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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27일 (토)

[시선나누기-25] 우리는 무언가를 한다

[시선나누기-25] 우리는 무언가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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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저온 보리한의원장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공연 현장에서 느낀 바를 에세이 형태로 쓴 ‘시선나누기’ 연재를 싣습니다. 문저온 보리한의원장은 자신의 시집 ‘치병소요록’ (治病逍遙錄)을 연극으로 표현한 ‘생존신고요’, ‘모든 사람은 아프다’ 등의 공연에서 한의사가 자침하는 역할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빨간 풍선이 매달려 있다. 풍선인데 바람에 둥실 떠갈 것 같지가 않다. 묶여 있기 때문이지만 하늘로 향하고 있지도 않다. 구부러진 철근이 마구 비어져 나온 잔해더미에 매달려서 축 처져 내린 저 빨간 것들을 풍선이라고 불러야 하나. 풍선은 제 무게만으로도 벅찬 것 같이 보인다. 이 붉고 무거운 것을 누가 매달았나. 언뜻 바라본 핏빛의 풍선은 잔해에 핀 꽃 같다. 붉은 심장 같다. 


‘드디어’라는 말 한 마디에....


처음 선생이 작품 구성안을 보내왔을 때, 나는 선생이 시집 한 권을 씹어 삼켜 소화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공연을 제안했던 극단 대표도 선생의 공연 레퍼토리 사이에 짧게 들어갈 정도로 예상했다고 한다. 이렇게 통째로 시집을 녹여 마임으로 만들다니...... 한참 뒤의 일이지만, 나는 내 시가 선생의 마임에 피와 살을 주고 이야기를 입혔다고 생각했다. 동양의 기운을 담았던 선생의 마임은 붓으로 그린 먹선을 닮은 데가 있었다. 먹선의 꼿꼿함과 먹선의 고졸함과 먹선의 유려함이 있었다. 휘몰아치는 기개 같은 것도 있었다. 그 정신과 여백에 나는 매료되었다.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작품 구성안을 보내드립니다. 읽어보시고 전화 한번 주십시오.”


코로나로 인해 모든 공연이 줄줄이 취소되고 식당이나 공연장 같은 ‘집합장소’들이 강제로 문을 닫던 시절이었다. 시나브로 그 엄혹함이 조금씩 누그러지고 있었다. ‘드디어’라는 한 마디에 그간의 좌절과 애탐과 기다림이 다 들어있었다.


“나는 내일 밤늦게 진주에 도착하고, 모레 극장에서 셋업하고, 문 시인님과는 모레 저녁 7시 리허설 예정입니다.”

세세한 안내 뒤에 붙은 작품 구성안을 읽었다. 전체 4막이며 각각의 제목은 시의 한 구절을 가져다 붙였다. 선생의 대사는 큰 따옴표에 넣고 음향과 조명은 괄호에 넣었다. 그의 행위와 감정과 무대 상황이 글자로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문장은 시구절과 같기도 다르기도 하다. 그는 그의 말로 시를 다시 읊었다. 읊은 시는 그대로 그의 몸짓과 표정이 되어 무대에 나타난다.


“너는 날개를 버렸다” 


1. 가슴을 쪼개 보이며 그가 말했다.

*나는 그림자로 보인다.

*공간을 가르며 나는 나온다.

*수줍게 웃으며 손톱과 발톱을 감춘다. 피가 맺힌 손가락 열 개를 보여준다. 공격한다. 그 사냥의 흔적을 이빨로 물어뜯는다. 무엇을 물어뜯어 죽이려는 걸까?

*환장하게 마음이 아프다. 구름 같기도, 불화살 같기도, 채찍 같기도. 두 팔로 가슴을 껴안고 피 맺힌 손톱으로 늑간을 더듬는다. 손톱들을 뜯어낸다. 발톱들을 뜯어낸다. 겹겹이 손으로 감싸 안는다. 너에게 보내지만 이미 죽은 것들이다.

*(구타 소리) 사람은 핏물 주머니다. 때리면 터지고 고이면 푸르게 된다. “도라지꽃 고운 푸른 보랏빛은 멍이다.” (푸른 보랏빛 조명) (구타 소리) 때리면 아프다. 죽는다. 맞아본 적 있나? (구타 소리) “그 멍 빼는 데 30년 걸렸다.”

*다물어지지 않는 턱이다. 턱 벌어지고, 턱 막히고, 숨만 하~하~ 간신히 넘어간다.

*날갯죽지가 가렵다. 손을 뻗지만 닿지 않는다. 견갑골로 날갯짓을 한다. 손과 팔을 펼쳐서 새 날개 그림자. (벌어진 턱 숨소리) “너는 날았다.” 날개를 떨군다. “너는 날개를 버렸다.” (턱 숨소리)

*암전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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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극한에서 절망의 복판에서....


4. 얼마나 아프신가요?

*나는 그림자로 보인다.

*“얼마나 아프신가요?”

*공간을 가르며 나는 나온다.

*촛불을 사이에 두고 한의사 문저온 시인과 마주 앉아 있다.

*서로 바라본다.

*(문저온 시인 ‘문진’ 낭송) 어디가 불편하신가요? 얼마나 되셨나요? 전에도 이런 적이 있으셨나요? 증상을 터놓은 이가 있으신가요?...... 제가 당신께 어떤 사람이길 바라시나요?

*안개가 공중을 가득 메운 밤이다. 우리는 희미한 손을 맞잡고, 심장을 손바닥으로 서로에게 옮겨간다. 맥은 뛰고 있구나. 매끄럽고 부드럽고, 들뜨고 촘촘하게. 서로는 쥐었던 손을 놓아주고, 물고기 두 마리 지느러미로 헤어진다. 각자의 심장을 제자리로 가져간다.

*한의사 문저온 시인은 내 몸에 뜸을 뜬다.

*침을 놓는다.

*아픈 내 몸은 제자리로 돌아간다.


‘2023년 2월 19일(현지 시각) 튀르키예 하타이주 한 유치원 지진 피해 현장 잔해에 지진으로 숨진 어린이들을 추모하는 풍선이 묶여 있다. -아나돌루통신 트위터 갈무리’


사진 아래 적힌 글을 읽고서야 나는 이 빨간 풍선들이 땅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무겁게 매달린 이유를 알 것 같다. 꽃처럼 잔해더미에 피어난 이유를, 심장처럼 피 맺힌 점으로 보인 이유를 알 것 같다. 무겁고도 아름답게 철근 끝에 빨간 풍선을 매단 사람들을 알 것 같다. 슬픔의 극한에서 절망의 복판에서 사람은 무언가를 한다. 때로 그것은 숨 쉬는 것만큼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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