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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23일 (화)

김남일의 儒醫列傳 46

김남일의 儒醫列傳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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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痘法으로 濟民에 기여한 儒醫



기록에 따르면 1800년에 朴齊家가 경기도 포천에서 향리와 함께 향리의 아들, 관노의 아들, 그리고 朴齊家의 조카에게 丁若鏞의 種痘法要旨에 따라서 人痘法을 실시해 보았다고 한다. 이것이 기록에 남아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人痘法 실시이다. 李鍾仁은 바로 이 시기에 활동했던 人痘法을 전문으로 하는 儒醫였다.

人痘法은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가 痘衣法으로, 곧 痘疹을 앓았던 아이의 內衣를 아직 痘疹에 걸리지 않은 아이에게 입혀서 痘가 나오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鼻苗法인데, 이 法은 또 三種으로 나뉜다. 즉 痘漿을 쓰거나 乾痘痂屑(旱苗라고도 함)을 콧속에 불어넣는 것과 濕痘痂(水苗라고도 함)를 솜에 싸서 콧속에 넣어 出痘시키는 것이다.



이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실시된 種痘法은 주로 痘痂를 細末하여 물과 함께 丸을 만들어 콧속에 접종시키는 즉 종두법 가운데 水苗法에 제한되어 있다.



李鍾仁은 人痘法을 朴齊家로부터 배워 동생인 李鍾元과 함께 이를 많은 사람들에게 시술하여 痘瘡을 예방하는 데에 힘썼다. 그는 이러한 임상에서의 노력뿐 아니라 학술적으로도 이를 정리하는 데에도 노력을 경주하였다.



1817년(순조 17년) 그가 간행한 ‘時種通編’이 바로 그것이다. 李圭景의 ‘五洲衍文長箋散稿’의 “種痘辨證說”에서 이종인의 종두법이 영남에까지 전해져 근세에 종두를 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하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면, 이종인이 종두법의 보급을 위해 한 노력이 얼마나 크게 결실을 맺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時種通篇’의 自序에 따르면 그가 정조 22년(1798년)에 박제가로부터 종두법을 전수받은 이후에 ‘醫宗金鑑’, ‘蘭臺軌范’, ‘種痘新書’ 등의 諸書籍들을 참고하여 種痘의 法을 습득한 이후에 경향 각지에 종두를 시술한 이후에 많은 효과를 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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