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상윤 대전대 한의과대학 교수
(한의학교육학회 회장)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대전대 한의과대학 한상윤 교수(한의학교육학회 회장)로부터 한의학 교육의 질적 향상과 함께 우수한 인재 양성을 위해 ‘한의학 교육의 현재와 미래Ⅱ’ 코너를 통해 한의학 교육의 발전 방향을 소개하고자 한다.
“시험은 잘 보는데, 침을 놓으라면 손이 떨리고, 환자를 만나면 말문이 막힌다.”
강의실과 임상 실습 현장에서 종종 이런 학생을 만나게 된다. 현재 한의대에는 생각보다 이런 학생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지식은 탁월하지만 술기나 태도 역량이 부족한 경우다. 이처럼 한 분야에 치우친 성장은 결국 의료 역량의 불안정성으로 이어진다.
지금까지 한의과대학의 평가는 대체로 필기시험 중심이었다. 얼마나 외웠는가, 얼마나 정확하게 정답을 골랐는가가 교육의 성과를 가늠하는 기준이었고, 학생도 교수도 이 익숙한 구조에서 크게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복잡하고 다변하는 현대 의료 환경에서는 더 이상 ‘점수’만으로 의료인의 역량이 완성되었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훌륭한 한의사는 머릿속의 정보량만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정확한 진단을 위한 지식, 올바른 술기, 공감과 윤리를 갖춘 태도—이 세 가지가 유기적으로 작동할 때 진정한 의료인의 실력과 역량이라 할 수 있다.
지식, 술기, 태도 등 세 축으로 학습목표 구축
따라서 이제는 학습 목표를 지식–술기–태도 세 축으로 구분하고, 각 축에 맞는 평가 지표와 방법을 입체적으로 설계할 때다.
먼저 지식 영역은 단순 암기에서 개념 이해와 적용, 비판적 사고력으로 평가의 초점을 옮겨야 한다. 여러 전공에서는 기존의 객관식 시험에 더해 서술형, 논술형 문항이나 복합형 문제 등도 도입되고 있다.
오픈북 시험, 자료 기반 시험, AI를 활용한 적응형 테스트(Adaptive Test)도 새로운 시도로 주목받는다. 이런 변화는 단지 시험 형식의 다양화가 아니라, 지식을 연결하고 해석할 줄 아는 능력을 기르는 교육 설계의 일부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술기 영역은 단순한 임상적 기술이 아닌, 의료인이 아는 것을 직접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측정하며 동시에 환자 안전과 직결되는 매우 중요한 평가 영역이라 할 수 있다. 한의과대학 교육에서 침, 뜸, 맥진 등의 술기 역시 이런 맥락에서 교육되고 평가되어야 한다.
객관 구조화 임상술기시험(OSCE)은 술기 역량을 측정하는 데 적합한 평가방식으로, 이미 거의 모든 의과대학과 한의과대학에서 시행되고 있다. 최근에는 VR이나 진단 시뮬레이터를 활용한 디지털 실습도 점차 확대되고 있는 추세이다.
임상실습 중 교수나 전임의가 직접 관찰하고 즉시 피드백을 주는 DOPS(Direct Observation of Procedural Skills) 방식도 효과적인 도구이다. 이러한 평가는 정확성, 안전성, 환자 대응 능력 등을 세밀히 측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점차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간과하기 쉬운 태도 영역의 평가는 의료인으로서의 자질을 규정하는 데 있어 핵심적이다. 한의학은 특히 전인적 접근과 공감적 진료를 중시하므로, 단순히 지식이 많은 것보다 어떻게 환자와 관계를 맺는가가 중요하다. 단순히 ‘착한 학생’ ‘예의 바른 태도’ 정도로 정의되던 과거의 방식에서 벗어나, 실제 임상 현장에서 환자와 어떻게 소통하고 공감하는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측정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간편임상평가실습이라고 하는 Mini-CEX(Clinical Evaluation Exercise)를 통해 교수자는 학생의 환자 대응, 의사소통, 윤리적 판단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또한 학생의 반성적 성찰을 담은 리플렉션 저널이나, 팀 프로젝트에서의 협업 과정, 또래 평가 등도 태도 평가의 중요한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e-Portfolio, 역량 기반 교육의 핵심 플랫폼 활용
의과대학에서는 학생의 반경 내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평가하는 ‘360도 다면평가(360-degree Evaluation)’를 시행하기도 한다. 교수, 간호사, 동료 학생, 환자 등 다양한 관찰자의 시선을 반영하여 학생의 태도를 입체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한의과대학에서도 이러한 다면평가 방식의 도입을 검토할 필요가 있으며, 교육과정 내에서 태도 평가의 비중을 더욱 확대해야 한다.
이 세 영역의 평가를 통합하고, 학생의 개별 학습 궤적을 기록·관리하는 데 효과적인 도구가 바로 포트폴리오다. 포트폴리오는 학생이 학기마다 자신의 목표를 설정하고, 학습 결과물(시험 성적, 실습 기록, 자기성찰 에세이 등)을 누적·정리하며, 지도 교수와 면담을 통해 피드백을 받고 성장 경로를 재설계하는 과정을 담는다.
이는 단지 평가의 도구가 아니라, 학생이 자신의 배움의 경로를 시각적으로 확인하고,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성적표인 셈이다.
이미 많은 의과대학에서 전자 포트폴리오 시스템(e-Portfolio)을 도입해 역량 기반 교육의 핵심 플랫폼으로 활용 중이며, 졸업 후 전공의 지원이나 커리어 개발의 기초자료로까지 연계되고 있다. 한의과대학에서도 이 같은 시스템을 구축하고, 학생 개개인의 성장 경로가 한눈에 보이도록 정량·정성 자료를 통합해야 한다.
“한의학교육은 이제 전환점에 서 있어”
물론 이런 변화를 현실에 적용하려면 많은 과제가 남아 있다. 평가를 설계하고 시행할 교수자의 시간과 역량, 표준화된 루브릭의 부족, 학생들의 저항감, 학교 차원의 행정적 지원 부족 등이 현실적인 장벽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단일 교과 수준이 아니라, 학과 전체, 더 나아가 대학본부 차원의 협력 시스템이 필요하다. 평가 기준을 공유하고, 평가와 피드백이 단절되지 않도록 교육의 흐름을 설계해야 한다.
한의학교육은 이제 전환점에 서 있다. 단순히 성적을 매기는 것이 아니라,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전문성과 성장 경로를 읽어내는 평가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숫자만 남는 시험이 아니라, 내면의 변화와 실천을 기록하는 평가·지식·술기·태도를 입체적으로 비추는 교육, 그것이 바로 앞으로의 한의학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