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훈
한약진흥재단 이사장
단국대학교 교수
“우리만의 것이라는 생각과 틀에 얽매이거나 연연하지 말고 세상의 가능한 모든 것을 동원하여 한의학을 살찌울 때 우리는 한의학의 르네상스를 볼 것이다”
얼마 전 아산서평모임에서 아산정책연구원 함재봉 원장은 그가 진행하고 있는 『한국 사람 만들기 II』 시리즈에 대해 언급하면서 “한국만의 고유한 것, 한국만의 근본적인 것은 없다”라고 했다.
그의 주장은 한국 사람의 정체성이 구체적으로 중국, 일본, 미국, 소련 등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졌으며, 특히 중국과의 관계가 한국 사람의 정체성을 만드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주었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그 ‘正體性’이라는 단어는 중국식 한자어가 아닌 한국식 한자어이다. 중국어 사전에는 없다. 그러자면 ‘정체성’이라는 표현을 이용하는 것 자체가 한국인의 정서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정체성’ 등 적지 않은 한국식 한자어만 모아서 잘 분석해도 한국인의 ‘정체성’이 보일 듯하다.
‘正體性’이 영어로는 ‘identity’이고 이에 해당하는 중국어는 ‘身份, 認同, 特性’이다. 중국어의 경우, 셋 중 어느 한 개념에 집중되기보다는 신분 인동 특성 세 가지를 모두 아울러야 ‘정체성’의 의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Eric Erikson)이 “정체성(identity)이란 용어는 자신 내부에서 일관된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과 다른 사람과 어떤 본질적인 특성을 지속해서 공유하는 것 모두를 의미한다”고 한 것처럼, ‘정체성’이 내부적으로는 同一性을, 대외적으로는 差別性을 드러낸다.
“한국은 문을 닫았을 때는 쇠퇴하고 몰락했다”
고대 중국의학에서 유래된 한국의 韓醫學과 중국의 中醫學과 일본의 漢方醫學은 오늘날 조금은 서로 다른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그중에서 中醫學은 비록 400년 전에 『東醫寶鑑』과 같은 위업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그와 똑같은 내용을 근간으로 淸代에 溫病, 舌診, 瘀血, 中西醫匯通, 辨證체계 등을 개발하고 꾸준히 발전시켜 왔다. 그리고 해방 후 정부의 강력하고도 전방위적인 지원에 힘입어 세계 전통의학을 주도하는 최강자로 등극했다.
근년 大國崛起에 나선 중국에서는 東北工程(The North-east Asia Project)을 통해 四象醫學까지 포함한 한의학 전반을 당당하게 중의학의 한 부류로 만들어가고 있다. 작년 플로리다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이 트럼프에게 ‘한국은 사실상 중국의 일부였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한국에 대한 중국인의 시각이다.
『한국 사람 만들기』 시리즈에 대해 함 원장은 “한국의 극심한 이념·정서 갈등의 이유를 찾기 위해 이 연구를 시작했다”라고 했다. 그의 연구로 밝혀지고 있는 갈등의 이유(한국인의 정체성)와 함께 주목해야 할 내용은 한국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인데, 바로 국제화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한국이 가진 문제의 해결책은 “한국에 있지 않다.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 있다”라고 하면서 이어 함 원장은 “한국은 글로벌 스탠다드를 받아들이고 외부를 향해 열려 있을 때는 번영했지만 문을 닫았을 때는 쇠퇴하고 몰락했다”라고 말했다.
『東醫寶鑑』 이후 400년, 성과를 내놓아야 할 때
요즈음 학문의 국적을 따지는 것이 얼마나 유의미한지 알 수 없다. 교통이 발달하고 인터넷으로 온 세계가 하나가 되어가는 마당에 그러한 주장이 얼마나 유익할까? 양의학 분야에서는 미국의학, 한국의학, 일본의학 등으로 구별하지 않는다. 하나로 통일되어 세계 어디에서나 같은 틀 안에서 경쟁하고 또 그 성과를 공유한다.
이제 우리는 중국, 일본, 대만, 월남 등 세계 각국에서 발전하고 있는 한의약, 즉 한약과 침에 관련된 지식, 정보, 실제 임상기술 등을 모두 망라하고 현대 첨단 과학기술을 동원해서 요리해야 한다. 그래서 400년 전 허준과 사암도인이 『東醫寶鑑』과 『鍼灸要訣』을, 그리고 100여 년 전에 이제마가 四象醫學을 만들어내듯이 기존의 한의학 지식과 기술을 다시 집대성하고 재창조하는 기회를 얻어야 한다.
수년 전 필자가 한국한의학연구원장 시절, ‘溫故創新’의 깃발을 세운 적이 있었다. 기존 한의학의 모든 것에 현대 과학기술을 동원하여 새로운 의학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 한의학의 정체성이 된다. 마치 허준 이래 조선 의학이 오랫동안 『東醫寶鑑』을 우리 전통의학의 정체성으로 자랑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東醫寶鑑』만 붙들고 있다면 지하의 허준 선생이 통곡하실 것이다. 2000년 한의약을 허준 선생이 집대성했다면, 우리는 그 이후 400년의 성과를 새로이 내놓아야 한다.
중의학, 양의학과 통섭하고 한의 역량 결합해 성과 도출
현재 침과 한약에 대한 방대한 경험과 정연한 학술역량과 체계는 중의학이 전반적으로 우리보다 우월하고,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보편적 성과를 만들어내는 방법론에서는 양의학을 따라갈 수 없다. 이제 우리는 그 둘을 잘 포섭하여 결합하고 거기에 한의계가 임상 현장에서 만들어내고 있는 성과를 얹어야 한다.
그러면 새로운 『東醫寶鑑』이 만들어지고 또 더 나아간 四象醫學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만의 것이라는 생각과 틀에 얽매이거나 연연하지 말고 세상의 가능한 모든 것을 동원하여 한의학을 살찌울 때 우리는 한의학의 르네상스를 볼 것이다.
한의약육성법 제1장 제2조(정의)에 “‘한의약’이란 우리의 선조들로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한의학을 기초로 한 한방의료행위와 이를 기초로 하여 과학적으로 응용·개발한 한방의료행위(이하 ‘한방의료’라 한다) 및 한약사(한약사)를 말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여기에도 우리 韓醫學의 正體性이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