 집착은 변한 바가 없다. CT, MRI 등을 통해 절개 없이 인체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DNA같은 미세생체물질까지를 연구의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여전히 통제 가능한 물질적 대상에 집착한다. 이러한 경향은 완벽한 인과에 대한 집착에 근간을 두고 있다. 분명한 물질적 토대에 인(因)을 두고 질병현상[果]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생의과학은 불분명한 인과 지닌 질병에 취약



이러한 생의과학의 관점은 불분명한 인과를 가진 질병현상에는 취약함을 드러내는 결과를 초래한다. 통증 치료에 서양의학이 취약성을 드러내는 것이 이 때문이다. 통증의 원인이 불분명하고, 물질적 토대가 없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확실한 물질적 근거를 확보하려는 관점은 만성병에 대한 대처에서도 드러난다. 지금의 생의과학은, 예를 들면, 당뇨병을 위해 혈중 글루코스를, 고지혈증을 위해 혈중 콜레스테롤을, 그리고 알츠하이머의 경우 베타-아밀로이드를 그 물질적 근간으로 해서 병인을 설명하고 그에 따른 처치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원인 물질들은 한의학의 관점에서는 이미 음양의 균형이 깨진 상태에서 우리 몸이 만들어 내는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당뇨, 고지혈증 같은 만성병은 하루아침에 발병하지 않는다. 균형이 깨진 상태가 지속되면서 그 결과로서, 과도한 글루코스, 콜레스테롤이 혈중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생의과학의 물질적 토대에 대한 집착은 그래서 만성병들의 근본 원인에 대한 직시(直視)를 막고 있다.



물론 과도한 혈중 글루코스에 대한 관리를 통해 당뇨 합병증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근본적 치유는 불가능하다. 통제 가능한 물질적 토대에 대한 생의과학의 집착이, 통제가 용이하지 않은 질병 현상(예를 들면, 만성병의 근본 원인)에 대해서는 애써 무시하려는 경향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어설픈 융합은 절충이고 단순 연결일 뿐



생의과학이 한 단계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물질적토대를 확보하여 완벽한 인과 구도를 설정하려는 집착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완벽한 인과를 방해하는 여러 변수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다른 과학 분야에서는, 특히 카오스 이론이나 시스템 바이올로지에서는, 이러한 변수들을 포함하려는 경향이 분명하게 대두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과학의 경향과 비교할 때, 생의과학에는 완벽한 인과에 집착하는 ‘과학주의’의 관성이 여전하다는 인상이다. 이러한 집착으로부터 ‘이탈’할 때 생의과학의 탈-과학주의(포스트사이언티즘 post-scientism)가 열릴 것이고, 그것은 생의과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의미할 것이다.



융합의 시대에 왜 한의학과 서양의학의 차이를 강조하는가하는 의문을 가지시는 청중들이 계실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융합을 위해서는 차이에 대한 직시(直視)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차이에 대한 충분한 고찰 없이 진행된 어설픈 융합은, 융합이 아니라 절충이고 단순 연결일 뿐이다. 서양의학과의 어설픈 연결 속에서 그 의학 전통의 장점을 잃고 서양의학의 논리 속에 종속된 세계의 많은 전통의학들이 그 예들이다. 둘이 만나서 더 고무적인 새로운 길을 추구하는 것이 융합이라고 알고 있다. 융합을 위해서는 쌍방의 차이를 충분히 인지하고 그 차이로부터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러한 자세를 통해서 생의과학도, 한의학도 한 걸음 더 나아간 지식과 실천의 체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본 글은 ‘인류학적 한의학 읽기와 포스트사이언티즘’이라는 제목으로 김태우 교수가 카이스트에서 특강한 내용을 요약정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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